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

머리가 벗겨진 백발노인이 있다. 남자다. 금테 안경을 썼다. 다리가 불편해 뚜벅뚜벅 걷는다. 뭐가 그리 좋은지 '허허허' 잘도 웃어 재낀다. 유난히 빨간색을 좋아한다. 평범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벗겨진 머리보다 더 빛나는 눈을 보면 안다. 그는 바로 송인식 동서화랑 관장이다.

“허허허. 안녕하세요. 동서화랑 송인식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나?” 그는 기자에게 자주 전화를 건다. 용건이 있든 없든. 매번 전화 내용은 다르지만 끝맺음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쌩규”다. 헤어질 때도 항상 빨간 손수건을 흔든다.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젠틀할 수가 없다. 화술도 뛰어나다. 그래서 그의 주위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상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생활이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박일호 기자

8개월 남짓 알고 지낸 기자에게도 그랬다. “관장님. 몇 년도, 어디에서 태어나셨어요?”라고 물으니 그는 “그런 게 중요하나?”라고 대답을 흐렸다. 그리고 그냥 “마산이라고 하자”고 했다. 사실 그는 올해 아흔 살로 한국전이 끝나던 1953년 마산에 정착했다.

경남 예술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다. 송인식 관장은 1973년 8월 31일 마산 오동동에 ‘동서화랑’을 열었다. 경남 최초의 상업 화랑이다. 화랑을 운영하기 전 그는 인쇄업과 언론계에 몸담았다.

“내가 왜 9월 1일이 아닌 8월 31일에 문을 열었게? 첫날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 끝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 동서화랑이라고 지은 이유는 그 당시 그림을 동양화, 서양화로 나눴기 때문이야.”

1978년 남성동으로, 1987년 창동으로, 1998년 오동동 고려호텔 3층으로 옮겨다니다 지난 2001년 합포구 산호동 337-80 문화빌딩 5층에 둥지를 틀었다.

문신·전혁림 당대 화가들 추억 안고

삐꺼덕 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곳에 들어서면 “딩동, 딩동” 벨 소리가 기자를 먼저 반긴다. 오른편은 전시실이고 왼쪽은 그의 사무실이다.

몇 장이나 될까? 사무실 벽면은 온통 사진과 신문지로 도배가 돼 있다. 소파와 탁자는 전시 팸플릿과 도록, 신문으로 넘쳐난다. 그는 수집광이다. 그렇게 꼼꼼할 수가 없다. 스크랩해 놓은 자료들도 단번에 어디에 있는지 찾아낸다. 인터뷰 당일도 송인식 관장은 창고에 들어가더니 팸플릿 하나를 꺼내왔다. 지난 2001년 7월 27일부터 8월 10일까지 열렸던 ‘경남 작고작가 7인 추모’전이었다.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경남 미술의 원류를 더듬어보는 전시를 열었지. 문신·박생광·강신석·정상복·이상갑·최운·유택렬은 경남화단의 1세대야. 평소 내가 수집한 그들의 사진과 편지 등도 공개했지.”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박일호 기자

특히 문신과는 각별했다. “1976년 문신이 프랑스에서 1년간 귀국했을 때 ‘문신 귀향 환영회’를 열었어. 당시 남성동 파출소 옆 한일은행 2층에서 말이야. 100여 점 모두 팔렸지. 그 돈으로 문신은 프랑스에 갈 수 있었어. 무척이나 고마워했지. 그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아. 그땐 꼬치와 단무지를 안주 삼아 청주를 마시러 오동동 술집에도 자주 갔었고 다방에도 갔지.”

그는 전혁림에 대한 기억도 끄집어냈다. “조용한 사람이었지. 이때 사진(왼쪽) 봐봐. 난 수염이 있는데 전 화백은 수염이 없지? 내가 수염을 길러보라고 꼬드겼어. (웃음) 오른쪽 사진 봐봐. 어때? 내 말을 듣고 수염을 길렀어. 참 카스텔라를 좋아했었는데…. 내가 사들고 가면 어찌나 잘 먹던지. 전 화백 빈소를 갔을 때 영정 옆에다 카스텔라를 두고 왔지.”

