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하동군 북천 이병주문학관 유홍준 시인

유홍준 시인은 ‘밥내가 나는 시인’이다. 부산의 최영철 시인이 리얼리즘적이면서 모던하다고 한 그의 시에는, ‘밥벌이의 이력’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유홍준 시인의 시를 읽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시를 말했다. 이제는 시인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를 통해서 시인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인을 읽고 나서, 시인의 시를 입 안에 꼭꼭 씹어보는 재미다.

밥벌이의 고단함은 시가 되고

일요일 오전 8시 30분 진주시 가좌주공아파트. 벌써 유홍준 시인은 아파트 마당에 내려와 자신의 검은 색 코란도 문을 열고 있었다. 시인의 출근 시간이다. 그의 출근지는 하동군 북천면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이다. 시인의 집에서 30분 정도를 달려야 한다.

“어젯밤에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산청에서 아침에 내려왔어요.”

동행하는 차에서 시인이 던지는 첫 마디였다.

일요일 아침 도로는 비교적 한산하다. 시인은 급히 서두를 것도 없다는 듯 여유롭다.

유홍준 시인./권영란 기자

“요즘 악기를 배우고 싶어 색스폰을 하는데, 악기 살 돈은 없고 강습만 받고 있어요. 다행히 강습소에서 악기를 빌려주네요. 근데 클라리넷을 가지고 먼저 하는데, 클라리넷은 갑갑해요. 색스폰을 불면 뭔가 툭 터지는 듯한데, 이건 소리도 그렇고 깔작대는 느낌이라. 우리는 마구 터뜨려야 하는데…”

쉰이 넘은 시인은 아직도 뭔가를 터뜨리고 싶은가보다. 속엣 것들을 토하고 끌어올려야 할 것이 많은가보다.

기찻길 옆으로 난 국도 2차선을 따라 하동 북천면으로 접어들 무렵, 앞에서 기차가 달려오고 있다.

“늘 이 시간에 만나요. 오늘은 조금 늦게 만난 거지. 토요일이면 색스폰 연습하는 사람들이 문학관에 와서 연습을 하는데, 어제 내가 없어 문학관 열쇠를 문학관 입구 돼지 치는 주인에게 맡기라고 했어요. 그걸 받아가야 해요.”

그는 문학관 어귀에서 중로의 사내를 만나 열쇠를 건네받았다.

유홍준 시인./권영란 기자

해머 같은 팔뚝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이명산 쪽으로 방향을 튼 시인의 차는 3~4분을 더 달려, 이명마을 골짜기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에 닿았다.

문학관은 고요했다. 이명산, 봉명산, 계명산으로 둘러싸인 문학관은 인기척이 없다. 어디선가 고라니가 찾아오고, 꿩들이 자리를 틀고 있을 듯했다. 젊은 시인은 이곳에서 대체 어떤 일을 하지?

“겨울엔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어 한산해요. 날이 풀리고 꽃이 피면 사람들 발걸음이 그래도 많아지지요.”

문학관에는 최승수 관장님과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유홍준 시인, 그리고 건물 청소를 하는 젬마아줌마 이 세 사람이 운영하고 있다.

“많이 올 때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지만, 골짜기에 있어 겨울에는 하루종일 한 사람도 안 올 때도 있지요. 특히 지금처럼 날이 축축할 땐 더.”

오전 11시. 책상 앞에 앉아 몇 가지 사무 처리를 끝낸 시인이 하루 중 하는 업무 중 중요한 일은 밥솥에 쌀을 얹히는 것이다.

“내가 밥은 잘 해요. 밥을 사먹을 곳도 마땅찮고, 관장님이랑 매일 이렇게 해먹는 거지요.”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는지?”

“하루 일과라야 뭐, 딱히 정해진 게 없네요. 계절따라 요일따라 그때그때 일이 달라지니... 일이 없으려면 한 없이 없고, 일을 찾다 보면 또 한없이 많고… 문학관 일이 그렇네요.”

유 시인에 대해 최 관장에게 잠시 물어보았다.

“이리 일을 잘 하는 시인은 없을 거요. 우리 유 시인은 못하는 게 없어요. 겨울이라 바깥 일이 적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문학관 주변 시설이며 정원관리부터 손이 안 가는 데가 없어요. 풀이 엄청나게 자라오는데 일일이 뽑을 수가 없어, 그때면 유 시인이 예취기를 딱 들고 덤벼들어요. 문학관 행사를 치르는 것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발문이나 서평을 써달라고 하는데 시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산문도 곧잘 써요. 행사 홍보 문안을 만드는 것도 그렇고…. 우리 건물청소 하는 젬마아줌마가 나보고 “관장님, 우리 문학관에 로또 왔어요, 로또”라고 하데요. 그때부터 ‘유로또’가 된 거지요.”

