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오동동 이야기] 마산 시네마천국, 강남극장의 추억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 1960년 이후까지 극장에서는 영화상영과 함께 악극단 공연, 여성국극단 공연 등이 성황을 이루었다. 강남극장은 당시로선 대형 무대였다. 극장에서 이런 식의 공연이 없어진 후에 무대를 3분의 1 정도로 축소해 영화전용관이 되었다.

옛날 강남극장에서 펼쳐진 공연물들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전옥의 백조가극단’, ‘임춘앵의 여성국악단’, ‘후라이보이 곽규석 쇼’, ‘액션스타 박노식 쇼’ 등 당시 빅스타들이 수시로 마산을 찾았고, 강남극장은 항상 만원이었다. 전옥은 지금도 국내 최고 스타로 대우받는 최민수의 외할머니다.

1927년 <낙원을 찾는 무리들>이란 영화로 데뷔한 전옥(본명 전덕례)은 해방 후 백조가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했는데, 여기서 ‘눈물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신파 연극을 주로 했는데, 대표작으로는 〈항구의 일야〉, 〈유랑자의 복수〉 등이 있다. 나는 〈항구의 일야〉는 고향인 통영 봉래극장에서, 〈유랑자의 복수〉는 강남극장에서 봤다. 당시 상대역은 유명한 배우 최봉이었다.

   
 

1부 신파악극이 끝나면 2부는 버라이어티쇼였다. 코미디언 명진, 복원규가 좌중을 웃겼다. 김희갑은 기타연주, 구봉서는 아코디언 연주로 30분이나 출연했다. 나머지 시간은 문화 영화를 상영해서 때우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신나게 손뼉을 쳤다.

후라이 보이 곽규석은 총소리 흉내(요즘으로 치면 성대모사)가 대단했다. 액션스타 박노식은 신나는 팝송 ‘사이드 바이 사이드(side by side)’를 열창했고, 정치풍자도 단골메뉴였다. 자유당 시절 정부구성이 12부처였는데 외무부장관은 양훈, 다른 장관은 양석천, 구봉서는 농림부 장관을 맡았다. 배삼용은 그때 부흥부(復興部) 장관을 맡았는데, 이를 부흥부라 부르지 않고 ‘복흥부’라 불러 신나게 웃겼다.

여성으로 구성된 임춘앵 국악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2시간 전에 강남극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나는 ‘낙화유수’, ‘바우와 진주 목걸이’, ‘신라 야사’로 이름 지은 ‘백호와 여장부’를 어머니와 같이 보았다. 휘황찬란한 무대와 임춘앵의 남장연기는 관객을 압도했고,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는 장내를 진동시켰다. 이 국악단을 위해 극장 옥상에 10개의 방을 만들어 경비절약을 도운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이제 모두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렇게 시대를 풍미한 강남극장은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1947년 개관 때는 부림극장이었고, 1951년경에는 국제극장으로 바뀌었다가 1956년경이 되어서야 강남극장으로 세 번 이름을 바꿨다.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재미있는 것은 강남극장 간판에 대한 사연이다. 1950년대부터 강남극장의 간판은 우리 화단(畵壇)의 거목이었던 교당 김대환 선생이 그렸다. 기억하는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부 활극을 표현한 간판에서는 모래가 튀는 그림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흡사 사막을 거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1980년대에 극장간판을 그린 이는 김동권으로 그의 결혼에 필자가 주례를 섰고, 세월이 지난 후 그의 아들 결혼도 주례를 맡았다. 2대를 내리 주례한 기이한 인연을 가진 인물이다.

강남극장 간판은 세 쪽으로 분할되어 짝을 맞추는 형식으로 경남도 내에서도 제일 큰 규모의 간판이었다. 프로가 바뀌는 날 마지막 상영이 시작되면 간판교체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5명 정도가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고 마무리되면 모두 모여 아귀찜 안주에 소주 회식으로 피로를 풀었다.

그러나 2000년 배두나 주연의 <플란다스의 개>를 끝으로 간판 시대는 막을 내렸고, 포스터를 복사하는 실사시대가 왔다. 그리고 몇 년 전 강남극장 간판을 그렸던 이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강남극장은 1970년대 후반에는 시국강연 장소로서도 각광을 받았다. 대통령까지 지낸 김대중 의원이 한창 젊은 시절, 강남극장에서 시국강연을 하신 적이 있다. 장내는 당연히 대만원이었고, 대형스피커를 옥외에 설치하여 수많은 관중이 극장 주위에 몰려들었다. 김 의원은 특유의 웅변술을 유감없이 발휘해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2000년에는 기존의 1, 2층을 분리하여 1관과 2관으로 만들었다. 특히 1층 중앙에 버티고 있어 관객에게 불편을 주었던 기둥이 그때 철거됐다. 공사가 끝나고 재개관 개봉작은 <비천무>였다. 그러나 1999년 합성동에 3개관으로 개관한 마산 최초의 멀티플렉스 상영관 ‘마산시네마’가 등장하면서 기존 극장들은 경영악화가 심화되었고, 서서히 폐관되기 시작했다. 더 버티는 것은 무모했다.

강남극장이라고 다를 수 없었다. 2004년 8월에 상영된 양동근 주연의 <바람의 파이터>가 마지막이었다. 이 영화를 끝으로 근 60년간 마산 시민을 울리고 웃긴 시네마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2008년에는 건물마저 철거되어 강남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강남극장은 흐르는 세월 속에 추억으로만 남았다.

/이승기 마산영화자료관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