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비범(非凡)’이란 말을 자주 쓴다. 범상치 않다는 건 무슨 뜻일까? 불가에서 말하는 비유를 빌리자면 ‘진흙에서 피는 연꽃’쯤이 되지 않을까? 이 때 진흙은 평범이고 연꽃은 비범이다. 불설(佛說)을 멋대로 인용한 이유는 비범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재능을 일컫는 게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비범이란 진부함을 깨닫고 그걸 꿰뚫는 힘이다. 미국 작가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는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피츠제럴드는 하찮은 소설조차도 아름답기 그지없이 써내렸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통섭형 연구가 피터 터친(Peter Turchin)은 고전중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대작 <로마제국 쇠망사>를 “제국붕괴에 대한 통찰을 전해주지 못하는 범작”이라고 혹평하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한다. 이 책 두 번째 권을 선물받은 글로스터란 이는 저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에게 “또 넌더리 나는 두껍고 재미없는 책이로군! 끊임없이 주저리 주저리! 안그래요 기번씨?”라고 말했다고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150만여 단어로 이뤄진 방대한 저작이자 탁월한 역사서로 손꼽히는 명작이다. 그렇지만 터친은 도발적인 어투로 이런 신화에 매몰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제국붕괴에 대한 비범한 통찰이 없다는 이유로.

예술은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 일정한 형식과 경향성을 지닌다. 음악은 특히 더 그러하다. 개중에서도 첨단 유행(?) 음악은 훨씬 심하다. 걸그룹이 만들어내는 대중음악을 생각해보라! 그룹마다 감상포인트가 미세하게 다르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천편일률이란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차피 소비되는 건 음악이 아니라 이미지이지만.

고상한 클래식도 다르지 않다.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 시도가 있음에도 불구, 아직도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건 ‘모씨(모차르트)와 배씨(베토벤)로 대표되는 몇 몇 작곡가뿐이다. 그러다보니 전자는 화려한 외양, 후자는 재빠른 기교가 다른 모든 덕목을 압도한다. 형식과 경향성이 이처럼 외길로 치달으면 매너리즘이란 함정이 나타난다. 이 함정은 진흙을 뚫고 나오는 연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행크 존스(Hank Jones) / 피아니스트   

재즈는 이 점에서 약간 자유롭다. 재즈라고 매너리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장르는 스스로 그런 매너리즘을 넘어서려는 ‘본질적인 추동력’을 지니고 있다. 일전에 사망한 피아니스트 행크 존스(Hank Jones)가 이끌던 그레이트 재즈 트리오를 들어보자. 황금기 멤버 론 카터(Ron Carter 베이스), 토니 윌리엄스(Tony Willams 드럼)와 함께 한 스탠더드 넘버 ‘S'wonderful’ 이다. 이 곡은 짧은 드럼 독주로 시작하는데, 첫머리와 중간 독주를 포함해 토니 윌리엄스가 들려주는 드럼연주는 비범 그 자체다. 약동하는 리듬, 음악에 완전히 용해된 테크닉은 감상자를 무아지경으로 이끈다. 형식은 전형적인 피아노 트리오다. 가장 흔한 편성이다. 자칫하면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소리 듣기 딱 알맞다. 그렇지만 드럼을 앞세운 이들은 동시대 연주자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런 창조적인 연주는 수없이 많다. 같은 피아노 트리오 편성이지만 키스 재릿(Keith Jarrett)이 맹우(盟友) 게리 피콕(Gary Peacock 베이스), 잭 디조넷(Jack Dejohnette 드럼)과 함께 한 재즈 스탠더드 ‘All the things you are’ 라이브 공연은 세 악기가 어떻게 역동적으로 결합해 트리오 편성이 지닌 매너리즘을 일소(?)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엉덩이를 들고 방정맞게 앵앵거리는 키스 재릿과 잔뜩 찌푸린 인상의 잭 디조넷을 보는 일은 보너스다.

물론 이건 경상도 말로 ‘만고 내 생각’이다. 음악이란 극히 주관적인 세계이므로 내가 느낀 감흥을 딴 사람이 따를 것이라는 기대는 하면 안된다. 다만 일정한 형식을 기반으로, 거기서 새로운 샘물을 길어올리는 힘이 재즈에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 보면 된다.

배우 겸 감독으로 유명한 사람중에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작품을 발표하는 독특한 존재인데, 이 사람이 골수 재즈 애호가다. 그가 일전에 블루스(Blues) 음악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에서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과 마주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피아노 앞에 앉은 백발의 노대가(老大家)와 골수 재즈 애호가는 블루스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과 답을 주고 받는다. 그러자 브루벡이 실제로 블루스 몇 소절을 피아노로 연주한다. 심오하면서도 멜로딕하고, 블루스가 주는 매력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이 연주를 듣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Take five’란 명작을 남겼음에도 그를 평범한 백인 재즈 아티스트로 생각한 나 또한 깜짝 놀랐다. 이 영감이 이렇게 멋진 깊이를 지녔다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어내는 훌륭한 영화 또한 이런 비범에 자극받은 탓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 시작해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넘어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영화에서 농축한 새로움과 깊이는 아마도 재즈라는 동반자가 있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색소포니스트 소니 롤린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내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 자신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흡사 ‘내 사전에 매너리즘이란 말은 없어!’라고 소리치는 듯 하다.

장르를 막론하고 이른바 ‘대곡(大曲)’이란 타이틀로 포장된 음악중에는 터친이 조롱했듯이 뻔한 멜로디와 진부한 표현으로 ‘주저리 주저리’ 읊어대는 작품이 꽤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신화를 좀체 의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다들 앞선 이들이 내놓은 평가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음악을 겉멋으로 느꼈을 뿐,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즈는 말한다. “까짓 것 걷어차버려! 귀와 몸을 쭈삣쭈삣하게 만드는 이 음악을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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