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통영종합사회복지관장 김종봉 신부

내 주머니 속 수 백만 원, 수 천만 원을 나누자고 하면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적다. 하지만 볼펜 한 개, 연필 한 개 나누어 쓰자고 하면 도리질 할 사람이 별로 없다. ‘나에게 펜을(Give me a pen) 캠페인’은 남수단의 어린이들을 환하게 웃게 했다. 무엇보다 ‘나에게 펜을(Give me a pen) 캠페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누구나 자신도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향기로운 사람’이라는 위안을 안겨줬다. 그래서 더욱 값지다.

“톤즈 아이들에게 갖고 간 ‘펜’을 전해주었습니다. 학용품은 컨테이너로 케냐 뭄바사를 통해 남수단 톤즈 아이들에게 전해질 겁니다. 2개월이 걸리고 우기가 끝나는 가을에 보낼 겁니다.”

   
 

“로타리클럽 3590지구에서 한센인들의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만든 진료소에 슬로바키아에서 봉사온 여의사와 케냐에서 온 수녀님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말라리아와 결핵 환자들이 많았고, 갓난 애기들도 치료받으러 왔습니다.”

남수단 톤즈로 간 김종봉 신부는 3월 12일, 트위터에 그곳 현지 사정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매일 아침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오늘의 말씀’으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가 한국에서 출발한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소식을 전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현지 여건이 그만큼 열악했다는 뜻이다.

3월 14일 , 현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떠났던 김 신부와 일행은 남수단으로부터 돌아왔다. 8일 만의 빡빡한 여정이었다. 로타리 3590지구, 의대교수, 건축설계사, 수출입은행, 보건의료재단,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KBS, 등 여러 사람들과 기관단체에서 그와 동행했다. 그리고 그곳 현지에 의과대학, 병원, 보건소 등을 지원하기로 협약했다고 한다.

   
 

“수단은 기후, 교통사정이 아주 안 좋아요. 무엇보다 내전으로 인해 위험부담이 큰 곳이지요. 간다고 할 때 걱정하는 분들도 많았지요. 하지만 그곳 사정을 눈으로 직접 보고 알아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수단은 그동안 오랜 내전과 질병으로 소용돌이 쳤던 ‘상처의 땅’이고 ‘가난의 땅’이다. 남수단은 지난 해 7월에 수단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여전히 정부군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곳이다.

트위터…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되다

“지난해 11월 통영 시민들과 함께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를 봤어요. 2010년 선종한 고 이태석 신부의 생애를 그린 영상인데,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는지, 그 일대기를 담은 영상이죠. 보는 내내 다들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먹먹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때마침 스크린에서 수단 아이들이 나뭇가지나 손가락으로 흙바닥에 글을 쓰는 장면이 나왔어요. 그때 그 아이들의 입에서 “기브 미 어 펜(Give me a pen)”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어요.”

김종봉 신부./허동정 기자

김종봉(45) 신부는 ‘기브 미 어 펜(Give me a pen) 캠페인’은 그때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울지마 톤즈’ 상영 후 로터리클럽 3590지구에서 남수단 톤즈에 병원을 지어주기로 하자, 그 다음은 김 신부가 관장으로 있는 통영종합사회복지관 직원들이 나섰다. 40여 명의 직원들은 당장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이지를 두고 의견을 모았고, 그 후 모두 마음을 다해 달려들었다 했다. 사실 우리 주변 사방에 널려진 펜이 수단 아이들에겐 너무도 절실한 물건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통영에서만 알음알음으로 알려나가다가, 김 신부가 트위터에 올린 글을 많은 사람들이 리트윗하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나에게 펜을(Give me a pen) 캠페인’은 이렇게 우연히 한 젊은 신부의 트위터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고 아름다운지 몰라요. ‘펜만 되나요? 공책은요?’ ‘옷도 있는데, 같이 보내면 안되나요?’ 등 쏟아지는 물음에 하루에도 수십 통, 수백 통의 답장을 해야 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되는’ 법을 많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지난 해 12월과 올해 1월, 김 신부의 업무는 대부분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여진 펜은 복지관 직원들이 일일이 분류하고 다시 포장해, A4용지상자로 800개가 되었다. 어떤 기부자는 택배 상자에 복지관 직원들이 애쓴다고 초콜릿을, 어떤 기부자는 필요하면 더 보태라고 현금을 같이 보내오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수단 톤즈까지 운송비였어요. 2000만원이 든다는 거였어요. 이걸 어쩌나 싶었는데, 마산 한마음병원 하충식 원장님이 1000만원을 주고, 두어 군데서 돈을 보내줬어요.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해결도 같이 왔어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봐요.”

김 신부에게서는 젊은 신부의 활달함과 고요함이 함께 느껴졌다. 그는 모든 게 감사하고, 모든 사람들이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포기하는 순간 하나님이 내게 오셨다”

김종봉 신부./허동정 기자

“어머니는 신부가 된다고 했을 때 참 많이 울었어요. 친지들, 심지어는 동네 사람들까지 집으로 찾아와 안 된다며 저를 말렸어요. 집안 모두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거죠. 물론 지금은 잘 했다고, 앞으로 잘 하라고 말씀하시죠.”

