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16) 구미시 안곡역∼상주시 상주읍성

안곡역이 있던 무을면 안곡리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아 낙동강 동쪽의 큰 고을인 상주로 향합니다. 예서 상주로 이르는 길은 백현(白峴 : 흰티)을 넘는 고갯길과 대체로 지금의 68번 도로와 선형이 비슷한 안곡현(安谷峴 : 안현(安峴)이라고도 함)을 넘는 길이 있습니다. 앞의 길은 고지도에 백현을 넘는 선형이 묘사되어 있지만 고도가 700m를 오르내리는 연악산(淵岳山)을 넘기는 만만해 보이지 않습니다. 옛 지지에 실린 역로(驛路)는 안곡현을 넘는 길과 유사하여 오늘은 이 길을 따르기로 합니다.

◇안곡역(安谷驛) = 구미시 무을면 안곡(안실) 1리가 옛 안곡역 자리입니다. 늙은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어울린 마을숲이 있어 안쪽이 역터로 헤아려집니다. 나무들은 역수(驛樹)라 볼 수도 있겠지요. 마을회관 앞에는 안곡역에서 썼다는 우물을 몇 해 전에 옛 방식대로 다시 만들어 두었습니다. 마을의 유래와 주세붕·이황 선생이 남긴 율시를 바위에 새기고, 한편에는 우물을 다시 만드는 과정을 정리한 사진을 게시판에 담아 두었습니다. 마을 유래비에는 1632년경에 신씨 성을 가진 형제가 개척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안곡역은 고려시대 경산부도(京山府道) 관할의 25역 가운데 하나이니 상한을 한참 올려야 할 것입니다. 또 지명유래도 이곳을 통행하던 이들이 여기서 말의 짐을 풀고 편안히 쉬어간 데서 비롯했다고 하나 안곡 한자말을 뜻으로 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 안실이라 하고 한자를 빌려 안곡으로 적은 것입니다.

안곡역이 있던 안곡리 안실마을 전경.

안곡역의 중요한 장소성은 동쪽의 선산과 남쪽의 개령과 오가는 교통의 결절지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입지로 구간 내의 다른 역에 비해 이용이 잦았고 그런 까닭에 점필재 김종직, 신제 주세붕, 퇴계 이황 등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글을 남겼습니다.안곡역은 조선 전기에는 유곡도(幽谷道)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세조실록> 8년(1462) 8월 5일 기사에 나옵니다.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었는데, 이 조치에 따라 안곡역을 포함한 구미시의 상림역(上林驛 : 장천면 상장리)·영향역(迎香驛 : 해평면 산양리)·구미역(仇彌驛; 구미시 선기동?)은 유곡도(幽谷道) 찰방이 관할하게 했던 것이지요.

여기서는 김종직이 절도사를 맞으러 새벽에 안곡역에 왔다가 정강수에게 지어 준 칠언율시를 소개합니다. 개령현감인 아버지 김숙자의 영으로 안곡역에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월 십팔일 효부 안곡역 영 절도사 유작 증 정강수(九月十八日曉赴安谷驛迎節度使有作贈鄭剛수) 김종직(金宗直)

날라리(畵角)소리 속에 고삐 안장 정비하고/ 정절(旌節 : 절도사의 행차)을 맞이하려 하매 역정이 멀다/ 거친 마을 10리에 등불은 창을 뚫는데/ 이지러진 달 오경(새벽 3~5시)에 서리가 신에 찼다/ 토끼를 잡고 여우를 치매 참으로 흥취 있는데/ 솔을 심고 대를 묻기에 어찌 집이 없겠는가/ 시내 건너 수염이 언 늙은이 부끄러워했나니/ 코 골며 달게 자던 잠 새벽 피리소리에 깨다.

◇안곡현(安谷峴) = 상주와 선산을 오가던 길은 크게 두 갈래였습니다. 지지와 고지도에 묘사된 바로는 연악산 줄기의 죽현(竹峴)을 넘는 길과 안곡역 서쪽으로 안곡현을 넘어 낙평역(洛平驛)과 청리(靑里)를 거쳐 상주로 이르는 길이 그것입니다. 통영로는 개령에서 안곡현을 넘어 상주로 이르는 길을 이용했습니다. 안곡현을 넘는 길은 선산부지도(규10512 v.2-6)에 선산부의 서로(西路)와 개령현의 북로(北路)가 안곡역에서 만나 상주로 이른다고 묘사하였고, 이 지도에 이르기를 관문에서 35리의 안현대로(安峴大路)는 상주목까지 40리라 했습니다. 이로써 안현은 안곡현의 다른 이름이고, 안곡역 가까운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헤아립니다. 먼저 제작된 <해동지도> 선산부에는 선산에서 상주로 이르는 길은 연악산 동쪽에서 죽현(竹峴)을 넘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안곡역과 수다사로 이르는 길도 표시하였으나 상주와의 연결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죽현은 선산 서쪽에서 상주로 이르는 고개로 이 통로는 대체로 중부내륙고속국도 선형과 비슷합니다.

