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지식문화공간 노리터 권오범 대표

취업과 연봉이 존재의 명함이 되고, 통장 잔고와 부동산 등의 자산이 한 사람의 품격이 되는 현실에서 ‘그까이꺼, 나는 내 식으로 간다’는 청춘을 찾아보았다. 첫 번째가 권오범(27) 지식문화공간 북카페 노리터 대표이다.

<피플파워>가 경남지역의 20대 30대 청년들을 찾아 나선 거다. 이제 사회 진출을 하거나 생활에 발을 디디는 이 시기의 청년들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청춘’이라 이름 한다.

체제나 사회가 정해준 틀을 무조건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청춘, 눈부셨다.

경남 진주시 가좌동 우체국 옆 지하통로 입구에 걸린 문패, 지식문화공간 북카페 노리터. 셔터가 열리고 곧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계단 양 옆으로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정면에는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시가 붙여져 있다. 실내로 들어서는 문이 무겁게 열리고 내부가 공개됐다.

‘어, 이런 곳을 또 어디서 봤더라.’ 낯설지 않았다. 누구나 한 번 쯤 꿈꾸었을 젊은(?) 공간이었다. 벽면 책꽂이에는 1000권 이상의 책이 꽂혀있고 모양이 제각각인 책상과 의자들이 맞대고 있다. 실내 안쪽 커피 바에는 체구가 큰 청년이 모자를 눌러 쓴 채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10대 같기도 했고, 20대 같기도 했다. 북카페 노리터의 권오범 대표였다.

노리터 권오범 대표./사진제공 조경국(프리랜서)

“이윤 추구하지 않는 문화공간 만들고 싶어”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는 인문학, 사회학을 하고 싶었다. 지금 현실이 원체 인문 사회분야의 책을 안 읽는 풍토라서 책 읽는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됐다. 지역에 대학도 여러 곳인데, 이윤추구를 하지 않는 문화공간이 너무 없었다.”

노리터 안내문./사진제공 조경국(프리랜서)

지식문화공간 북카페 노리터 대표 권오범(27) 씨는 말한다. 말하자면, 지역에서 대안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청년들의 좌충우돌 문화실험실이라는 것.

노리터가 진주지역에 문을 연 것은 지난 해 3월. 이제 1년 됐다. 오범 씨는 공간을 열면서 지역의 인문학 공동체와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설 것을 선언했다.

초창기 회원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수다모임으로 만났기 때문에 편하게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면서 쉴 수 있는 북카페로 꾸몄다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해서 회원이면 누구든지 마실 수 있는 커피 바를 만들었다. 다행히 커피원두를 파는 선배가 도움을 주고 있다. 노리터에서 커피란 ‘사치재’가 아니라 생각과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고, 여럿 모였을 때 토론이 될 수 있는 ‘공유재’로서의 커피이다.”

친하게 지내던 몇몇 친구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 의기투합, 얼마씩 출자를 해서 보증금을 마련하고 공간을 구했다. 500만원에 월세 25만 원. 다 같이 모여 수리를 하고 공간꾸미기에 돌입했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알음알음으로 회원을 모집했다.

“주로 하는 것은 인문학 공부, 독서수다, 인문학 강연 그리고 여러 회원들의 재능 기부를 통한 노는 법 익히기 등이다. 실제 지난 한 해는 독립영화 <야만의 무기>를 상영한 후 핵발전 강연회를 열었고, 지역 시민들을 대상으로 ‘쿠바 이웃공동체로부터 한국교육을 다시 생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등 수차례의 강연을 진행했다. 또 이원규 시인 등 초청강연회와 대학입시거부토론회 등을 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기획한 공식 행사들이다. 물론 어떠한 예산 지원도 거부하며 독립적으로 진행한 행사들이다.”

하지만 꿈은 열망으로 비롯되고 지탱하는 건 현실이라 했던가. 오범 씨도 노리터를 운영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고. 지난 해는 시도는 좋았으나 성과는 없었던 한 해라고 자평한다.

“공간 운영비가 회비로 충당되지 못했다. 회원 중에 회비와 별도로 보태주기도 했지만, 지난 해는 아무래도 운영비가 딸려 따로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인터넷에서 일꾼 구하는 걸 보고 함양에 있는 농장으로 가서 감 따기도 하고, 이삿짐도 나르고 또 공장에서 포대 쌓는 일을 하기도 했다. 많이 한 건 아니고 돈이 없으면 나갔다.”

이쯤에서 오범 씨가 어떤 청년인지 궁금해졌다. 27살, 많은 청춘들이 취업하려고 기를 쓰고 있을 나이다. 그가 하는 일을 보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짓’이지라는 주변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을 듯하다.

노리터 전경./사진제공 조경국(프리랜서)

고등졸업장 팽개치고 청소년인권운동

오범 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좀 별나다고 말했다. 사실 독특했다. 오범 씨가 ‘꽃돌이’처럼 잘 나서가 아니라, 그의 생활이 일반 보편적인 생각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거다.