유로또. 시인이 이병주문학관 사무국장으로 오자마자 얻은 별칭이었다. 문학관 1년 행사는 어린이캠프 등 총 4회. 시인은 사무국장으로 오면서 지역예술인들을 위한 이런저런 미술 전시회와 기획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한복바느질공에서 상차꾼, 제지공, 정신병동 직원으로

유 시인은 10대 때 가출을 네 번 했다. ‘집이 싫었다’고 했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술에 절어 싸우고, 일년 365일 집안 일을 거들어야 했고… 산골 소년은 늘 무언가에 갇혀있는 듯 갑갑하기만 했다고 한다. 뭔가 삶의 희망 같은 게 없었다고 했다.

유홍준 시인./권영란 기자

“고3 2학기에 부산 미미고전의상실 한복바느질공으로 취업해서 마침내 집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어요. 오래 전에 그만 뒀지만 지금도 웬만한 한복바느질은 할 수 있을 걸요.”

그러다가 군대를 입대하고 다시 제대 후에는 서울 가락시장 건조고추 도매업을 하는 삼촌의 일을 거들게 됐다. 하지만 그 일은 매일 아침, 일하는 사람들의 술국을 끓여 같이 막걸리 한 잔 마시는 것으로 시작해 하루종일 전화받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고추대금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 치다꺼리나 하고. 외롭고 무의미한 나날이었다.

혹 쉬는 날은 시장 주변의 청년들과 어울렁더울렁 몰려 다니고.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하고 첫 아이를 갖게 되고, 제대후 1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준비없이 시작된 결혼생활은 고되고 힘들었다.

부산으로 내려가 공장에서 미찌꼬바 일을 했다. 쇠를 깎는 일은 돈이 되지 않았다. 다시 대구에 있는 친구를 찾아 시장 주변에 야채점포를 얻었다. 그러나 밑천없이 시작한 야채가게는 그날그날 물건 댈 돈을 건지기는커녕 보증금만 털어먹었을 뿐이었다. 겨우 리어카 살 돈을 마련해 이 동네 저 동네 마른 고추며 야채를 들고 나섰지만, 야채는 썩고 고추며 싸게 구입한 다른 물품들은 동네 아줌마들의 눈길에 밀려날 뿐이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경북 영양 어딘가에 있다던 건조고추 대금을 받으러 오던 아저씨였다고. 무조건 버스를 타고 찾아갔단다. 고추를 주기만 하면 팔아서 갚겠노라는 막무가내를 써볼 작정이었다.

“그라지 말고, 여기서 내 일 좀 도와주고, 일 없는 여름 겨울이면 산판에서 일을 하게나.”

사정얘기를 들은 아저씨의 제안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족을 모두 데리고 영양으로 갔다. 그리고 죽을똥살똥 일했다.

“산판에서는 상차꾼이라고, 베어놓은 나무를 차에 실어올리는 일이었는데, 이게 지옥보다 더한 일이요. 신병훈련소가 다들 힘들다고 하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나도 어릴 때부터 안 해본 일 없이 컸는데 거기서 일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실미도인가 영화같은…”

산판에서 27살의 가장은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일이 힘들어서, 삶이 서러워서, 세상이 엿같아서… 산 그림자 어둑한 골짜기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엉엉 통곡을 하고 있더란 거다. 짐승처럼 울고 있더란다.

“87년 6월항쟁이니, 독재정권이니, 박종철사건이니 이런 거 몰랐어요. 그때 내겐 오로지 그날그날 살아내야 할 하루치 생활이 있을 뿐이었지요.”

29살 되던 해. 시인은 지금은 없어진, 진주에 있는 제지공장에 취직이 되었다. 다시 가족을 이끌고 진주로 왔다. 그때가 1990년이었다.

“거기서 꼬박 17년을 있었네. 처음으로 고정 수입을 받게 됐지요. 처음엔 종이에 마지막 도피를 하는 제지공이었지만, 나올 때는 반장이었어요. 남들은 그 일이 힘들다고 하지만 나는 참 좋았어요. 햇볕 안 보고 일하니 피부도 하얘지고, 얼굴에 윤기도 생기는 것 같았지요. 세상이 엄청 부드러워지는 것 같더만.”

