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말고도 살고 있네요] 관상용으로 적합해 훼손 많아

온 산 천지가 초록입니다. 꽃 진 자리 세상 가득 푸른 열매들이 뿜어내는 생의 비린내로 더욱 싱그러운 오월입니다. 시인 김영랑이 '모란이 지고나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라고 절절이 읊던 모란꽃 꽃송이들이 농염한 향기와 붉은 입술로 부푼 화분 가루 날리며 봄이 지고 있습니다. 지난봄은 참 화려했습니다. 황사가 사월을 덮지도 않았고 적절한 비와 화창했던 날씨는 세상 골고루 돌 틈에 뿌리내린 작은 꽃들에게도 아낌없는 빛을 주었습니다. 말 그대로 생명의 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집에 있지 못하고 천지 사방으로 꽃 잔치를 찾아 다녔는데요. 3월 산수유 마을을 시작해서 매화마을·벚꽃 길·진달래 숲을 누비며 행복한 봄을 보냈습니다. 세상의 꽃들은 여전히 곳곳에서 피어나고 나의 발걸음은 꽃들이 차려내는 생명의 산실에서 그 경이로움에 젖어 숲의 마음, 나무의 마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봄소식을 알리는 히어리꽃. /남부산림연구소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저의 봄꽃 여행은 지리산 자락을 누비며 시작하는데요. 특히 산기슭 좁은 오솔길을 잘 헤집고 다닙니다. 차를 타고 달리다가도 먼 발치에서 피어 있는 꽃들 보면 이내 달려가 한참을 마주하며 교감하기를 즐깁니다. 지난해 보아 두었던 히어리 숲을 올해도 찾아갔습니다. 그 때 2급 보호종인 히어리꽃 숲을 발견하고 말할 수 없이 행복했었는데 그 순간 가장 먼저 우려되는 것이 비교적 넓은 도로변인 이 꽃 숲이 무사히 보존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는 나무의 숫자가 3분의1 정도로 줄어 있었습니다. 히어리는 관상용으로 적합하기 때문에 욕심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 많이 훼손당합니다. 화가 나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몇 무더기 무리지어 피어 있는 꽃들이 반가워 한참을 감상했습니다. 우리 산야에 들꽃 여행을 다니며 해마다 겪는 아픔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난해 군락을 이뤘던 꽃들이 다음해에 가면 완전히 사라졌거나 몇 포기 남아 있지 않아서 느꼈던 속상함 때문에 나는 더욱더 그 꽃들의 안부를 찾아다니는지도 모릅니다.

조록나뭇과의 떨기나무인 히어리는 지리산 지역에서 사는 한국 특산종으로 '송광납판화'라고도 부르는데요. 송광사 주변에 피며 두꺼운 꽃잎을 두고 벌집의 밀랍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황갈색의 작은 고깔 모양의 꽃이 모여 달려 밑으로 늘어진 모습이 귀걸이 같다 하여 귀거리, 히어리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꽃송이 달린 모양이 달랑달랑 단발머리 아래 달랑거리는 예쁜 귀걸이를 정말 닮았습니다.

이른 봄 산속에 나물 캐는 소녀 같은 이 아름다운 히어리꽃이 멸종의 위기 없이 온산 가득 피어서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도록 잘 보존하는 것이 꽃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덕선(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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