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김주완이 만난 사람] 진주성 사진사 김진문 씨

진주성 촉석루에 가본 사람이라면 거기서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 촬영 영업을 하는 한 노인도 봤을 것이다. 작은 사진은 5000원, 좀 큰 사진은 2만원, 3만 원짜리도 있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 온 국민이 들고 다니는 핸드폰에도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는 요즘, 과연 이게 장사가 될까? 49년째 촉석루에서 ‘사진 노점’을 해온 김진문(74) 씨가 안쓰러운 까닭이다.

열여덟 살 때였다. 배운 거라곤 동네 서당에 한 3년 다닌 경험밖에 없는 그로선 아버지 농사를 잇거나 남의 집 머슴살이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농사가 싫었다. 교복에 모자 쓰고 중학교 다니는 친구들도 부러웠다. 

무작정 가출, 첫 직장이 사진관

고향인 옛 진양군 미천면 안간리를 떠나 가장 가까운 도시인 진주 시내로 갔다. 일종의 무작정 가출이었다. 그 때 들어간 곳이 촉석루 앞 ‘연일사’라는 사진관이었다. 월급은 따로 없었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이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라는 건 다를 바 없었지만, 카메라가 흔치 않았던 시절 사진관 점원 일은 근사해보였다.

이태 후 군에 입대, 1963년 9월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지만 고향에 돌아가진 않았다. 카메라를 사서 곧바로 ‘사진 노점상’을 시작했다. 1960년 복원돼 전국의 관광객들을 맞이하던 진주성 촉석루에는 당시만 해도 15명이 넘는 사진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텃세도 심했다. 남강 주변과 서장대 등을 전전해야 했다. 1969년 진양호 남강댐이 준공되자 진문 씨는 ‘남강댐 사진사 창설멤버’가 되었고, 그 즈음엔 촉석루에서도 ‘주류’ 축에 끼일 수 있었다.

   
사진 / 김구연 기자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한 때 20여 명에 이르렀던 진주의 관광 사진사들 중 남아있는 사람은 김진문 씨가 유일하다. “다 죽었지 뭐.”

혼자라서 경쟁은 없지만 갈수록 손님은 줄어든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어도 한두 명이 고작이다. 아예 허탕을 치는 날도 허다하다. 심지어 자기 카메라를 건네주며 김 씨에게 찍어달라는 얌체 손님도 있다.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럴 경우에도 찍어준단다.

“이 일 하려면 간하고 쓸개하고 다 빼놓고 해야 돼요. 그런 분들도 나에겐 다 고객인데….”

그래도 이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뭘 하겠어요? 평생 해온 게 이것뿐인데….”

한 때는 잘나갔던 직업, 사진사

70·80년대까지만 해도 벌이는 괜찮았다. 2남 3녀를 모두 전문대까지 졸업시켰다. 상봉동동에 집도 있다. 막내 한 놈만 빼고 결혼도 다 시켰다. 막내의 결혼 문제 말고도 걱정거리가 하나 남았다. 할멈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석에 누워있다.

   
 사진 / 김구연 기자  
“그래도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거동이 좀 불편하긴 하지만 밥도 잘 해먹고 괜찮아. 막내 놈이 골칫거리지.”

그런데 정작 김진문 씨 자신도 성한 몸이 아니다. 약 20년 전부터 유일한 애마(愛馬)인 스쿠터에 카메라 가방을 싣고 다니는데, 7~8년 전 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친 것.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다 보니 누구한테 원망도 못하지 뭐. 다리를 저니 남 보기에 그래서 그렇지. 별 불편한 건 없어요.”

하지만 아직 장애인 등록도 하지 않았다.

“동(洞)에서도 하라고 하지만, 나 아니라도 할 사람이 꽉 찼는데, 나까지 (장애인 등록)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래도 장애인 등록이 되면 뭔가 혜택이 있을 텐데.
“지금 나이 칠십 다섯에 혜택을 보면 얼마나 보겠다고….”

-지금 나이는 그렇지만, 7~8년 전에 다쳤으니 그 땐 젊었잖아요.
“아이고, 그래도 그냥 안 할랍니다.”

지금까지 그가 사진을 찍어준 사람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을 물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여기 세 번이나 왔어요. 박물관 개관할 때도 왔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혹시 그 때 찍은 전두환 사진이 남아 있나요?
“그 사진이 없어요. 필름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게 어디 가버렸는지 모르겠어. 아마 내가 다쳐서 누워있을 때 할매가 치워버렸나 봐. 얼마 전 방송국에서도 그 사진이 있냐고 물어보던데, 아무리 찾아도 없데?”

