[피플파워] 조근식 경상남도약사회 부회장

꿈은 꿈이고 직업은 직업이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꿈인 작가를 포기하고 가족 생계를 짊어진 약사가 되었다. 직업은 직업이고 꿈은 꿈이다. 그는 약사로 일하지만, 항상 배우며 꿈꾼다. 오케스트라 단장, KBS 시청자 네트워크 실행위원 활동 등 항상 의욕 넘치며 도전도 곧잘 한다. 언젠가 멀리 저개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살고 싶다는 그는 다리가 불편한 3급 지체장애인이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고 매사 당당한 백 점짜리 아빠 조근식 씨다.

손님을 맞을 때마다 균형 잡히지 않은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물어보기 조심스러웠다. 그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생후 10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았어요. 3급 장애판정을 받았죠. 그래서 다리가 조금 불편합니다.”

창원시 의창구 명서동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조근식(55) 씨는 학창시절 ‘조법’으로 불렸다. 친구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하나하나 짚어서다. 그때 올곧은 성품이 지금도 몸에 배어있는 듯했다.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부드럽지만 단단하고 소신 있다.

“책 중에서 역사소설을 좋아해요. 역사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어떻게 전개되는지 멋대로 상상할 수 있죠. 작가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든 소설 작가든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꿈과 직업이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꿈과 직업이 같은 사람, 몇 명이나 될까

조근식 경상남도약사회 부회장./박일호 기자

그에게 약사는 꿈이라기보다는 직업이다.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직업으로 약사를 택했다.

70년대 약대는 ‘농땡이’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면 졸업과 동시에 약사면허가 나왔다고 한다. 보통 한 학교에서 하위 10% 정도만 졸업하지 못해 약사면허가 나오지 않았다. 조근식 씨는 “당시 서울, 부산, 대구 등 약학 대학이 10개 남짓 있어 약사면허 합격률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약대를 졸업하면 연구 분야, 약국 개원, 병원 약국, 제약회사 영업 등 다양한 곳에 취직할 수 있다. 그는 81년 졸업 후 약품 회사에 취직해 약 관련 연구개발을 했다. 그런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약국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 직장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제가 장남이라 동생들도 챙겨야 했거든요. 그래서 약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동생들도 사회인이 되었고, 그는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그는 약국을 하며 부지런히 대학원에 다녔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사회에도 관심이 많아 창원대 교육대학원에서 음악전공을, 경상대 해양과학대학에서 해양수산학을 전공했다. 약사에게 음악전공과 해양수산학 전공 이수가 도움될 일은 거의 없다. 그는 학위를 취득하기보다는 관심분야 공부가 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을 뿐이었다.

그가 ‘조 단장’으로 불리는 까닭

약국을 운영하며 창원대 교육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하던 시절 그는 ‘창원 윈드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약사 음악인, 뭔가 낯설다. 약대를 다닐 때만 해도 그는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케스트라 단장까지 하게 되었을까? 1984년 대학 졸업 후 울산에서 약국을 하던 시절, 대학 총동창회에서 음악회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 음악회가 동기가 되어 그는 지금까지 음악과 가깝게 지낸다.

“사람들 사이에서 약사보다는 ‘조 단장’으로 불립니다. ‘창원 윈드 오케스트라’ 단장을 역임했거든요. 13년 전 강영준 교수와 경남 오페라단도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아요.”

그 덕분에 2008년과 2010년, 두 번에 걸쳐 약사회 송년 음악회를 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창원 윈드 오케스트라'를 통해 ‘경찰의 노래’에 오케스트라 반주를 넣어 노래를 만들고 사천 비행장과 39사단 위문공연도 했다. 거제, 합천, 의령 등 순회 음악회까지 했으니 약사가 아니라 조 단장이라 불릴만하다.

그는 ‘창원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자 악기구매에 나섰다. 90년대 초반 타악기인 팀파니가 700만 원 정도 했다. 그때 700만 원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액수다. 팀파니를 비롯해 단체 악기와 연습실, 성악가 초청 대강료 등 비용은 전부 조 단장 몫이었다.

“당시 프로그램에 보면 이게 음악회인가 할 정도로 상호가 많이 들어갔어요. 저는 그런 것이 싫었습니다. 음악 표지, 목차, 단원 현황 등 찬조 없이 음악에 관한 프로그램만 만들고 싶어 지원 자체를 받지 않았어요.”

요즘은 기업에서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창원 윈드 오케스트라’ 단장을 할 시절만 해도 창원에는 문화 지원을 하는 사람이나 기업이 거의 없었다. 그때 조 단장은 사비를 털어 개인독주회를 열어주고 단원에게 대관료를 내어 주는 등 문화 지원 멘토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다. 그는 당시 오케스트라를 통해 문화·예술 지원에 한 발짝 내디뎌 창원 문화 지원 멘토 확장에 이바지했다고 돌이켰다.

조근식 경상남도약사회 부회장./박일호 기자

자식들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

그는 지난 2007~2011년 창원시약사회장을 맡았다. 그가 처음 약사회장을 맡았을 때는 옛 창원지역에 약국이 150개 정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 약국당 1년에 여덟 번 정도 방문했다. 자주 방문하고 소통하니 어느 약국에 가족이 몇 명인지도 알 수 있었다. 원래 전문 직업인들은 모임 참여율이 적은 편인데 조단장 덕분에 약사회 참여율은 높았다.

