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러시아를 찍는 사진작가 유근종

유근종(42). 그는 20년 넘은 작업 중에 유독 러시아의 풍경과 사람들에 강한 애정을 보이는 사진작가이다. 지금까지 그가 연 세 번의 전시회도 모두 러시아의 풍경과 사람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러시아통’으로 알려져 있다. 밥벌이로서의 사진작업 외에 그가 찍고 싶은 것은 자신이 그리워하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러시아의 모든 것들이다.

흰 자작나무 숲이 눈앞에 들어섰다. 눈 덮인 낮은 언덕과 마을 사이로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다. 작은 프레임 속 풍경들이 동화책 속 일러스트처럼 펼쳐져 있었다. 아득한 러시아가 따뜻한 온기를 품고 다가왔다.

카페테리아를 겸한 작은 전시 공간 ‘숲’에서 ‘러시아를 찍는’ 사진작가 유근종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엔 사진전이라 하기엔 뭐하다. 지난 3월 짧은 일정으로 러시아를 다녀왔는데 그때 찍은 거다.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1초의 러시아’이다. 메인 사진이 10컷인데 모두 합쳐도 노출시간이 0.6초 밖에 되지 않아 ‘1초의 러시아’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유근종 작가./권영란 기자

유 작가는 3.5 전시회라고 말했다. 그는 2006년 세 번째 전시회 이후 아직 네 번째 전시회를 갖지 못했다.

“음, 이번 전시회는 네 번째 전시회로 가는 플랫폼 같은 거다. 수년 만에 간 러시아는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었다. 풍경과 사람을 틈틈이 찍었다. 이번 나의 느낌과 현재의 러시아를 조금이라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러시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개방이 되고 몇 년 후 사람들은 더러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소리를 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그리고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진 많은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러시아에 대한 막연한 꿈을 꾸게 한 것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자작나무 숲./유근종 작가

역광으로 찍을 때의 느낌 좋아…

“어렸을 때 어느날 아버지가 카메라를 들고 오셨다. 반수동의 ‘미놀타 하이메틱’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는 면사무소에 잡상인들이 많이 들락거렸는데 충동구매를 하신 거다. 덕분에 나는 기회될 때마다 찍어대곤 했다. 잘 찍는다는 칭찬도 들었지만 너무 찍어대는 통에 물론 쓸데없이 필름을 다 썼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사진 찍는 걸 한동안 잊어버렸다고 한다. 다시 사진을 접한 건 역시 군대시절이었다고. 해안초소에 5~6명이 마치 식구처럼 지내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미놀타 X300을 들고 있어 빌려서 찍었다고 한다.

유작가가 자신의 카메라를 가지게 된 것은 제대 말년 경이었다. 미놀타X700을 들고 그는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꽃과 사람, 자잘한 일상들을 찍어댔다. 학교 친구들은 생일때면 필름을 선물로 주었다.

네바 강변에서 만난 어느 결혼식

“1년간의 노가다와 아르바이트로 니콘F3를 샀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해요. 카메라의 문제가 아님에도 실력이 수직상승한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였지요.”

그는 순광으로 찍기보다 역광으로 찍는 걸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 그를 보고 사진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꼭 한 마디씩 “왜 역광으로 찍어요?”라고 묻는다. 그는 이유는 없다고 한다.

“순광으로 찍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역광으로 찍은 사진의 느낌이 훨씬 더 좋아요. 뭔지 사진 속 이야기가 더 많은 듯하고 더 긴장감이 느껴져요.”