김두관 경남도지사에게 인사를 받다

또 한 명은 현 김두관 경남도지사다.

“도지사 당선되고 나서 김시민 장군 전공비 앞에서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러 왔는데, 기념촬영을 해줬어요. 도청에 조카가 있어서 인편으로 사진을 보내줬는데, 나중에 다시 김두관 지사가 여기 들렀을 때 직접 ‘사진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데요. 참말로 진짜 고맙더라고.”

   
  사진 / 김구연 기자  
그는 <진주관광>(동아인쇄출판)이라는 70페이지짜리 사진집을 펴낸 저자이다. 표지에는 촉석루 아래 남강에 진주시의 시조(市鳥)인 백로가 날아오르는 사진이 담겨 있다. 백로를 포착하려고 여러 날을 강 건너편에서 기다렸단다. 필름도 수십 통 내버렸다. 책에 실린 관광·유적 사진은 진주시에서 제공받은 두 장을 빼곤 모두 김진문 씨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1992년 8월 1에 초판을 발행한 후, 2005년까지 5판을 찍었다.

“집 따까리까지 설정을 해서(담보 대출을 했다는 뜻) 내 돈으로 책을 찍었어요. 총 1만 권을 찍었는데, 처음엔 5000원씩 받고 팔기도 했어요. 요즘은 그냥 사진 찍는 손님한테 한 권씩 (무료로) 드리지요.”

사진집 중에서 봄날 촉석루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남강에 비친 사진이 가장 내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했다. 촉석루 계단에 한 발을 걸치고 서라고 하더니 현판이 가장 잘 나오는 위치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촉석루의 중건 역사부터 각 현판의 글씨, 의기사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설명을 해줬다. 어릴 때 고향의 서당에서 배운 한자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며 수줍게 털어놨다.

“관광객들이 별 걸 다 물어요. 사진사가 돼갖고 뭘 물어보는데 대답을 못하면 우사스럽잖아요. 그래서 옥편을 펴놓고 공부를 했어요.”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심 때가 되었다. 성문 밖 장어구이 집으로 옮겼다.

“진주는 비빔밥이니 뭐니 해도 역시 장어구이죠.”

그는 더 이상 돈을 못 벌어도 걱정이 없다고 했다.

“젊을 땐 사진을 못 찍으면 화닥화닥했는데, 나이가 드니 그런 마음도 없어지데요. 이제는 손님이 없어도 없는가 보다 하고….”

   
사진 / 김구연 기자                                                                                                

-요즘 같은 겨울에는 하루 종일 밖에 계시면 춥진 않나요?
“안 춥습니다. 거기도 양지쪽은 웬만한 방보다 따뜻합니다.”

-심심하진 않나요?

“신문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하면 심심한 것도 없습니다. (식탁의 장어구이를 가리키며) 좀 많이 드이소. 이건 식어버리면 맛이 없어요.”

-어르신이 좀 많이 드십시오. 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은데, 많이 드시고 푹 쉬셔야 감기가 떨어지죠.
“아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먹어야지. 나는 이제 됐습니다. 이거 돈 주고 남기면 안 됩니다.”

헤어지기 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는 없느냐고 물었다.

“나 절대 그런 건 없습니다. 촌놈이 여기 나와서 EBS 방송에도 출연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 같은 촌놈을 신문사에서 찾아올 일이 있습니까? 내가 통장도 한 삼십 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닙니까? 걸리는 게 있다면 막내 놈이 아직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게 제일 골칩니다. 그거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촉석루 사진사로 전성기를 누렸던 70년대에만 해도 진주성과 진양호는 인기 높은 신혼여행지 중 하나였다. 요즘도 그 때 신혼여행을 와서 김진문 씨에게 기념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이 장성한 자녀와 함께 촉석루를 찾아 인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실 저는 그 분들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하죠. 그런데 그 분들이 먼저 아는 체를 해요. 그러면 저도 당연히 반갑죠.”

   
 사진 / 김진문 사진사 

사진 값으로 2만 원을 드렸지만 끝까지 받지 않았다. 이틀 후 가로 25cm, 세로 20cm 짜리 사진 세 장이 택배로 편집국에 도착했다. 사진 하단에는 ‘촉석루 관광 기념’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조만간 다시 찾아가 반드시 사진 값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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