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서후의 컬러풀 아프리카 8편

추운 밤을 지나 만나는 아침 햇살은 너무나 달콤하다. 아침을 먹고 바위에 눈을 감고 기댄다. 모닥불을 쬐듯, 스멀스멀 올라오는 햇살의 온기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는데 엇, 바위 위에 도마뱀, 바위 다람쥐들도 나처럼 햇살을 쐬고 있다. 그 장면에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는데 그건 추운 밤을 함께 버틴 이들끼리 통하는 왠지 모를 친근감이었다.

에토샤 국립공원 가는 길

어둔 새벽, 힘바 부족이 사는 마을에서 들려오는 닭소리에 잠이 깬다. 아마 새벽 5시나 됐을 거다. 거참 닭, 이라니.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나미비아의 한구석, 숲 속에 텐트를 치고 자다가 느닷없이 익숙한 닭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이건 뭔가. 그 비현실감에 잠시 멍해진다. 간밤에는 추워서 몇 번이나 뒤척였다. 패딩을 입고 잘 걸 후회한다.

아침은 사과 한 개, 시리얼, 식빵 두 쪽. 잠시 바위에 기대 달콤한 아침 햇살을 즐긴다. 오전 7시 10분 출발. 잘 있어요, 힘바 부족. 아침 햇살을 받아 트럭 그림자가 길다. 긴 그림자를 초원에 펄럭이며 우리는 달린다.

오전 11시 에토샤(Etosha) 국립공원 도착. 세계에서 가장 큰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란다. 뭐 대충 넓이가 2만 ㎢. 남한이 면적이 10만 ㎢니 뭐, 대충 남한의 5분의 1이구먼. 샤드웰이 출입 절차를 밟는 동안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걸어서 입구를 지난다. 커다란 간판에 적힌 주의사항. 소리 내지 말 것! 차에서 내리지 말 것!

트럭이 공원 내 도로를 달린다. 도로는 죄다 비포장이다. 당연한 거로 생각한다. 아니 도로 같은 것 자체가 없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다들 좌우를 번갈아 보며 동물 찾기에 바쁘다. 커다란 물웅덩이에 도착. 웅덩이는 건기에 동물을 보기 가장 좋은 장소다. 트럭이 다가가도 동물들은 도망가지 않는다. 무리 지어 마른 풀을 뜯는 스프링복(springbok, 도망칠 땐 정말 스프링처럼 높이 뛰어오른다.), 나무 그늘에서 쉬는 얼룩말(얼룩말은 너무 많아서 지겹다), 날개를 펴고 바람을 쐬는 큰 새(이름이 뭐였지? 나미비아의 국조라는데, 굉장히 화려하다.) 초식동물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칼(멋있다).

스프링복./이서후 자유기고가

오늘 묵을 오카쿠요(Okaukuejo) 캠프장. 와 정말 크다. 고급 호텔, 콘도 등 다양한 숙박시설을 갖췄다. 크고 깨끗한 수영장도 있다. 텐트를 치는 야영장도 아주 많다. 우리는 그 중 한 곳에다 짐을 풀고 텐트를 친다. 점심을 먹고 일행 몇 명과 수영장으로 간다. 수영복 차림으로 여유롭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거참, 사람 잡아먹는 사자가 돌아다닌다는 야생의 한 가운데, 이 무슨 한가한 장면인가.

자칼./이서후 자유기고가

사자, 봤다

오후 3시. 다시 트럭을 타고 게임 드라이브(game drive). 차를 타고 동물을 구경하는 걸 여기선 게임 드라이브라고 부른다. 영어 ‘game’에는 사냥감이란 뜻이 있다. 기원은 중세 유럽에서 유행한 여우사냥이다. 귀족들에게 여유사냥은 놀이, 말 그대로 게임(game)이었다. 여우사냥이 하도 유행하니까 여우의 씨가 말랐다. 그러자 귀족들은 여우 대신 농노의 자식들을 숲 속에 푼다. 게임, 가혹하고 슬픈 역사를 지닌 단어다.

빅 파이브(Big 5)란 말이 있다. 다섯 종의 주요 포유동물을 가리킨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사자, 표범, 코끼리, 버펄로, 코뿔소가 빅 파이브다. 이들은 당연히 게임 드라이브의 주요 공략 동물이다. 빅 파이브만 다 보고 가도 성공한 여행으로 쳐 준다. 그중에 제일은 역시 사자다. 이 넓은 공원에 200여 마리뿐이라는 초원의 왕 사자. 일행 중 이스라엘인 아밋이 캠프장에서 자기네 나라 사람을 만났는데, 사자가 얼룩말을 먹는 걸 보고 왔다고 한다. 우리는 사자를 봤다는 장소로 트럭을 몰았다.