아르바뜨 거리에 있는 한인3세 가수 빅토르 최의 추모의 벽

그에게 모스크바 생활 1년은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찍는 게 전부였단다. 그는 날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로 나갔다. 아르바뜨는 러시아 청춘들의 문화와 정서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문화예술의 거리’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문화예술인들이 거리에 나와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기예를 보여주고 러시아 사람들의 자유와 예술을 알 수 있는 곳이다. 그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스크바 외곽에 살면서 완행열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그 거리의 모든 것에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그 사람에게 현상해서 한 장씩 주었다고 한다. 점차 아르바뜨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더러 인사를 나누고 더러 친구가 되어 그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도 생겼다. 모스크바 1년 생활을 지내면서 그는 이방인에서 아르바뜨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83번 가로등 앞에 가면 ‘실루엣 할아버지’라 불리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까만 종이에 사람의 실루엣을 가위로 순식간에 오려주는 사람이었다. 그 할아버지 사진을 찍을 때도 역광으로 할아버지와 그 주변 둘러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오게 찍었다. 그 사진을 할아버지한테 드렸더니 “내가 지금까지 받은 사진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 사람들의 ‘착한 정서’를 좋아한다고 했다. 또 그들의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혼합된 정서가 좋았다고.

./유근종 작가

러시아, 내 사진 인생의 출발점

“러시아라뇨, 생각지도 못했지요. 원래 러시아는 지도 속에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지요.”

유근종 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러시아와의 인연은 정말 우연히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일 뿐이었다 한다.

“대입 시험에 떨어져 시골에서 농사를 도와주고 있다가 군 입대를 했어요. 대학을 갈 거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1990년 군대 최전방에서 훈련을 받고 울진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 고참들이 나한테 ‘그래도 대학은 꼭 가라’고 말했어요. 93년 봄 제대를 했는데 그 무렵이 마침 봄 농사가 시작될 때였요. 제대하자마자 수 십 마지기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어요. 봄 일을 끝내고나니 조금 여유가 생겼고, 진주에 와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았지요. 그때 진주에서 레코드점을 하면서 광고기획사를 하는 데가 있었어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군대시절 씨디를 사서는 들을 데가 없어 인켈 대리점을 찾아가 좀 틀어달라고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레코드점에서 점원으로 일을 했어요.”

./유근종 작가

그는 가을 농번기가 되어 다시 고향 산청으로 돌아와 가을걷이를 끝내고 차가운 방에 누워있는데 ‘젊은 놈이 남들 다 가는 대학도 못가고 인생이 끝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막연히 ‘광고카피’를 하고 싶었다 한다.

1995년 26살에 러시아학과에 입학했다. 불어니 독어니 중국어니 중에서 러시아어가 눈에 띄였다. '나보다 6살 어린 동료들과 원점에서 시작할 수 있는 거니까'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러시아어가 재미있었다. 관심있으니 쉽고 더 재미있어졌다.

외국인교수와 친해지고 러시아를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2006년 진주 MBC 스텝들과 붉은 광장에서

갈 형편이 되지 않았는데 3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러시아에 갔다. 29살이었고 그때가 1998년이었다. 한 달 간의 짧은 여정이었다. '민족우호대학'에서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학비가 싸고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대학이었다. 한 달 간의 경비는 150만 원정도. 두 번째는 다음 해 99년도 여름방학이었다. 그땐 우리 과 동기 4명과 같이 갔다. 그땐 하루종일 사진을 찍었다.

2000년 졸업하고 내고갤러리에서 첫번째 러시아 사진전을 열었다. 그때는 러시아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정도였다.

“러시아 가기 전에 전시회 한 번 하고 가라”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8월 초에 다시 러시아로 갔다. 학교 비자를 받고 1년간 공부할 생각으로 학교 비자를 받았다.

./유근종 작가

러시아는 9월에 개강하지만 한 달간 일찍 간 것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마음껏 자유롭게 무엇이든 러시아의 모든 걸 찍고 싶었다. 어느 정도 90%이상은 말이 통했다. 친구 명의의 집에 얹혀 있으면서 1년 생활비와 학비를 비교하면서 고민했다. 그리곤 학교에 출국비자를 받아서 2000년 가을에 상뜨 뻬제르부르크에 있는 친구와 형, 4명이서 인근 나라 스웨덴 핀란드 등을 마음껏 다녔다.