“작년 부로 시 단위 약사회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경상남도 약사회 부회장입니다. 또 사회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KBS 시청자 네트워크 상임위원을 추천받아 하고 있죠. 그 외에도 대외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요. 사람도 많이 만나고 재미있습니다.”

활발한 사회활동 덕인지 그는 경상남도 정무부지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항상 재미있게 긍정적으로 사는 조 단장이지만 자신이 이번 경상남도 정부부지사 후보로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다.

조근식 경상남도약사회 부회장./박일호 기자

“인연이 아니었는지 잘 안됐지만, 만약 정무부지사가 됐다면 지체장애인으로서 복지 분야도 관심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또 약사로서, 음악전공자로서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는 이름 석 자 걸고 떳떳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아들딸 때문인데, 자식에게 욕 안 먹이고 누가 안 되는 게 그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라고 했다. 대외활동이 많아 가족들이 섭섭할 법도 한데, 가족은 그를 적극 지지해 준다. 그리고 자신도 가족을 지지해준다. 가정에 충실하고 아들딸 잘 키웠으니, 좋은 아빠라고 그는 자신 있게 말한다. 딸은 공부해서 56회 행정고시 합격, 지금은 행정안전부에서 근무하고 아들은 대학원에서 공대를 다니고 있다. 그가 믿고 지지해준 덕분이다.

“이만하면 잘 키운 거 아닌가요? 그러니 100점짜리 아빠죠 뭐.”

약사생활과 대외활동 병행, 시간 활용이 관건

그가 운영하는 ‘the큰약국’에는 하루 평균 100명, 많게는 120명 정도 손님이 온다. 많은 손님을 맞이하다 보면 다른 사회활동은 어떻게 하는지 생각하던 찰나 그는 반 근무만 한다고 얘기했다.

“온종일 약국에 있는 게 아니라 오전·오후 이렇게 나눠서 반 근무만 해요. 어차피 평생 해야 할 일인데 종일 근무해 몸 상하는 것보다 이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개인 생활도 할 수 있고요.”

그는 매사 열심히 했지만 버릴 때는 버릴 줄도 알았다. 약국에서 혼자 근무해 돈을 더 벌기보다는 사람을 고용해 반 근무만 하며 개인 시간을 늘렸다. 수입은 어느 정도 줄인 게 됐지만, 개인 시간을 얻은 셈이다.

“성취할 수 있는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두는 편입니다. 만나보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공연 등 충분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자신을 재발견할 수도 있으니 이러한 시간할애는 필요하다고 봐요.”

그렇다고 약국을 찾는 환자에게 소홀할 수도 없다. 그는 처방받는 약이 어떤 것인지 환자들에게 꼼꼼하게 설명했다. 처지를 바꿔 자신이 환자여도 이게 무슨 약인지 궁금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조근식 경상남도약사회 부회장./박일호 기자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흔히 들어본 말이다. 그리고 약사인 그가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변호사에 쓰인 ‘사’자는 선비 사(士)지만 약사에 쓰인 ‘사’는 스승 사(師)다. 그래서 그는 약사를 ‘약의 스승’, ‘약의 최고 권위자’라고 말한다. 그만큼 약사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남에게 베푸는 게 즐겁습니다”

“저는 매사 즐겁게 삽니다. 즐겁게 살면 엔도르핀이 많이 분비되니 건강에도 좋고요.”

그는 늘 좋은 약을 챙겨 먹을 수 있는 약사지만 건강을 위해서는 즐거운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휴대전화 메신저 대화명도 ‘남이 즐거워야 내가 즐겁다’로 돼 있다. 만약 약사가 되지 않았다면 사회운동가가 되지 않았을까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갖춘 능력을 베풀고 타인을 도와주는 걸 즐거워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괜히 신경 쓰이는 그다.

“보통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하면 다들 챙기고 나서 제가 마지막에 가요. 익숙합니다. 이런 사소한 부분조차 남에게 베푸는 일이라면 즐거워요. 저는 남이 즐거워야 제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즐거우려면 희생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약국을 운영하면서 환자를 대하는 마음도 비슷했다. 옛날 약국은 약을 처방해 주는 곳보다는 사랑방 개념이 컸다. 하지만 그는 많은 가게가 체인화된 후 그런 소소한 모습이 사라지고 서로 간 대화도 없어졌다며 아쉬워했다.

“요즘은 ‘동네가게’를 찾아볼 수 없어요. 대부분 체인화된 가게들이죠. 그만큼 인간미가 없어져 사회가 경직된 것 같아요. 찾아주는 환자들에게 더 열심히 복약지도를 하고 약 상세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그만큼 환자들도 약사들을 믿고 약사 처방에 따라와 줬으면 해요.”

그는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베트남이나 네팔 등 저개발국에서 봉사하며 남은 인생을 살고 싶어 했다. 아무래도 국내보다는 저개발국 쪽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아서다. 외국에서 홀로 보내는 말년, 가족이 그립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저와 가족은 서로 선택을 지지했어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세상이 좋아졌어요. 화상 전화로 얼굴도 볼 수 있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나요. 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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