사자./이서후 자유기고가

과연 두 마리 사자가 고기를 뜯고 있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젠장, 너무 멀어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쪽으로는 도로가 없어 갈 수가 없다. 이 공원에서 차량은 절대로 도로를 벗어나면 안 된다. 저게 지금 뭔가를 먹는 건가? 그냥 앉아 잇는 건가? 망원경을 빌려 보니 확실히 사자가 맞다. 암수 두 마리 사자가 잡은 지 오래된 것 같은 짐승을 사이에 두고 뜯고 있다. 짐승은 얼룩말인 것 같다. 뭐 어쨌든 봤다! 사자!

사자를 지나치자 저 멀리 기린 무리가 보인다. 뉘엿뉘엿 약해진 해를 등지고, 초원 위 외롭게 우뚝 선 나무와 기린. 이거야말로 상상 속의 아프리카 그대로다. 역광에 기린의 긴 그림자들은 실루엣으로 남는다. 그림자들이 갑자기 일렬로 달린다. 수십 마리의 기린이 달리는 장면은 동물의 왕국에서 보던 그대로다.

돌아다니다 도로 위에 쓰러진 스프링복을 본다. 바닥에 피를 흘리고 있다. 차에 받힌 것 같다. 그냥 지나쳐 가는데 고개를 돌려 우리를 무심히 쳐다보는 스프링복. 저 녀석은 인제 어떻게 되는 걸까. 캠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칼을 두 마리 본다. 방향으로 보아 저 두 마리가 스프링복을 잡아먹을 것 같다.

코뿔쇼쇼쇼!

국립공원의 또 다른 규칙. 일출 후에야 출입문을 나설 수 있고 일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 일출과 일몰 시각이 출입문에 적혀 있다. 우리는 해가 쓸쓸해진 오후 5시 30분, 긴 먼지를 일으키며 캠프장으로 돌아왔다. 캠프장 내 높은 탑에 올라가서 해가 초원 아래로 사라지는 장면을 본다. 느리고 붉은 일몰이다.

사실 캠프장 울타리 바로 옆에도 큰 물웅덩이가 있다. 이건 인공적으로 만든 거다. 밤이 되면 이 웅덩이를 향해 조명이 비친다. 그러면 웅덩이는 일종의 무대가 된다. 사람들은 울타리 너머 조명 뒤에 설치된 객석에 편하게 앉아 동물들이 물 먹는 걸 관람한다. 지금 거기에 가면 코끼리를 볼 수 있다는 소릴 듣고 가는 중이다.

인공 물웅덩이 코끼리./이서후 자유기고가

뭐야, 없잖아! 한참을 기다려도 코끼리가 나타나지 않아서 에이, 하고 돌아오는데 일행인 여자애가 지금 코뿔소가 오고 있다고 난리다. 엇, 다시 돌아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진짜 코뿔소다! 코뿔소는 물웅덩이를 서서히 한 바퀴 돈다. 많은 사람이 숨을 죽이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코뿔소는 고개를 들어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신다. 아마도 인기척을 느꼈으리라. 그러니까 뭔가 낌새는 이상한데 그게 그렇게 위험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조명 뒤에서 수십 명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 다른 코뿔소 한 마리가 물웅덩이로 다가온다. 먼저 와 있던 코뿔소가 새로 온 녀석을 의식하더니 천천히 다가간다. 둘은 한참을 코를 맞대고 서 있다가 다시 떨어져 각자 자리에서 물을 마신다. 어엇, 저 멀리 어둠 속에 기린 세 마리가 이쪽 눈치를 보면서 서성이고 있다.

코뿔소./이서후 자유기고가

코끼리 방귀 소리

물웅덩이 주변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린 지 몇 시간째. 드디어!!! 코끼리가 나타났다. 커다란 아프리카코끼리 두 마리가 귀는 펄럭펄럭, 코는 흔들흔들하면서 다가온다. 코끼리가 오자 코뿔소가 천천히 물러난다. 코끼리 두 마리가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코를 물속에 잠시 담그고는 다시 입에다 갖다 댄다. 코에서는 쉭쉭 공기를 내뿜는 소리가 난다. 기린은 여전히 웅덩이로 오지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댄다.

저녁을 먹는데 히히, 하고 짐승 우는소리가 난다. 자칼 소리란다. 샤드웰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신발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하하하, 짐승들이 와서 물어 간답니다. 저녁을 먹고 바에서 포도주를 한잔하고 물웅덩이로 다시 가보니 코끼리가 세 마리로 늘었다. 갑자기 제일 큰 녀석이 똥을 싼다. 정말 크다! 똥구멍에서 무지막지한 똥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탄성을 지른다. 그 옆에 좀 작은 녀석은 방귀를 뀐다. 푸더더더덕 쉬이이이이, 하고 길게 바람세는 소리가 난다. 그러고는 웅덩이를 떠나는 코끼리들. 흔들림 없이, 묵직하게, 갈 길을 간다.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다음 날 새벽 6시. 어둠 속에서 다들 분주하다. 텐트를 걷고 아침 준비를 한다. 우리 트럭뿐 아니라 다른 트럭도 그렇다. 동물을 보려면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나서야 해서다. 짐을 다 싣고 공원 내 두 번째 캠프장을 향해 출발!

