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서후의 컬러풀 아프리카 6편

나미비아는 독일 식민지였다. 그래서 웬만한 도시 이름과 거리 이름이 다 독일어로 돼 있다. 여기, 스와콥문드도 마찬가지다. 대서양 연안의 멋진 휴양도시. 옛 독일풍 건물이 인상적이다. 오늘 밤엔 침대에서 잔다고 생각하니 행복하다. 이 행복감은 좀 의외다. 그동안 텐트에서 자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제법 힘들었나 보다. 아무튼, 간만에 문명 세계로 들어섰다.

남회귀선

나미브 사막. 새벽. 텐트 밖으로 나온다. 몸이 상쾌하고 가볍다. 왠지 기분이 좋다. 마치 오늘부터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침 식사, 설거지, 짐 정리로 바쁜 아침을 보내고 오전 7시, 트럭이 캠프장을 떠난다. 이제는 익숙한 사바나 풍경. 마른 수풀 사이로 드문드문 스프링복이니 타조, 오릭스 같은 동물이 보인다. 운전을 하던 샤드웰이 오릭스는 아주 무서운 동물이라고 소리친다. 50㎝는 됨직한 긴 뿔로 사람을 들이받기도 하는데, 옆구리로 들어간 뿔이 어깨를 뚫고 나온단다. 꽥! 끔찍해!

오전 8시, 트럭이 멈춘다. 도로 양편에 ‘Tropic of Capricorn’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각각 서 있다. 다들 그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남회귀선이 뭐지? 고등학교 때 헨리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의 <북회귀선>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음울하고 음탕한 내용이었다. 작가 소개란에 <남회귀선>이란 소설도 썼다고 적힌 걸 읽은 기억이 있다. 그게 전부다. 그 남회귀선이 난데없이 아프리카에서 나타나, 불쑥 내 삶에 들어온 거다. 이건 참, 뜬금없는 사건이다. 때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은 이렇게 불쑥 삶에 끼어든다. 남회귀선이란, 흠, 남회귀선.

남회귀선 표지판./이서후 기자

남회귀선을 지나 달리던 트럭이 다시 멈춘다. 샤드웰이 우리를 이끌고 야트막한 언덕을 오른다. 언덕 위, 아, 낮은 구릉이 끝없이 이어진 풍경. 자세히 보니 퇴적암의 연속이다. 너무도 오래 풍화되어서 그럴까, 구릉들은 모두 부드럽고 따뜻하다. 샤드웰이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보여준다. 다이아몬드란다! 물론 가공하지 않은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다. 그러고 보니 나미비아도 다이아몬드가 아주 유명하다고 들었다.

여지없이 황량한 풍경들. 그 사이로 끝없이 이어진 저 길을 달리고 있자니, 마치 이 여행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갑자기 녹색 식물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물이 흘렀던 흔적이 있다. 그러니까 우기가 오면 강이 되는 곳이다. 나무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저 길이 바로 강줄기일 것이다. 물이 없어도, 잠깐 나타난 이 녹색은 시각적 오아시스다. 그 풍경에 눈을 축인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황량한 풍경들.

칼라하리 사막의 오래된 구릉./이서후 기자

바다와 맞닿은 나미브 사막이 거대하고 붉은 모래 언덕으로 살아 있었다면, 칼라하리 사막의 일부인 이 길들은 차라리 아무것도 없어서 진짜 사막 같다. 달 표면을 직접 본다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흙과 돌, 먼지 말고는 보이는 게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스와콥문드

지평선 근처에 구름 띠가 보인다. 아니, 안개인가? 시야가 흐려진다. 저쪽이 대서양인가? 앗, 해도 사라진다. 구름이 멀리 있던 게 아니었나? 뭉텅뭉텅 거대한 수증기 더미가 트럭을 감싸고 돈다. 대서양이 아주 가깝다는 신호다. 길이 아스팔트로 변했다. 근처에 큰 도시가 있나 보다. 그리고 나타난 거대한 모래 언덕들. 나미브 사막의 영역이다.

다시 문명의 세계로 들어왔다. 웰비스 베이(Welvis Bay). 대서양 연안의 이 작은 도시는 거대한 플라밍고 무리로 유명하다. 연초록 바다를 배경으로 연분홍 플라밍고 무리가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다. 조용히 반짝이는 수평선, 한가한 갈매기 소리, 낮고 거대한 구름. 며칠 동안 사막을 달리다 난데없이 바다라니, 어리둥절한 눈으로 풍경을 본다.

