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26일에서 27일로 이어지던 밤, 스페인 국경 부근의 포르부라는 작은 마을에서 발터 벤야민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을 끝내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많은 양의 모르핀을 입에 털어 넣었다.

원작은 '일회성'을 가진다. '모나리자' 복제는 수없이 많아도 원작은 세상에 딱 하나만 존재했다. 발터 벤야민은 이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했다. 예술이 예배가치에서 전시가치로 기능 변화를 겪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은 새로운 미디어인 시뮬라르크 즉, 복제 또는 복제의 복제가 대중의 지각을 훈련하고 그들의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며, 그들을 예술적 수용과 연출의 주체로 세울 것이라 보았다.

원래 아우라는 중세 성인의 그림에서 그들의 머리 뒤편에 있는 후광을 가리키는데, 훗날 예술 작품 특유의 고고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말로도 사용됐다. 벤야민은 이 아우라를 '현존성'으로 풀이했다. 그래서 근대 이전엔 '모나리자' 원본을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 가야 했지만, 현대 사회의 예술인 영화·사진 등은 복제를 통해서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존성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우라의 몰락은 낡은 전통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말았다. 그렇다면 아우라가 상실된 시대 오늘날의 미술품은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상품일까? 원본의 의미가치가 반감했을 때 현란한 문화상품들과의 경쟁은 가능한 일일까?

Art라는 영어의 공식 정의는 아름다움을 시각적 형태로서 기술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정의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새로운 장르와 매체를 개척하며 스스로 진화해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영역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다. 예술의 진화는 비단 예술과 창작자인 작가뿐 아니라, 수용자인 관객 역시 점차 변화하는 예술의 영역에 적응하고 반응하고 있다. '아우라'가 '시선의 되받음'이고 이 '시선의 되받음'이 사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비롯한 모든 사물에 확장되면서 이 모든 것이 예술의 진화를 이루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축적된 것이 예술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시각으로 미술의 잣대로 보면 과거의 미술과 상관없는 것들도 미술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대상, 사물들의 만남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접촉은 미술의 영역을 넓히게 되지만 미술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게도 했다.

   
 

공식적인 정의가 무너지는 시대. 예술 작품을 기술로 복제할 수 있는 시대에 몰락하는 것이 비단 예술 작품의 아우라뿐일까마는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미술품의 위기인 것만은 사실이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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