이제 얼룩말은 지겹다

출입문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에나 두 마리를 만난다. 그들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스프링복 무리를 향해 다가간다. 20m 정도까지 접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스프링복. 10m 접근, 가만히 엎드려 있던 하이에나의 전력 질주. 깜짝 놀라 달아나는 스프링복. 한눈에 봐도 터무니없는 전략이다. 역시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나 뜯을 운명인가.

하이에나./이서후 자유기고가

물웅덩이에서 다시 자칼을 본다. 금방 본 하이에나와 비교하니 역시 멋있다. 초식동물에 물웅덩이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포식자가 있을 가능성이 아주 커서다. 그래도 물은 꼭 먹어야 한다. 마치 오징어가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을 향해 다가가듯. 위험한 걸 본능적으로 알면서도 그곳에는 먹이가 있으므로.

오전 8시 우리는 초원 한가운데 마련된 간이 화장실에 들렀다. 10평 남짓한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드럼통을 묻어 화장실로 쓴다. 가만히 보면 동물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 갇힌 꼴이다. 울타리 철조망을 부여잡고 속으로 외친다. 살려주세요! 다시 출발. 앗, 기린! 이번엔 도롯가에 서 있다. 한가하게 높은 가지의 풀을 뜯다가 잠시 우리를 멀뚱멀뚱 바라본다. 우아하다. 느긋하다. 아니 오롯이 우뚝 솟은 그 모습은 차라리 외로워 보인다.

얼룩말./이서후 자유기고가

이제는 동물이 나타나도 시큰둥하다. 스프링복과 얼룩말은 지겹기까지 하다. 점심때가 가까운 초원은 아주 조용하다. 가끔 동물들이 덜컹거리는 트럭 소리에 고개를 들고 잠시 우리를 바라볼 뿐. 어제 갔던 물웅덩이를 다시 찾는다.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진다. 물웅덩이 주변으로 펼쳐진 수백 마리의 동물들. 얼룩말, 스프링복, 쿠두, 오릭스 등등. 이건 정말이지 장관이다. 바로 이 장면을 보려고 그 몇 시간을 헤매고 다닌 듯하다. 그저 입을 벌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이 향연을.

에토샤 판 가는 길./이서후 자유기고가

늦은 오후의 초원

기린./이서후 자유기고가

오전 11시 공원 내 두 번째 캠프장 도착. 하라리(halali)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수영장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오후 3시 트럭을 타고 다시 사바나로. 뜨거운 태양, 건조한 초원, 한낮의 열사 아래서 동물들은 그늘로 숨어들었다. 우리는 지금 에토샤 판(Etosha Pan)으로 향한다. 이는 물이 고였다 마른, 거대한 소금 사막이다. 지름이 120㎞가 넘는다. 우기가 되면 이곳에 물이 들어차고, 건기가 물이 전부 증발한다. 에토샤의 동물들이 기대 사는 곳이다.

도착하니 그야말로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하얀 사막. 세상의 끝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사진 찍기 바쁜 일행을 등지고 그 하얀 대지의 끝을 향해 무작정 걷는다. 제법 멀리 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사방을 둘러봐도 오직 나 혼자. 소리마저 갈 곳을 모르고 증발해 버릴 것 같은 공허.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서서 멀리멀리 바라보고 싶다.

오후가 깊어지면서 햇빛이 점점 약해진다. 사바나에 긴 그림자로 서 있는 동물들. 원근감에 충실한 저 풍경을 다들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캠프장 도착, 저녁을 먹기 전에 물웅덩이로 향한다. 노을빛이 붉어지면서 하늘도 특유의 푸른빛을 더해간다. 어두운 땅, 유일하게 물웅덩이만 노을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다.

노을이 지고 물웅덩이에 조명이 켜진다. 느릿느릿 동물들이 다가온다. 쌀쌀하고 쓸쓸한 밤이다. 굿나잇.

타조./이서후 자유기고가
와일드비스트./이서후 자유기고가
아침햇살을 쬐는 다람쥐./이서후 자유기고가
노란부리 코뿔새./이서후 자유기고가
지구상에서 가장 무거운 새 엽조./이서후 자유기고가
쿠두./이서후 자유기고가
임팔라./이서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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