웰비스 베이의 풀라밍고 무리./이서후 기자

트럭이 다시 달린다.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사막. 바닷가 거대한 모래사장인가, 사막 옆 거대한 오아시스인가. 바다, 사막, 하늘, 바다, 사막, 하늘. 문득, 바다에서 짠 내가 난다. 우리는 곧 스와콥문드(Swakopmund)로 들어선다. 나미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도시. 독일어로 스바코프문트, 스와콥의 입이란 뜻이란다.

스와콥문드 시내./이서후 기자

시내로 들어가기 전 교외에 있는 ‘사막 탐험’이란 이름의 레저 활동 중심에 들렀다. 내일 아침에 할 레저 활동을 예약하기 위해서다. 사륜 오토바이, 샌드보딩, 스카이다이빙 등을 할 수 있는데, 모두 나미브사막의 그 거대한 모래 언덕에서 진행된다. 그중에 사륜 오토바이 타기를 선택한다. 예약을 하고 나오는데 입구에 앤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 사진이 걸려 있다. 오, 앤젤리나 졸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아프리카 해안 도시가 바로 이곳이었다!

스와콥문드 바다와 만난 사막./이서후 기자

도심

숙소는 ‘Villa Wiese’란 호스텔이다. 깔끔하고 예쁜 곳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거리로 나선다. 남아공 케이프타운 이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도시를 혼자 걸어서 돌아다닌다. 먼저 물어물어 우체국을 찾는다. 엽서를 살 생각이다. 우체국. 줄이 길다. 직원들은 대체로 친절한 듯하다.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 응? 우체국에서는 우표만 판단다. 엽서는 쇼핑센터에서 사란다. 체. 관공서에서 느끼는 이 무력감은 한국에서도 가끔 있는 일이다. 관료 체계의 보편성일까.

근처 쇼핑센터. 이름이 ‘Super Spar’다. 남아공에 본사를 둔 식료품점이다. 엽서 사러 간 걸 잠시 잊고 신기한 게 없을까 두리번거린다. 그냥 한국의 대형마트 같다. 대신 진열된 상품이 다를 뿐. 그럼 이건 자본주의 유통 체계의 보편성인가? 뭐, 아무튼, 엽서를 사서 다시 우체국으로. 집에다 엽서를 부치고는 해변으로 향한다.

바닷가에 늘어선 레스토랑, 호텔, 리조트. 와 모두 멋지다! 바닷가 거리에서 줄루(Zulu·39)라는 남자를 만났다. 조그만 광산을 한다는 그는 바이어를 기다린다고 했다. 다이아몬드를 포함해 광석을 팔기 위해서다. 근데 바이어를 왜 바닷가에서 기다리는 걸까? 그가 조그만 주머니에서 여러 광석을 보여준다. 아마테스? 도르말린? 이름도 이상한 돌 조각들….

바닷가 잔디밭에는 종일 스프링클러가 돌아간다. 사막에서 바로 바다로 이어지는 곳이어서 사실 잔디가 잘 자랄 토양은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관리를 해 줘야 한다. 다시 도심으로 방향을 튼다. 휴지 한 조각 없이 깨끗한 거리, 배달이라고 써 붙인 피자 가게, 이런저런 대형마트와 은행들, 옷가게, 인테리어 가게. 앗, 횟집도 보인다. 집들은 대체로 아담하고 정원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오직 부유한 이들만 도심에 집을 둔다. 가난한 나미비아 주민들은 이 도시를 둘러싼 몇 개의 위성 도시에 산다.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알면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일할 수 있다.

길에서 공예품을 파는 노점상을 만났다. 그런데 이분 참 집요하다. 겨울이라 고객이 없다. 제발 부탁한다. 하나만 사주라. 마음이 약해져, 조그만 조각품을 하나 샀다. 사면서 이름을 묻는다. 젠장, 혀를 입천장에 대고 튕기면서 소리를 내야 하는 그의 이름을 발음 그대로 적을 수가 없다. 아무튼, 그는 35세, 한 집안의 가장으로, 역시 근처 위성도시에 산단다.

만찬

주위가 어두워진다. 서둘러 숙소를 향한다. 어? 분명히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숙소가 없다! 어쩌지? 별로 크지도 않는 도시, 그냥 돌아다니다 보면 숙소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무섭다. 그럼 도심으로 가서 다시 차근차근 되돌아온다? 아니, 시간이 없다. 저녁에 일행이 모두 모여 도심 식당에 가기로 했다. 약속 시간은 겨우 30분 남았다.

난감해하며 어둑해진 길을 걷는데 한 무리 사람들이 보인다. 겁이 덜컥 났지만 가까이 가보기로 한다. 다행히 학생들이다. 그중 여학생 3명에게 다가가 길을 묻는다. 숙소 이름을 대니 대뜸 따라오라며 앞서가는 아이들. 아, 직접 데려다 주는 건가? 안도감 절반, 걱정 절반, 그렇게 따라나선다. 나쁜 아이들 같지는 않다. 이름을 물으니 차례로 나타샤(15), 리오니(16), 케샤(16)라 한다. 모두 근처 나미브고등학교에 다닌다. 엇, 숙소 도착! 고마워, 안녕.