그리고는 상업용 비자(멀티 비자)를 받고 다시 러시아로 와서 학생이 아니면서 학생인 척 생활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모스크바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가이드 알바를 하면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했다.

그리고 2001년 추석 전날 그는 귀국했다. 2003년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모스크바의 풍경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2006년 세번째 전시회를 진주MBC와 채송아트센트에서 가졌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다니던 여정을 엮은 전시회였다. 사진전을 찾은 사람들은 “러시아라 하면 ‘춥다’, ‘흰 눈’, ‘시베리아’ 등 단편적인 것만 떠올렸는데 러시아에도 여름이 있네, 러시아가 이렇구나”라고 말했다.

./유근종 작가

‘셔터 소리는 시각적 정지를 보여준다’

그는 겨울이 가고 봄이 기지개를 펴고 있는 이맘때면 항상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 기억들과 녹색 빛을 머금고 피어나는 자작나무 이파리들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3월 그는 “끼로프가 어딨어요?”라는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설명 끝에 그는 결국 다시 러시아행 비행기를 타고 말았다. 짧은 여정이었다.

전시모습./권영란 기자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많은 변화를 겪은 듯했다. 몇 년 전과 비교했을 때 물가가 많이 올랐다는 것이 제법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거리인 아르바뜨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활기가 넘쳤고, 그 거리에서 그는 모처럼 숨을 쉬는 듯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서 만난 연주자들. 큰 삼각형이 러시아전통악기 바랄라이카

“상뜨 뻬쩨르부르크도 몇 년 전 도시 건설 300주년을 맞아 깨끗하게 정리를 한 덕에 도시가 예전에 비해 많이 깨끗했어요. 여기저기에 보이던 집시들도 보이지 않았고 거리들은 활기가 넘쳐났지요.”
모스크바에서 끼로프까지 가는 열차 속에서 그는 차장 밖으로 들어설 자작나무숲을 기다렸다.

“자작나무 숲을 찍고 싶었어요. 그때 하필 카메라가 고장 났어요. 솔직히 당혹스러웠지요. 할수없이 현지에서 제일 싼 카메라를 샀어요.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자작나무숲을 찾을 수 없었어요. 기차 안에서 숙제하는 마음으로 자작나무 숲을 찾고 기다렸지요. 언제 다시 오겠냐는 애타는 심정으로 기도했는데…. 모스크바에서 끼로프까지는 900킬로미터가 넘어요. 어느 순간 눈 앞에 자작나무 숲이 들어왔어요. 차창으로 보는 순간, 기차 유리창에 바짝 대고 찍었지요. 다행히도 이 자작나무숲이 맘에 들어요. 이번에 찍은 자작나무숲은 딱 한 컷이지요.”

유근종 씨는 그때의 셔터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딱 한 컷’에 대한 애정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고.

./유근종 작가

“많은 사진작가들이 말했지만 셔터 소리는 그 순간 희열을 주죠. 셔터 소리는 찰나를 기록하는 소리고, 그 찰나를 정지시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진이라는 생각들이지요….”

그는 지금도 러시아를 꿈꾸고 있고 앞으로 자신이 러시아 다큐멘터리 사진가이기를 또한 꿈꾼다. 언젠가는 볼가강 유역을 돌면서 잊혀져가는 역사와 유산들을 찍고 싶고, 러시아와 러시아의 영혼을 찍고 싶어한다.

유근종 씨. 그는 자신을 ‘5년 후에는 체코 프라하의 봄 음악제를, 10년 후에는 비엔나 필 신년 음악회에 가기를 꿈꾸는, 그리고 통일이 되면 부산에서 열차로 시베리아 횡단을 꿈꾸는, 반경 1미터 이내에 사진기가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다.

./유근종 작가
./유근종 작가
./유근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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