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춘옥 창원시 반월중앙 새마을금고 이사장

첫인상은 매서웠다. 진한 눈썹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끈하게 그려진 아이라인 때문이다. 깐깐하고 예외를 허락지 않은 칼 같은 성미를 지냈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틀렸다. 무표정 뒤에 숨겨진 그의 환한 미소는 인상에 대한 평가가 성급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나눔과 베풂’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고, 우리 씨앗을 지키고자 매일 두건을 두른 채 손에 흙을 묻히는 그, 온화한 미소로 때로는 눈물로 인터뷰에 응해준 이춘옥(69) 씨. 얼마 전 창원시 반월중앙 새마을금고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이춘옥 이사장에게 붙는 직책은 너무 많다. △마산 현모회 회장(교육청) △마산시 여성단체 협의회 회장 △마산시 자원봉사대 연합회 회장 △국제로타리 3720지구 수정로타리 회장 △원자력의학 진흥협의회 경남 회장 △경남도민일보 이사 △한국전력 경남지사 이사 △3·15기념사회 이사 △한나라당 경상남도 여성위원장 △한나라당 전국여성의원 △경상남도 도지사 선거대책 본부장 △제6대 경상남도 도의원(예산결산위원장) 등 반월중앙 새마을금고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하고자 제출한 이력서에는 그가 밟아 온 흔적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춘옥 이사장./김구연 기자

이춘옥 이사장은 “나는 우리 종자를 지키는 사람이다”며 자신의 본연의 업무를 소개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 어시장에서 종묘사를 한지 어언 40여 년. 19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 곳에서 꾸려나가고 있다.

‘흥농종묘사’라는 간판의 역사는 더 길다. 1964년, 통영에서 살던 가족은 마산시로 이사를 왔다. 그때 그의 부친은 추산동에서 종묘사를 열었다.

“종묘는 청과시장과 함께 다니지. 그때 추산동에는 아주 큰 과일가게가 많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선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가게도 따라갔지. 그곳이 바로 이곳이야. 아버지 가게를 내가 이어가는 셈이야.”

1944년 통영시, 그 당시로 치면 충무시 북신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유영초-통영여중-통영여고를 졸업했다.

“충무는 일본 문물이 다른 곳보다 빨리 들어온 지역이다. 그래서 문화수준이 높았다고 생각해. 무역하는 사람이 많았어. 아마 대부분 밀수였겠지. 그래서 잘 사는 사람도 아주 많았어.”

1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는 그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바로 밑 동생이 남동생임 점을 고려하면 흔치 않은 일이다.

“우리 엄마가 너무 고마워. 가난한 살림에 나를 고등학교까지 보내줬지. 너무 고마운 일이야.”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상과 부딪히며 당당하게 살라고 가르친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이 밀려와 그는 인터뷰를 잠시 멈췄다. 어느새 눈물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춘옥 이사장./김구연 기자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모두 어머니 은혜다.”

그는 충무에서의 학창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딸기밭도 있고 바닷가도 있었어. 고3 때인가 여름날 친구와 바닷가를 거닐었는데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도 않고 유유히 걸어다녔어. 그때는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지. 옷이 비에 젖어 속옷까지 비치는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친구와 소리를 지르며 놀았지. 친구 집 옥수수 따다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생생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은 모두 마산으로 이사를 왔다. 가계가 기울었고, 어머니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며 가족을 이끌고 마산 추산동에서 종묘사를 열었다. 농업은 삶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장사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 역시 부모를 도와 가게를 일구어 나갔다.

추산동에서 로맨스도 피어났다. 오가며 인사하던 청년과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마산시청 공무원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3년간 연애를 했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이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편은 당시 오동동 동광교회 목사였던 이금도 목사를 열렬히 존경했고, 이금도 목사는 나에게 결혼을 하려면 40일 동안 새벽기도를 해라고 어명을 내렸어.”

그들의 뜨거운 사랑에 새벽기도가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이춘옥 이사장은 24살에 결혼을 했다.