오후 7시 ‘Napolitana’란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 도시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이란다. 꽤 넓은 식당인데 빈 자리가 없다. 그런데 여기, 그냥 서양음식점이다. 다만, 스테이크 재료가 모두 아프리카 동물이다. 메뉴를 보니, 헉! 오릭스, 쿠두, 스프링복, 얼룩말, 타조, 악어. 이건 뭐, 아프리카 야생 동물을 다 먹는다는 건가?

이날 압권은 존경하는 론 아저씨가 시킨 돼지 갈비. 세상에, 엄청나게 큰 갈비짝이 덩어리째 요리돼 나왔다. 난처해하는 론 아저씨 옆에서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아주머니가 깔깔깔 웃느라 신났다. 한참을 먹던 론 아저씨,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우리를 보고 외친다. Help(도와줘)!

저녁을 먹고 젊은 애들이랑 어울려 근처 바에서 술을 한잔한다. 간만에 문명 세계 나오니 다들 즐거운 모습이다. 신나는 음악, 술, 젊음이 있으니 뭐가 더 부러울까. 과감하게 폭탄주에 도전한다.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서양인들이 ‘shooters’라고 부르는 도수가 제법 높은 칵테일이다. 그중에 스프링복이란 이름의 칵테일을 마신다. 컥! 목으로 불이 넘어간다. 밤은 깊고, 술은 취하고, 밤은 더욱 깊고, 술은 더욱 취하고….

엔진 소리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어제 예약해 둔 레저 활동을 하러 간다. 일행 중 절반 정도가 사륜 오토바이 타기를 신청했다. 자, 오토바이를 골라 보세요. 국방색 위장무늬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온다. 저건 내 거다! 기어를 중립에 두고 시동을 켠다. 그리고 액셀 손잡이를 당기면 서서히 출발한다. 최고 속도는 시속 60㎞, 하지만 속도감이 상당해서 시속 40㎞만 돼도 충분하다. 가이드는 3명, 우리는 빨리 달리는 팀과 천천히 달리는 팀으로 나눠 사막으로 들어간다.

나미브 사막에서 사륜오토바이 타기./이서후 기자

와! 이거 재밌다. 멋지다! 대서양을 왼쪽에, 나미브 사막을 오른편에, 거친 엔진 소리가 풍경을 가른다. 모래 언덕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경치, 여기에 상쾌한 아침 공기와 따뜻한 햇볕까지, 세상을 다 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건 정신적 오르가슴이다!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푸르고,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맑다. 바닷가 모래 언덕에서 잠시 쉴 때 가이드에게 말한다. 정말 행복한 직업을 가졌군요.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으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햇빛이 잘 드는 벤치에 주르르 앉아 해바라기를 한다. 이, 달콤한 태양. 주위는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하다. 세상에 오직 우리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후 3시. 다시 도심으로 나선다. 나미브고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들리는 함성.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아, 어제 그 소녀들이 교실 창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이것 참, 왠지 기분이 좋다. 시내 중심가 교차로 난간에 기대 사람들을 본다. 차를 닦는 택시기사,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중년 흑인 여성, 눈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몸매가 잘 빠진 젊은 여성. 그들의 일상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바다 냄새를 따라 해변으로 향한다. 어제 낮에 맥주를 마셨던 레스토랑. 카페에서 일하는 귀여운 아가씨가 나를 알아본다. 디나(Deena·23). 조그만 체격에 미소가 아주 예쁜 친구다. 부시먼 출신이란다. 디나는 리(Lee)라는 내 이름을 아주 좋아했다. 보니타(Bonita·23)란 아가씨도 우리 대화에 끼어든다. 그는 힘바 부족 출신이다. 보니타는 아름답다는 뜻인데, 앙골라 출신 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란다. 보니타는 여기 바닷가에 자신의 바(bar)를 여는 게 꿈이에요. 디나가 한마디 거든다.

스와콥문드 해변 모습./이서후 기자

노을

테라스 난간에 기대 바다를 본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강하고 파도는 억세다. 바다 저쪽에는 아마 남아메리카가 있을 것이다. 서서히 노을이 진다. 아, 진노란 하늘과 바다. 여기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위대한 노을을 보는구나.

거대한 해가 서서히 바다에 잠긴다. 느리고 아주 선명한, 태양의 몰락. 절반이 남았다. 3분의 1이 남았다. 손톱만큼 남았다. 그리고는 사라진다. 굿나잇.

스와콥문드의 저녁 노을./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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