유홍준 시인./권영란 기자

“우짜다 시인 됐는데 쓰면 쓸수록 좋아….”

제지공장 첫 해, 글을 쓰는 일은 그때 시작되었다. 그 해 유 시인은 공단문학상을 받았다.

“문디 지랄, 돈 때문에 응모했어요. 당시 상금이 30만원인가 그랬는데, 어찌 소설 한 편 쓰면 될 것 같았어요.”

다시 1991년, 그는 개천문학상을 받는다. 진주 글쟁이들과 같이 어울리고 시라는 것을 비로소 배우게 되었다. 그때 만난 분이 그의 오랜 문학적 스승이자 동지인 김언희 시인이었다. 1998년 그는 ‘시와 반시’로 주목 받게 된다.

“내가 시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었지요. 그런데 정말 어쩌다보니 시를 쓰게 됐고, 시인이 됐어요. 시를 쓰는 게 내 삶을 바꿔 놓았지요. 물론 더 젊을 때는 같이 쓰는 사람들 속에서 학력이나 지식 등으로 열등감도 많았고,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몰라요. 이젠 그게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지만. 그땐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었어요.”

담담하게 읊는 시인의 말이 콕, 콕 새발자국처럼 박혀들었다. 힘들었으리라. 아팠으리라.

시인은 2004년 실천문학사로 첫 시집<상가에 모인 구두들>을 내고, 다시 2년 뒤 2집 <나는 웃는다>를 내고, 2010년 3집 <저녁의 슬하>를 펴내었다.

유 시인에게 있어 밥벌이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 <나는 웃는다>가 나올 때쯤 그는 다니던 회사가 부도직전에 이르고 퇴사권고를 받는다.

“17년을 일했는데, 이상하게 제지공장에서의 일은 잘 생각이 나질 않아. 나올 때 팽개치듯, 용도폐기 처분되듯 버림받아서 그런가 봐요.”

다시 밥벌이를 고민해야 했던 시인은 경기도 어느 병원 비정규직으로, 복지관 운전수로, 정신병동 폐쇄병동 직원으로 떠돌아야 했다.

“폐쇄병동에서 내가 한 일은 제 정신 아닌 사람들이 서로 싸울 때 말리고, 난동 부리는 사람들 잡아서 제압하고, 제때 약 먹었는지 확인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거기도 3교대였지요. 제지공장도 3교대였고. 20년 정도를 3교대로 일했는데, 그건 인생의 7년을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는 거지요. 밤에는 일하고 남들이 일하는 낮에는 자다가, 것도 아니면 빌빌거리며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그러고 보면 지금도 그는 사람들이 쉬는 일요일엔 일하고, 사람들이 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이면 슬리퍼를 끌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괜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유홍준 시인의 시집./권영란 기자

유홍준 시인은 이병주문학관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매주 이틀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창작수업을 하고 있다.

유 시인에게 시 쓰는 게 좋냐고 물었다.

“쓰면 쓸수록 좋아요. 지금은 무조건 좋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는데 말이요. 이젠 평생 같이 사는 거지, 뭐.”

이병주문학관을 나올 무렵 이명산 산그늘이 겨울 햇볕을 덮고 있었다. 겨울 문학관에는 하루 종일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인의 문우 두엇 찾아와, 위로하듯 이야기하며 웃으며 갔고, 가끔 골짜기 꿩들이 깃을 치며 날아가는 소리만이 겨울 지나는 문학관을 찾아왔다.

“세상의 어휘 중에서 어떤 말이 좋아요?”

“내 시에는 ‘자꾸’라는 말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자꾸? 어떤 행위든 말이든 무의식으로 반복될 때 쓰는 말, 자꾸? 그리 말해놓고 시인은 ‘자꾸’ 웃는다. ‘자꾸’ 웃었다. 자꾸 웃는 시인을 보며, 나는 자꾸 그의 시 ‘상가에 모인 구두들’이 떠올랐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 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2004

유홍준 시인은
1998년 ‘시와 반시’ 신인상에 ‘지평선을 밀다’ 등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시집으로 상가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나는 웃는다(창작과 비평), 저녁의 슬하(창작과 비평)가 있다. 2005년에 젊은 시인상을, 2007년에 시작문학상과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