김 신부는 창원이 고향이다. 삼남매 중 막내. 김 신부는 10대 때 ‘놀만큼 놀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도 10대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축구를 했는데, 아주 좋아했어요. 근데 중학교를 가니 그만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반항심도 생기고, 즐거운 일이 없었어요. 공부도 별로 안 했어요.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고등학교 때는 격투기 배우고, 조폭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지요. 그 시절 그래도 나를 지켜준 것 신앙이었던 것 같아요. 자칫하면 조폭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주위에 반항심 많은 아이들을 보면 괜히 애틋해져요.”

고3. 김 신부는 수능을 앞두고 공부했고 대학에 들어갔다. 농과대학 축산학과였다. 하지만 대학은 자신의 생각과 달라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카톨릭학생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국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다행히 대학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다닌 이유의 전부였다.

“그때 김영식 신부님을 만났어요. 장재성당에 계셨는데, 신부님은 지역사회에서 재야단체 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신부님의 삶과 생각과 모든 것에 경도됐던 것 같아요. 예수님의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 눈에는 김영식 신부님은 자신의 삶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짓고 계셨어요. 거의 2년 반 정도는 김영식 신부님 곁에 붙어있다시피 했어요. 그리고는 ‘나도 신부가 되어 저리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김종봉 신부는 다시 공부를 해서 부산에 있는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신학대학은 김 신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어느 곳보다 규율과 체계가 엄격한 곳이었다. 공부도 어느 곳보다 할 게 많았고, 힘들었다. 언어만 해도 히브리어를 비롯해 5개를 익혀야 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덤벼들었다.

“근데 4학년이 되었을 때였어요. 그때, 그만 두어야하나,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이제 곧 신부가 될 사람인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나요?”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때 내겐 ‘하나님 체험’이란 게 없었어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체험’을 내가 해보지 않고, 어떻게 타인에게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도저히 거짓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어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기다리고 불러도 오시질 않았어요. ‘나는 신부가 될 수 없겠구나’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일주일 간 기도방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오셨어요.”

김 신부는 그 일주일간의 기도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만났다 했다.

“그 느낌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내게, 지금 나의 옆에 오셨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뭐라 말할 수 없는데, 그건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눈물은 그치지 않고, 마음 깊은 바닥으로부터 평화와 고요가 찾아왔어요. 그렇게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거죠.”

김 신부는 그후 옥봉성당 보좌신부로 있다가 진주자활센터장이 되면서 지역사회의 복지활동에 나서게 됐다. 복지활동은 지역 내 단체와 사람들을 만나고, 엮고, 새로운 일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을 만났고,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일을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예수님을 좇아 사는 일’이었다.

'나눔'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

김종봉 신부./허동정 기자

지난 해 1월 김종봉 신부는 마산교구의 발령으로 진주에서 통영으로 왔다. 그의 공식 직책은 통영종합사회복지관 관장이다. 지난 1년은 낯선 통영의 지리를 익히고 사람을 만나가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다. 몇 년 간 그의 행적을 눈여겨 본 사람들은 안다. 진주에 있을 당시에도 김 신부의 활동이 만만치 않았음을.

그는 진주에 있는 8년 중, 나중 5년은 진주자활센터장으로서 지역 내 복지활동을 펼쳐왔다. 김 신부는 진주에서 ‘아름다운 가게’를 만들었고, 다시 ‘고마운 가게’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들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파장을 가져왔고, 진주지역 사람들에게 ‘기부와 나눔의 문화’를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진주에서 ‘아름다운 가게’를 연 것도 사소한 생각에서 비롯됐어요. 2006년 초였나. 자활센터 직원들이 박봉으로 일하는데, 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하루는 “제일 힘든 게 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 생활용품비, 사교육비...”등을 이야기했어요.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재활용품을 서로 나누어 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아름다운재단에서 하는 ‘아름다운 가게’를 진주에서도 여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추진한 거였어요.”

그는 통영으로 옮겨오자마자 또 ‘아름다운 가게’를 추진했고 열었다. 통영 사람들의 열기는 대단했다고.

“사람들은 누구나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타인을 위해 주변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은데, 돈이라면 좀 많이, 물건이라면 좀 더 비싼 걸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일은 그 물꼬를 바로잡고 틔어주는 거죠. 작은 걸 나눌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거요.”

그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어떤 갈증이 있는지, 그 사람의 재능을 어디에 쓸 수 있는지를 금방 아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 기꺼이, 즐겁게 일을 했다. 스스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통영종합사회복지관 입구와 관장실에 있는 글귀이다. 복된 행동은 복을 짓는 일이라 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아마 남수단만이 아니라 좀 더 가까운 아시아 가난한 나라들과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번 ‘나에게 펜을(Give me a pen) 캠페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줬어요. 나눔을 실천하는 데는, 그리 문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줬지요.”

봄밤에 매화 꽃망울은 다투어 피고,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김종봉 신부가 틔어놓은 작은 물꼬를 따라 맑은 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시 바다 끝,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남해안 통영 앞바다로 ‘사람의 봄’, ‘사람의 향기’가 밀려오고 있었다.

김종봉 신부./허동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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