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리다] (17) 경북 상주시 상주읍성~솔티

상주(尙州)는 경주(慶州)와 더불어 경상도(慶尙道)의 이름을 낸 곳이며, 낙동강이란 이름을 품은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연려실기술>에 연원을 살필 수 있는 실마리가 있습니다.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洛陽)이니 그 동쪽에 있는 강이라 이름이 그리 되었다는 것이지요. 또 임진왜란 이전에는 감사(監司)의 본영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거점 도시 면모는 상주가 차지하고 있는 수륙(水陸) 교통의 요충지라는 장소성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 같은 관점은 <여지도서> 등 옛 지지서도 찾을 수 있는데, 김종직(金宗直)이 찬한 풍영루 중수기에 딸린 시에 '배와 수레가 모두 모여드니(舟車之會兮)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지로다.(四達之衝)'라 한데서 사통팔달하는 교통 요충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주읍성(尙州邑城)

상주읍성은 평지에 쌓은 성인데, 성 안에 왕산(王山)이라는 작은 구릉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상주에 처음 성을 쌓은 것은 신라가 통일 전쟁을 완수한 직후입니다. <삼국사기> 권34 지 제3, 지리1에 "신라 31대 신문왕 7년(687)에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성을 쌓으니 주위가 1109보였다"는 기록이 근거입니다. <여지도서> 상주목 성지에는 '읍성은 돌로 쌓았다. 둘레는 3883척이며, 높이는 9척이다. 동·서·남·북문이 있으며, 성 안에 4개의 연못이 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기록과 달리 고지도에는 어디에도 연못을 찾을 수 없었는데, 최근 발굴로는 못 안에 둥근 섬을 둔 네모난 연못(방지원도 : 方池圓島)과 옛길이 드러나 연못의 존재가 분명해졌습니다. 상주 왕산역사공원 조성에 따라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지난해 봄 발굴조사를 완료한 바에 의한 것입니다. 연못은 왕산의 동쪽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두 기의 연못이 붙어서 드러났습니다. 먼저 만들어진 연못의 폐기층에서 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의 연호로 1573~1619) 팔년(八年 : 1580)이라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그 폐기가 이즈음에 이루어졌음을 헤아리게 해 줍니다.

상주읍성 왕산 북측 구역 도로유구./영남문화재연구원

뒤에 만들어진 연못이 방지원도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도로유구가 눈길을 끌었는데, 2기의 도로는 왕산의 북쪽 배후에서 조사되었습니다. 선형은 동-서축으로 설정되었고, 이 가운데 1호 도로는 너비가 7~10m에 이르고 조사된 길이는 100m 정도입니다. 노면에는 자갈을 깔았는데 이러한 공법은 지반의 침하와 노면의 침식을 막기 위한 조치라 여겨집니다.

성주읍성에 관한 다른 기록으로는 1617년에 찬한 <상산지(商山誌)>에 "둘레가 1549척이고 높이 9척이며, 성 안에는 샘 21개와 못 2곳이 있고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14개월이나 점거하면서 둘레에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성 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으니 그 터가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서 보듯 상주읍성은 임진왜란 이후 황폐하여 성터만 남아 있던 것을 1869~1871년 수축을 거쳐 옛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머잖아 국권을 상실하면서 급격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재 상주읍성 내에는 왕산을 중심으로 역사공원을 조성해 두었습니다. 이곳에는 보물 제119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비로자나불좌상을 옮겨 두었습니다.

상주읍성을 나서다

상주읍성을 나서면 곧장 북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상주지도(규12154)는 북문을 나선 길은 5리를 지나 북천(北川)을 건너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지도에는 북천에 무지개다리(虹橋)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옛 기록에 나오는 북천판교(北川板橋)입니다. <여지도서> 상주목 교량에 '북천판교는 관아의 북쪽 5리에 있었다. 다리가 부서진 뒤에 돌로 무지개다리를 쌓았는데, 을해년의 수해로 파괴되었다'고 했습니다. 널다리가 부서진 뒤에 쌓은 무지개다리도 을해년 수해가 있었던 영조 31년(1755)에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상주지도에 홍교로 그려진 것은 뒤에 다시 복구되었음을 일러준다 하겠습니다.

북천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 23일에 순찰사 이일(李鎰)이 이끄는 조선 중앙군과 고니시(小西行長)의 왜군이 육상에서 최초로 접전을 치른 곳입니다. 통영로가 지나는 곳에서 서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북천교 부근입니다.

솔티를 넘다

북천을 건넌 통영로는 곧장 북쪽으로 길을 대어 만산동의 만산삼거리에서 국도 3호선과 잠깐 만났다가 문경으로 향합니다.

윗마을은 남적동 가는다리인데, 아마 외서천에 그런 이름의 다리가 있었던 듯한데, 다리 앞 정자 곁에는 목사(牧使)를 지낸 이 아무개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아 나서면 '서울나드리'라 불리는 삼거리에서 연봉리에 듭니다. 마을의 이름은 이곳에 두었던 연봉정(蓮峰亭)에서 비롯한 것인데, 예전에 상주목사가 서울에서 오는 귀한 손님을 맞던 정자라 전해집니다. 정자 기능이 그러하고, 지명이 서울나드리인 것으로 보아 서울로 오가는 주요한 길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주에서 서울나드리를 지나 솔티 가는 길. /최헌섭

서울나드리 북쪽의 목가리 원터는 솔티 아래에 있던 송원(松院) 자리입니다. <여지도서>에 송원은 '관아의 북쪽 26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나옵니다. 마을에서 만난 노인장은 송원과 솔티 아래의 서낭당과 미륵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일러주었습니다. 미륵을 모신 당집은 사라호 태풍 때 유실되었고, 서낭당은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길을 포장할 때 헐어서 골재로 썼다고 합니다. 서낭당과 미륵은 이곳이 옛길이 지나는 곳임을 일러주는 잣대입니다. 이곳의 미륵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7호로 지정되었는데,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 부처를 새긴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자기와 기와 조각, 미륵의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헤아리고 있습니다.

또한 <상산지> 고적에는 이 불상과 그 곁에 있던 대정원에 대해 '송현 길 가까이에 있으며 3칸 기와집 가운데 큰 석불 한 구가 안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큰 샘물이 바위 구멍 사이로 용출하는데 그 사방과 밑은 마치 함(函)과 같이 다듬어져 있으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고 겨울에는 더운물, 여름에는 찬물이 솟아 흘러 10여 마을의 논에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지으므로 예부터 대정원이라 일컬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3칸 기와집도 그 곁에 있었다는 샘도 사라졌고, 불상 앞에 있었던 삼층석탑도 2007년도에 도난당하고 지금은 받침대만 남아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예스러움을 잘 간직한 숲길을 따라 솔티를 오릅니다. 솔티(송현 : 松峴)는 이 지역에서 랜드마크 구실을 하는 공갈못(공검지 : 恭檢池)의 동쪽 고개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솔이 동쪽을 이르는 우리말 '살', '사라'와 고개를 적기 위한 훈차(뜻 빌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공검지는 제천 의림지(義林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등과 더불어 기원 전후에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저수지입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명종 25년(1195)에 상주사록(尙州司錄)으로 있던 최정분이 예부터 있던 제방을 그대로 수축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조선 초에 홍귀달(洪貴達)이 쓴 <공검지기>에는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공검(恭儉)이라는 이름은 쌓은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라 전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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