안곡현(안현·산태배기고개). /최헌섭

◇상주 가는 길 = 안곡역에서 상주로 가는 길은 역을 나서서 안곡현(安谷峴)을 넘는 데서 비롯합니다. 안곡역과 고개 사이에는 역에서 나오는 길과 선산에서 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가 있는데, 그 서쪽이 바로 안현이라고도 했던 안곡현입니다. 이곳에서는 산태배기고개라 부르는데 바로 그 즈음의 지명이 산태백이고 그래서 그곳 작은 못은 산태백지라 부릅니다. 높이가 낮아 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고개에 올라 서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상주시 공성면 무곡리에 드는데, 물이 성해 무실이라 부르고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무곡(茂谷) 또는 수곡(水谷)이라 적습니다.

마을 뒤 절터에서 옮겨 세운 고려시대 삼층석탑(경북도 문화재자료 128호)이 있는데 옛길은 그 서남쪽으로 지납니다. 용안리를 거쳐 상주 청리지방산업단지를 지나면 낙평역(洛平驛)이 있던 청하리 역마에 듭니다. 옛 지도를 살피면 용안리 즈음에 독송정(獨松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성 방면과 안곡 방면으로 이르는 갈림길에 있었던 정자 같습니다. <여지도서> 상주목 도로에 '남쪽으로 청남(靑南) 독송정까지 30리이고, 독송정에서 안곡현 선산 경계까지 10리, 독송정에서 공성 왜유현(倭踰峴) 금산 경계까지 17리다'라고 했습니다. <대동여지도> 16-3에도 이즈음에 갈림길을 표시했기에 그리 보는 것이지요.

독송정을 지나 머잖은 곳에서 낙평역 옛터를 지납니다. 지금의 청하리(靑下里) 역마가 그곳인데, 청하는 청리의 아래이고 역마는 낙평역이 있던 곳이라 남은 지명입니다. <여지도서> 성주목 역원에 '낙평역은 관아의 남쪽 25리에 있다. 북쪽으로 낙양역까지 20리이며, 남쪽으로 선산 안곡역까지 20리다. 중마 2마리, 복마 3마리, 역리 42명, 역노 47명, 역비 20명이다'고 했습니다. 안곡역에서 예까지 20리 길을 걸은 셈입니다. 낙평역은 달리 청니역(靑泥驛)이라 한 적도 있는데, <여지도서> 선산도호부 역원에 안곡역의 북쪽 20리에 있던 역을 그리 부른 게 사례입니다.

역터를 지나면 사창(社倉)이 있던 원장리의 사창동이고 바로 북쪽은 옛 청리현 소재지인 청리입니다. <여지도서> 성주목 고적에 '청리폐현(靑里廢縣) 리(里) 자는 리(理) 자로도 쓴다. 본래 신라의 음리화현(音里火縣)이다. 경덕왕 때 청효(靑驍)로 고치고 상주에 편입시켰다. 고려 때 지금 이름인 청리(靑里)로 고치고 상주에 소속시켰다. 관아의 남쪽 20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옛 청리현과 양촌동의 주막골을 지나 갑장산(甲長山 : 805.7m) 남쪽 상산(商山) 기슭의 지천동에는 숙종 28년(1702)에 지역 유림이 박언성(朴彦誠)·김언건(金彦健)·강응철(康應哲)·조광벽(趙光璧)·강용량(康用良)을 기리려고 세운 연악서원(淵岳書院)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 소천교를 통해 병성천을 건너는데 고지도(상주지도 규12154)를 보면 소호천(蘇湖川)으로 나옵니다.

   
 

그 이름은 소천교라는 다리에 계승되었습니다. 예전에 이곳 소호천에 둔 다리는 관아의 남쪽 13리에 있었던 양산지교(陽山旨橋)인데 <여지도서>(1757~1765)가 편찬될 당시에는 이미 부서지고 없었다고 전합니다. 지명으로 보아 양산지교가 가설된 자리는 지금의 소천교에서 약간 아래인 양산리 쪽으로 헤아려집니다. 다리를 건넌 곳에는 솔밭이란 지명이 남았는데, 둔치를 따라 솔숲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솔밭을 지나 남산 자락의 상주향교를 서쪽으로 바라보며 상주읍성에 닿아 여정을 마감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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