“공무원 월급이 얼마나 적던지 도저히 가정을 꾸리기 어렵더라고. 그래서 종묘사를 같이하기 시작했지.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지금은 손자가 6명이야.”

‘야전형 여성정치인’으로 의원활동 주목받기도

종묘일만 하던 그에게 사회진출은 순전히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이 완월초등학교 5년일 때 우연하게 그는 어머니회장을 맡았다. 딸이 창원여중에 다닐 때는 창원여중 어머니회장을 맡고, 또 아들이 커 경산고에 다닐 때는 경산고 어머니회장을 했다. 학부모와 친해지면서 이웃과 가까워졌고, 이는 여성단체 협의회장에 선임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그가 정치활동까지 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줬다.

“나는 여당에 들어갔지만, 야권을 아우르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당시 야권 여성들이 아주 진취적이었는데 그 정신이 매우 좋았다. 보수 여성은 몸이 조금 얌전하지 않나. 그래서 야권여성 정치인과 ‘범여성정치연대’라는 것을 만들어 여성 정치인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춘옥 이사장./김구연 기자

제6대 경남도의회 51명 중 홍일점으로 도정의 예산을 심의했던 이춘옥 이사장은 그 당시 ‘야전형 여성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정치생활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선거운동할 때 편견이 너무 심했어. 아침 일찍 인사하러 가면 아침부터 여자가 오느냐 마수도 하지 않았다며 나를 멸시했고, 침까지 뱉는 사람도 있었지. 그런데 오기가 더 생기더라고. 여성으로서 꼭 입문해 여성을 대변하고 싶었지. 여자들이 탄식과 불평만 하는 게 아니라 남자와 동조해 큰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어머니회장 일을 하면서 이 생각을 계속 해왔던 것 같아. 리더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지도자가 되고 싶었어.”

그의 정치생활은 지난 2000년 〈시사뉴스〉라는 잡지에 인터뷰한 내용을 참고하면 이렇다.

- 이춘옥 의원은 맡고 있는 직책만큼 활동 역시도 일일이 추적이 불가능할 정도다. 이 의원을 지켜보는 주위에서 그녀를 보고 ‘직종과 관계없이 이 사회에 필요한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개척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서는 최고를 향하여 도전하는 여성, 남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진 직책을 깨뜨리고 앞장서가는 입지적인 지도자’라고 칭찬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요즘 이 의원의 활동은 남성 못지않게 왕성함과 활력을 느끼게 한다. -

의원 시절 그는 교육사회의 상임활동에서 장애인복지시설 확충 등에 관해 날카로운 질의를 던졌고, 서민과 여성에게 희망 주는 정치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던 적극성, 진취성이 그래도 이어지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3대째 ‘우리 씨앗’ 지키고 있어

당시 인터뷰에는 자녀교육에 대한 철학도 나와 있다.

이춘옥 이사장./김구연 기자

- 자녀들에게 ‘망치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으셨다는데, 자녀의 인생교육과 정신교육은 어떻게 시키시는지요.

“아이들에게 100점짜리 인간을 목표로 한 교육보다는 90점짜리 여분과 여유로움으로 애쓰고 있으며 나머지 20은 인격과 너그러움으로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익보다 보이지 않는 신뢰를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과 함께 당장 불이익이 오더라도 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이춘옥 이사장의 교육철학은 곧 자신의 인생 철학이다. 그는 “내 삶은 은혜를 갚고자 사는 삶이다”고 말한다. 이제껏 살 수 있는 것은 이웃 때문이요, 지역민 때문이라. 이에 새마을금고에서 봉사하겠노라고, 건강이 허락되면 복지를 위해 물질적인 것까지 내어주는 사회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씨앗을 지키는 일이다”고 강조했다.

그의 아들은 미국 뉴저지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어시장 종묘사에서 가업을 잇고 있다. 3대째 이어오는 것이다. 그는 “아들이 영상을 전공했거든. 서울 가서 살고 싶다고 해도 안돼. 우리 씨앗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게 봉사지. 내가 다짐하면 돼. 은혜를 갚고자 사는 인생이라고. 새마을금고 일도 잘 해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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