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18) 경북 상주시 솔티~유곡역

솔티를 넘어 좁고 긴 골짜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새 여정을 엽니다. 마침 봄비가 제법 장하게 내려 농부들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손님이었을 성 싶습니다. 남녘보다 약간 늦게 봄을 맞은 솔티에는 이제야 갖가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고개 아래의 복사꽃과 길섶의 참꽃, 제비꽃을 비롯해 길바닥에는 질경이가 한창 땅바닥에 잎을 붙이며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산골을 벗어나면서 시선을 멀리 주면 이안천(利安川) 건너 그 북쪽에는 사발을 엎은 듯한 태봉산(胎封山 : 105.5m)이 있습니다.

태봉산은 들판에 고립 구릉으로 솟아 있어 낮지만 쉽게 눈에 듭니다. <해동지도>에 고산(孤山)이라 적어 들판 한 가운데 홀로 솟은 구릉임을 분명히 하였고, <함창현여지도>(규10512 v.6-9)에는 태봉산이라 적었습니다. 이 지도에는 구릉 꼭대기에 시설물을 표시하고 만력 32년(1604·선조 37)에 태실(胎室)을 두었다고 병기하였습니다. 아마 이 사실이 지역에서 '조선 광해군(光海君) 원년(1608)에 왕자의 태를 봉안하였다'는 말로 와전된 듯합니다.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어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태실> 등 관련 자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옛 지도를 살펴보면, 태봉산을 가운데에 두고 난 길이 시기적으로 달리 나타나는데, 먼저 만들어진 <해동지도>에는 서쪽으로 통영로가 열리고 그 동쪽으로 동래로가 지납니다. 달리 19세기 말엽에 만든 <함창현여지도>에는 태봉의 동쪽을 지난 길이 그 북쪽에서 분기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길 닿는 곳에 솟은 태봉산. /최헌섭

태봉산은 들판 가운데 솟아 있어 랜드마크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옛 지지에서 도로를 설명하는 부분에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지도서> 함창현 도로에 '동남쪽으로 태봉리까지 10리이며, 태봉리에서 상주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7리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통영로는 태봉산을 지나 척동리 잣골과 오동리 목교(木橋)를 거쳐 함창 들머리에서 전고령가야왕릉에 듭니다. 옛 지도를 보면, 이곳 왕릉에서 관남지(官南池)를 지나 옛 장터를 거쳐 함창현 치소로 드는 노정이 표시되어 있습니다만, 지금은 못도 장터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함창 들머리에는 고령가야의 왕릉과 왕비릉이라 전해지는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여지도서>에 '가야왕묘(伽倻王墓)는 관아의 남쪽 2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함창현의 김씨가 그 후예라고 한다. 비석을 세워 수호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했습니다. 또한 만세각(萬歲閣) 옆의 안내판에는, "서기 42년경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 중 이 일대인 함창·문경·가은 지방을 영역으로 하여 나라를 세운 고령가야의 태조왕릉이라 전해온다. 태조왕의 능을 서릉이라 하고, 여기에서 동쪽으로 한 지척 간에 왕비릉인 동릉이 있다. 함창은 원래 고령가야(古寧伽倻)국이었으나, 신라에 복속되면서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하였다가 경덕왕 때는 고령(古寧)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선조 25년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수(金수)와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 등이 무덤 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하여 고령가야왕릉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 후 숙종 38년(1712) 왕명으로 묘비와 석양(石羊) 등의 석물을 마련한 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묘역이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만세각은 왕과 왕비릉을 관리 보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건물입니다.

조선시대의 함창은 읍성을 갖추지 않은 채 관아와 객사 등으로 고을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고지도에 나타난 옛 읍기는 동헌과 객사를 중심으로 그 아래쪽에 동지(東池)와 서지(西池)를 거느리고 있으며, 옛길은 동지를 거쳐 쌍화(雙花 : 지금의 쌍하), 윤직리를 지나 유곡역을 지향합니다.

함창에서 유곡역까지는 약 20리입니다. 함창을 멀리 벗어나지 않은 윤직리에는 때다리 또는 당교(唐橋)라 전하는 곳이 있는데, 삼국통일전쟁과 관련한 전설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2 태종춘추공전에 "신라 고전(古傳)에는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에 유신(庾信)은 그 음모를 알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여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상주 지경에 당교가 있는데, 이것이 그 묻은 땅이라고 한다"고 전합니다. 뒤에 만들어진 지지도 이 기록을 토대로 당교 사적을 실었습니다. <여지도서> 함창현 교량에 '당교는 관아의 북쪽 6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에 실린 기록을 전재했습니다.

   
 

당교의 이곳 말인 때다리의 '때'는 중국을 낮추어 부르는 말의 거친 표현입니다. 이곳에는 그 다리의 이름을 딴 당교원(唐橋院)이 있었는데, 이곳을 찾은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남긴 글에 이곳에는 스님이 단청을 한 다락집이 있었다고 전해줍니다.

당교를 지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상감지(上監池)라고도 했던 정화지(井花池)가 있었습니다. <여지도서> 함창현 제언에 '정화지는 관아의 북쪽 5리에 있다. 다른 이름으로 '상감지'라고도 한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가야왕이 일찍이 여기로 거동해 노닌 적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못에 연꽃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경지로 변해 버리고 못은 없지만 이 또한 가야와 관련한 전승을 가진 이름이라 소개합니다. 옛 지지에는 통영로와 동래로의 상·하행로가 합쳐지거나 분기하는 곳으로 유곡역을 지칭하고 있지만 기실은 이곳 함창 당교가 그런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솔티전설

이 고개에는 원터 마을 쪽에 있던 관세음보살과 관련한 전설 하나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때인가 이 고개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선비들이 나타나면 고개 너머까지 짐을 들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선비들이 여인의 짐을 집에 옮겨주면 고맙다는 말은커녕 외려 번번이 그들을 집안에 가두어 버렸다고 합니다. 여인의 부탁으로 짐을 들어주러 길 떠난 이마다 돌아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그 여인의 집을 찾았더니 지금까지 여인의 짐을 들고 따라간 선비들이 모두 그 안에 갇혀서 공부에 열중이었다고 하는데요. 까닭인즉 공부를 게을리 하는 선비들을 교화하고자 미륵불(관세음보살)이 여인의 몸으로 감응하여 선비들이 독서에 힘쓰도록 이끌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 뒤로는 이 일대의 선비들이 모두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관세음보살이 여인의 몸으로 감응하여 인간을 교화한 이적 설화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곳 솔티 전설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전남 유마사(惟摩寺)의 후불탱 이야기나 창원 백월산(白月山)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성인의 성도기에 나오는 관세음보살 현신 설화에 비해 보다 직접적으로 깨우침을 전한 점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아마 이 전설에 등장하는 선비와 그들이 행한 독서는 과거를 통하여 이상을 펴는 조선시대 이후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치는 것으로 보아 이와 같은 시절에 민중들에 의해 생성된 전설로 여겨집니다.

관세음보살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향산보권(香山寶卷)>을 편역한 <관세음보살 이야기>에서 보듯, 보살은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에게 널리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고 이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보살 가운데서도 다급한 위기에 처한 중생을 가장 먼저 구원하고자 하는 이가 바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는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 '세상의 소리를 살펴보는 보살'로서 생명체의 상태를 두루 살펴본다는 말입니다. 지금과 같이 어지러운 때에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활짝 열어 놓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시는 관세음보살의 현현을 그려보는 것은 저만의 바람일까요.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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