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예술 '소장가의 세계'

작가와 작품이 그저 좋았다. 한 점 두 점 모으다 보니 유독 한 작가의 작품이 많았다. 단순히 좋아했다는 표현보다는 사랑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진주 출신인 류범형(71·국제로타리 3590지구 전 총재) 소장가는 효석 조영제(1912~1984)의 작품 72점을 보유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에서 미술관을 운영 중인 김이환(77·이영미술관 관장) 소장가는 내고 박생광(1904∼1985)의 작품 100여 점과 전혁림(1916~2010)의 작품 200여 점을 가지고 있다.

무엇에 이끌리듯 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힘이라도 작품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한 작가에게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들의 입을 통해 들어봤다.

김이환 씨의 소장품

내고 박생광 선생의 흑모란에 반해 작품을 모으기 시작한 김이환 씨.

"내고 박생광 선생의 '흑모란'이 갖고 싶어 1977년 6월 수유리로 갔었죠. 박생광이란 화백의 모란이 좋고, 그중에서도 흑모란이 출중하다는 소리를 인사동에서 귓결에 들었죠. 좋아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황매산 = 김이환 씨가 처음 손에 잡은 미술작품은 매화로 꽤 알려진 황매산 작품이었다. "그때 월급 요량으로는 거금을 들여 덥석 샀어요. 길을 '잘못(?)' 들어선 순간이었죠."

1977년 박생광 선생을 만난 뒤부터 매주 일요일 수유리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생광은 "김 선생, 내가 인자(이제)부터 기리고 싶은 기림이 있소. 후학들이 그 기림을 좀 봐야 해. 그랄라믄(그러려면) 전시회도 해야 하고. 날 좀 도와주겠나?"라고 말했고 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와 인연이 시작됐다.

◇300만 원 = 진주 출신인 박생광은 1920년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그림을 시작했다. 귀국 후 진주 대안동에서 '청동다방'을 열었는데 파성 설창수, 고운 홍영표 등 진주 문예인의 모임 장소였다.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진주를 떠나 서울에서 생활을 했다.

박생광 작 ' 무녀.

"300만 원어치의 재료비를 사줬죠. 그 당시 아파트 30여 평을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했고, 그의 작품, 그의 인격에 매료돼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줬죠"라고 김 씨의 부인 신영숙 씨는 설명했다.

박생광을 후원하면서 김이환 씨가 소장하게 된 작품은 총 100여 점. 지난 1991년 사립미술관 1호로 사업 승인을 받고 2001년 '이영미술관'을 개관했다.

"개인 소유라기보다는 사회에 환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박생광 선생을 안 만났으면 그때 그 10년을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보냈을지도 모르죠."

◇오방색 = '이영미술관'은 김이환 관장과 신영숙 씨의 이름에서 딴 것으로 두 사람 다 소장가다.

오방색을 민족의 색으로 재발견한 박생광의 작품에 익숙한 때문일까? 신영숙 씨는 23년 전 <TV미술관>에 소개된 전혁림 화백의 작품을 보고 샘터화랑에 갔다.

"유화로 표현된 오방색에 눈이 갔죠. 작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모으다 보니 전혁림 선생 작품만 200여 점이 됐네요. 물을 줘야 꽃이 피듯이 소장가도 작가에게 꽃을 피우도록 도와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도 작가처럼 생각해 단 한 번도 판 적이 없습니다."

류범형 씨의 소장품

효석 조영제 선생에게 유화물감을 사다준 인연으로 작품을 모으기 시작한 류범형 씨.

"조영제 선생이 일본 유학을 갔다 와서 진주 대안동에 '옛성다방'을 만들었어요. 그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자주 음식 대접을 했죠. 바바리코트를 멋들어지게 입고 입에는 꼭 파이프를 물고 있었지…. 진주 멋쟁이였어요. 그때는 제가 일본을 자주 오갔는데, 일본에 갈 때 '내 물건(유화물감) 좀 사줘라'고 조 선생이 부탁을 했었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진주성 촉석루 = 효석 조영제는 '고맙다'는 뜻으로 그의 작품 '진주성 촉석루'를 류범형 씨 부인에게 줬다. 조영제가 죽기 1년 전이었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분의 작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습니다. 수소문해 부산도 가고 서울도 가고 일본도 가고. 저만의 그림이 아니라 진주 시민의 그림이라는 생각으로 28년간을 모았습니다."

효석 조영제는 '촉석루 화가'로 불린다. 일본 유학 후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촉석루'를 출품했고 이때부터 약 50년 동안 촉석루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했다. "촉석루를 왜 그리느냐고 한 신문기자가 물었을 때 '내 집과 가적(가까운데)에 있어서'라고 답할 정도로 순박하셨어요."

◇10배 = 효석 조영제의 작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선뜻 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원 가격의 10배를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눈물 나게 고마운 사람도 있었다.

"부산 변호사 사무실에 조영제 화백의 그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알고 보니 그 변호사는 2년 전 초임 판사 발령을 진주로 받게 됐고 그때 한 진주 어른이 촉석루 그림을 선물로 줬다고 하더군요. 언젠가는 조영제 화백의 미술관을 만들고 싶어 그림을 모은다고 하니 뜻이 좋다며 밥까지 사줬습니다."

조영제 작 '촉석루-여름'.

◇72살 = 경남도립미술관에서 8월 15일까지 '효석 조영제 탄생 100주년 전-촉석루의 사계'전이 열린다.

전시 작품은 유화 19점과 한국화 19점, 수채화 4점 등 총 42점으로 4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류범형 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없었으면 이번 전시는 열리지 못했다.

"조영제 선생이 72살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올해 한국 나이로 72살이네요. (웃음) 돈만 있다고 해서 미술작품을 모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있고 좋은 차를 타고 다녀도 미술작품 하나 사지 않는 사람이 많아요. 작품이 모이면 미술관을 짓는 사람도 있듯이 저도 하나의 밑거름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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