오범 씨는 고등학교 입학하고 중간고사 칠 무렵 자퇴를 했다. 몇 년 동안 줄곧 자신의 입장을 얘기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래도 오래 버텼다’는 반응이었다고. 그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말이었다. 어느 날 짝이 이빨이 부러져왔더란다. 이유를 물어보니 보훈강연 시간에 자세가 불량했다는 이유로 교사로부터 체벌을 당해 그리 됐다는 것.

“교칙에 체벌할 수 있다고 돼 있다고 하는데, 어떤 근거로 교사는 때릴 수 있는가, 나는 왜 맞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칙공개를 요구하자고 전교회장을 찾아갔고, 교장에게도 편지를 썼다. 잘 되지 않았다. 원래 ‘꼴통’ 으로 찍혀 있었지만 학교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럼 왜 그때 자퇴하지 않았냐?”

“하하, 다행히 며칠 뒤가 졸업이더라.”

인터뷰 장면./사진제공 조경국(프리랜서)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도 치기 전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재량활동 시간을 국영수 수업으로 대체하면서, 학부모동의서를 받아 공식문서에는 재량활동을 하는 것으로 작성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범 씨는 원래 교육부의 방침과는 다른, 학교의 꼼수가 싫었다 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실을 알리고 싶었고, 그래서 학부모와 학교가 모두 공범이 되는 학교 현실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보냈다고. 그 글이 게재되고 학교는 발칵 뒤집어지고 교사들은 오범 씨를 돌아가며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일방적으로 계속 불려가서 때로는 협박을, 때로는 회유를 받아야 했다.

“조금 더 사고(?)를 치고 그만두고 싶었는데, 예상보다 더 일찍 자퇴한 거다.”

인터뷰 하는 권오범 대표./사진제공 조경국(프리랜서)

그때가 17살 때인데, 다행히 오범 씨를 아껴주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친구들과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열렬히 하고자 하는 일은 청소년인권운동이었다. 그래서 ‘행동하는 청소년 인권연대’를 만들었다고. 전국중고등학교연합 진주지부 정도 됐는데, 나중에 단체가 해산되는 바람에 없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끝났을까? 오범 씨는 전국 청소년들 중 인권 문제에 관심 있는 10대 친구들과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2004년에 시작한 ‘청소년인권연대 아수나로’가 그것이다.

“우리는 회칙에다 청소년 스스로 정당한 권리를 직접 요구하며 실현해 가는 사회운동을 지향한다고 대놓고 밝혔다. ‘아수나로’는 불멸불사의 측백나무이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엑소더스>에 나오는 10대들이 청소년을 위한 대안자치공화국을 만드는데, 그 명칭이 아수나로였다. 거기서 따온 거다. ‘아수나로’는 두발자유 ‘no-cut’운동, 일제고사 반대운동 등 직접 행동을 벌이며 줄곧 ‘학생 인권’을 주장 했었다.”

2002년 봄에서 2008년 여름까지 때론 소속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오범 씨의 주된 활동은 청소년 인권운동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산다”

오범 씨, 처음 보자마자 자신을 ‘진보적인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었다. 청소년 인권운동에 무조건 들이대고 있을 때 오범 씨는 다른 재미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고. 공부였단다. 그는 검정고시를 치고 05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지난 해 석사를 마치고 올해 박사과정으로 들어갔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게 됐고, 2007년부터는 환경공부가 중심이 되었다. 생태환경과 정치경제학은 사실 아주 밀접하다. 하지만 아직 생태정치학, 생태경제학이라면 낯선 용어일 것이다.”

./사진제공 조경국(프리랜서)

오범 씨, ‘공부 즐기기’ 신공이 장난이 아닌 듯했다. 대뜸 왜 공부 하냐고 말문을 돌려봤다.

“특별히 개인적인 안정을 위해 공부를 하거나 사회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지 내가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밥벌이 하고 사람들과 활동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일반적인 삶의 패턴이 마음에 들면 그렇게 살겠지만 그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산다. 공부, 끝까지 하고 싶고 재밌다. 노리터를 붙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범 씨, 자신의 감정은 잘 드러내지 못하는데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에는 주저 없었다. 앞으로가 궁금했다.

“지식협동조합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협동조합은 사회적 필요와 욕구를 건강하게 풀어가는 ‘우애의 경제 활동’이다. 시장과 국가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향이 될 수도 있다. 노리터도 인문학, 환경을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아 회원들과 공부하고 있다. 또 장기적으로는 지역에 아직 생태교육 전담단체가 없는 것 같아 지역 사람들과 그런 활동 속에서 만나갈 것이다.”

스물일곱 살 오범 씨. 열일곱에 시작해 10년 동안 그는 스스로 부조리하다고 여긴 것에 ‘직접 행동’으로 저항해왔고, 자신의 길을 분명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시대와 현실에 정면으로 부딪혀가는 이 눈부신 청춘에 박수를 보낸다.

./사진제공 조경국(프리랜서)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