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19) 경북 문경 (때다리~유곡 비석거리)

지난 여정을 마친 때다리(당교)에서 동래로(영남대로)와 합쳐진 통영로는 바로 북쪽에서 곧장 문경시에 듭니다. 이곳에서는 대체로 3번 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걷게 되는데, 머지않아 점촌시외버스터미널이 나옵니다. 점촌(店村)은 예전에 이곳에 그릇점이 있었던 데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으니 길가에 조선통신사가 지난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우리를 반깁니다. 이 빗돌은 사단법인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에서 통신사의 일본 왕래 400주년을 기리기 위해 2007년 4월에 세운 것입니다.

예서 서울 숭례문까지 211km가 남았다 했으니 이로써 전체 여정의 3분의2 정도를 소화한 것 같습니다. 지나온 길보다 남은 길이 많지 않음에 힘내어 걷습니다.

◇유곡역 가는 길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 조금 위쪽에는 지금은 모전동(茅田洞)에 속한 옛 양지마을 쉼터가 나옵니다. 이제 제법 잎이 자란 느티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쉼터에서 땀을 식히며 다리품을 쉽니다. 행장을 추슬러 얼마를 더 가니 문경시민운동장이 나오고 그 앞에는 의병대장 도암 신태식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1907년 의병대장으로 활동 중 체포되어 10년간 옥고를 치르고, 의용단 경북도 단장으로 독립군을 후원하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신 신태식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옛 유곡역 앞 길가의 선정비군. /최헌섭

거기서 북쪽으로 점촌교를 지나 공평동 표석골에 듭니다. 표석골은 김유신 장군의 당교 전투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나 당시에 세웠다고 전하는 빗돌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예서부터 유곡에 이르기까지에는 좁고 긴 들이 펼쳐져 있는데 유곡역에 딸린 둔전(屯田 :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하여 군량에 충당한 토지로 후대에는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려는 목적으로도 설치하였다)이 있던 곳이라 전합니다. 이 들을 따라 걸으니 공평동과 유곡동 사이에 장승백이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얼마 전까지 길가에 장승이 있었는데 최근에 도로를 확장하면서 없앴습니다. 장승백이의 위치가 유곡역에서 약 1km 정도에 이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5리마다 길가에 세워 이정(里程)을 제시했던 노표(路標) 장승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승백이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유곡역이 있던 유곡동에 듭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유곡동이라 새긴 표지석이 있고 그 받침돌의 앞에는 유곡의 역사를 새겨두었습니다. 이 표지석을 뒤로하고 마을에 들면 수령 26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고, 그 가까이에는 회화나무 옆에 오래된 샘이 있습니다. 옛 길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예서 물을 마시고 땀을 식히며 쉬었습니다. 이즈음이 주막거리이고 보면, 여기가 유곡도의 찰방역 권역으로 이르는 들머리라 여겨집니다.

◇유곡역(幽谷驛)

유곡역은 한양과 영남을 오가는 길이 거쳐 지나는 곳으로 그야말로 교통의 요충이었습니다. 이런 입지적 특성은 홍귀달(洪貴達 : 1438~1504)이 남긴 유곡역 중수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지도서> 문경현 역원에 이르길 "영남 60여 고을은 지역이 넓고 인구와 특산물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은 모두 유곡(幽谷)의 길로 모여들어야만 서울로 갈 수 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여기를 지나야만 비로소 갈림길에 들어서서 자기들의 갈 곳으로 흩어져 가게 된다. 유곡역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곧 영남의 목구멍(인후咽喉)에 해당한다"고 했으니 비유가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유곡역은 고려시대 22역도(驛道) 525역 가운데 상주도(尙州道)에 딸린 역으로 처음 나타나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개편에 따라 찰방이 주재하면서 유곡도(幽谷道)에 속한 18역을 관장하는 중심역이 되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뒤에는 봉수제를 보완하기 위해 이곳에 유곡발참(幽谷撥站)을 두었으니, 역제가 폐지될 때까지 줄곧 교통의 요충으로 기능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참(발군撥軍이 교대하거나 말을 갈아타는 역참)에 대해 〈증보문헌비고〉 병고 권제18 발참에는 '선조 30년(1597)에 승지 한준겸(韓浚謙)이 청하여 명나라의 예에 따라 파발을 두어 변서(邊書)를 전하게 하였는데, 기발(騎撥)은 25리마다 한 참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한 참을 두었다'고 전합니다.

안동대학교박물관에서 1995년에 조사 간행한 <유곡역>에 따르면, 유곡역 자리는 지금의 유곡동 아골(앗골) 일원으로 헤아려집니다. 아골은 점촌북초등학교(옛 유곡초교)의 남쪽에서 남서쪽으로 발달한 골짜기인데, 이곳에 유곡역과 그에 딸린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헤아림은 관아(官衙)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지는 아골이라는 지명과 이 일대에 기와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는 점, 주민의 증언 등으로 뒷받침됩니다.

그 자리는 지금의 국도 3호선의 남쪽 골짜기 일원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487번지가 관아, 535-5번지가 천교정(遷喬亭) 자리로 추정되는 정자가 있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자의 이름인 천교는 달리 천앵(遷鶯)이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꾀꼬리가 골짜기에서 나와 큰 나무로 옮긴다는 뜻으로 낮은 지위에서 높은 지위로 오르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조선통신사 이동경로.

최근 지자체마다 지역의 고유한 역사문화자원을 발굴하여 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문경에서는 일찍이 문경새재와 토끼비리 등 옛길의 자원화를 이끌어내어 우리나라 처음으로 옛길박물관을 열었고, 최근에는 이곳 유곡역을 복원하기 위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뎠습니다.

2007년 문경시에서 발간한 <2007~2016 신(新) 문경개발 그랜드 디자인>에는 조선시대 유곡역 복원이 포함되어 있어 머잖아 그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됩니다.

일본 정치·문화 큰 영향 끼쳤던 '통신사'

◇통신사(通信使)

통신사는 조선 시대에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을 말하며,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조일 간의 교린은 1404년에 일본에서 보낸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에 대한 답례로 회례사(會禮使)를 보내면서 시작하였습니다. 통신사란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태종 13년(1413)에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도중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통신사의 파견이 이루어진 것은 세종 11년(1429) 교토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이 이끈 사절단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왜구 금지 요청이 주된 내용이었으며, 이후에는 포로들을 데려오거나, 일본의 정세를 살피고, 막부 장군의 임명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단은 정사· 부사·서장관 3인의 중앙 관리와 갖가지 재능을 지닌 300~500명의 인원으로 편성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는 공식 업무 외에도 학문과 기술,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일본은 통신사를 성대하게 대접하였습니다.

그것은 통신사가 끼친 정치·문화적인 영향이 컸기 때문이며, 이런 배경에 따라 일본은 일찍부터 그들의 관점에서 통신사를 연구해 왔고, 이 분야의 연구를 주도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일반인이나 학자들의 관심이 일본보다 뒤늦게 일어 일본적 관점에서 본 조선통신사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정식 명칭인 일본통신사를 망각하고 그들의 용어를 원용하고 있는 실정이라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는 용어는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 조선에서 온 통신사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며, <조선왕조실록> 등에 실리기로는 일본으로 보낸 통신사라는 의미로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라 했습니다.

대신 일본에서 온 사신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일본국사자(日本國使者), 일본국사신(日本國使臣) 또는 왜사(倭使)라 했습니다. 이로써 보자면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통신사를 일본통신사라 불렀는데, 그것이 일본식 관점인 조선통신사로 굳어 있어 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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