그는 기억력이 좋다. 박동열 작가도 “관장님 기억력만큼은 정말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박일호 기자

빨간 색 고집하며 ‘건강십칙’ 지켜

그는 정정하다. 정열을 잃지 않고자 빨간색을 유난히 고집한다. 셔츠, 양복, 양말, 신발, 장갑, 팬티까지 몽땅 빨갛다. 휴대전화도 마찬가지다. 송인식 관장이 가끔 기자 차를 탈 때가 있는데,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유는 단 하나.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이 휴대전화를 구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몇 개월이 걸렸지. 난 전화하는 것을 좋아해. 매일 무언가를 기억하고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거든. 지금도 한 달에 휴대전화 값이 20만 원은 넘어. 유선 전화는 두 대나 있지.”

그는 8, 18, 28일은 꼭 13명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느닷없이 “하하하하”하고 웃는다. 그 이유는 지은숙 작가가 지은 <폭소 곗날>이란 시에서 알 수 있다. ‘팔일, 십팔일 이십팔일은 폭소 계하는 날/ 으-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전국의 원로 열세 명이 무조건 그날 전화 걸어 그냥’ 그는 폭소클럽 회원이다.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박일호 기자

송인식 관장은 자신을 ‘독거청년’이라고 부른다. ‘독거노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건강하다. 사무실 벽면을 보면 ‘건강십칙’이 적혀져 있다. 음식은 적게 먹고 씹기를 많이 하고, 짠 것은 적게 먹고 신 것을 많이 먹고, 육류는 적게 먹고 채소를 많이 먹고, 단것은 적게 먹고 과일은 많이 먹고,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은 많이 하고, 노여움을 적게 하고, 웃음은 많이 웃고, 근심은 적게 하고 잠은 많이 자고, 옷은 적게 입고 목욕은 자주 하고, 타는 것은 적게 하고 걷기를 많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남을 위해 많이 베풀자.

이 중에서 눈에 띄는 글귀가 있다. 바로 ‘욕심을 적게 하고 남을 위해 많이 베풀자’다.

동서미술상 제정 20년 여 운영

그는 지난 1990년 사재 1억 원을 털어 동서미술상을 제정했다. 도내 최초의 민간 미술상이다. 동서미술상 운영위원회를 통해 매년 수상자가 결정되고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상금은 물론 화랑미술제 초대작가로 선정된다.

“지난 2010년부터는 경남메세나협의회 지원으로 매년 상금 5백만 원을 주지. 지난 1990년부터 95년까지 문신도 운영위원이었어. 지역 작가 중 묵묵히,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를 우선으로 하지.”

제1회부터 동서미술상 운영위원인 정목일 수필가는 “송인식 선생은 갤러리 운영자로서만이 아닌 경남지역 문화운동가로서의 역할이 선명하고, 미술 상인의 인상보다는 문화 애호가이자 운동가로서 앞장서 왔다. 마산의 고 이선관 시인 등 어려운 문화예술인들을 소리 없이 도와 온 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과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 처음에는 예술을 좋아했고, 좋아하다 보니 사랑에 빠졌고, 이젠 더는 예술을 빼놓곤 그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밖으로(전시실) 나가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보여줄게.” 무엇일까 궁금했다. “뭔데요? 관장님.” 다그치듯 물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오며 손으로 가리켰다. 박생광의 ‘여의주도’였다. 박생광은 1904년 진주출신으로 부적과 단청, 십장생, 무속화 등을 소재로 음양, 풍수, 윤회, 무속 사상을 뭉뚱그려 한국적인 특성과 영혼을 조형화시켰다.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박일호 기자

“박 화백이 1978년쯤에 그린 그림이야. KBS1 TV <진품명품>에도 나갔었지. 먹으로만 그렸어. 어때? 구름 사이로 승천하는 흑룡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송인식 동서화랑 관장은 인터뷰 도중에도 예술인을 빛내고자 스스로 작은 빛이 되기를 자처했다. 역시 별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별이 빛나도록 도와주는 빛이 있어야 한다.

현재 동서화랑은 기획 전시를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없잖아. 관장으로서 작가의 작품 하나는 사야 하는 데 그럴 능력이 없어. 전시만 열면 뭐해? 작품을 누군가가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사줘야지. 작가한테 미안해서 전시를 못 해.” 전시할 공간만 제공해주고 작가의 작품이 팔리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하는 관장들과는 역시 달랐다.

고 이선관 시인은 <동서화랑에 주는 작은 시 한 편>에서 “동서화랑은 무형의 정신적 풍요로운 상징으로 이 고장에 오늘도 내일도 또 내일도 지속할 것이다”고 바랐다. 기자의 마음도 똑같다. 송인식 관장이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동서화랑이 아닌 동서남북화랑이 될 때까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