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털 없는 매끈함 강조…최근 여성 면도기 나와 제모 부채질

영화 <러브픽션>에서 공효진은 "내가 살던 알래스카에선 겨드랑이털을 길러"라고 말한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람객은 죄다 "푸하하~"하며 웃는다. 그때 "그게 뭐 이상해?"라는 공효진의 말 한마디가 뇌리를 스친다. '그래, 겨드랑이털 좀 기르는 게 뭐 어때서.'

지금은 '털뽑기'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언제부터 털을 없애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시작됐을까? 미술 작품을 통해 들여다봤다.

근대 이전 고대 그리스 조각상의 여인상부터 중세시대 누드화까지를 보면, 여성을 그린 작품에는 털이 한 올도 없이 매끄럽게 표현됐다. 그렇다면 이는 과거에도 털뽑기가 이뤄졌다는 이야기일까? 책 <털-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는 제식의 한 부분으로 털뽑기가 행해졌고 신들 몸에는 털이 없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미용 목적으로도 털뽑기가 이뤄졌다. 로마 상류층 여성들은 바닷조개를 족집게처럼 써서 종아리 등에 난 털을 뽑았고, 그리스에서는 등잔불로 털을 지져 없앴다.

에곤 실레 작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 <모나리자>

<치장의 역사>에서도 로마 귀부인들은 온몸과 얼굴에 난 털은 물론 콧구멍 속 털까지도 모조리 뽑았다고 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부인들은 고귀함의 상징이었던 넓은 이마를 만들고자 두개골 상부 머리카락을 뽑았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 <모나리자>(1503~1506년 작)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에게는 왜 눈썹이 없을까?' 아직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듯 유럽 중세 때는 여성의 몸에 털을 제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역사학자 다니엘라 마이어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자신의 체질과는 상관없이 체모 면도라는 고문을 감당해왔고, 또 그래야만 하는 쪽은 오로지 여성들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여성들도 털뽑기라는 족쇄에서 살았다니 실로 놀랍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미술 작품에 체모(體毛)가 등장하기 시작한 걸까? 19세기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제모를 거부하는 여성들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는 미술 작품에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작 <벌거벗은 마하>(1800년대 작)다. 이 작품은 인간을 그린 최초의 누드화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성 음부를 부드러운 그늘로 처리했다. 그 당시 누드화는 모두 신화나 성경 속에 등장하는 여신이었지만 고야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려 스페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현실 여인의 누드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종교재판까지 선다.

   
 

20세기 초 '아르누보'(신예술) 양식이 떠오르면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의 누드화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를 띠었다. 털 한 올 없이 매끄럽게 표현됐던 이전의 조각·회화와 달리 겨드랑이털과 음모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이전의 두루뭉수리한 에로티시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들도 고야 못지 않게 오스트리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제모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여성들의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 없는 드레스가 선보이면서부터다. 1915년 미국의 월간지 <하퍼>는 반라나 다름없는 여성의 사진과 그 옷의 제단견본을 부록으로 실었다. 그러자 여성지 칼럼니스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겨드랑이와 팔뚝의 털을 면도할 것을 권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미국 화장품 회사들도 탈모제를 내놓았다. 20세기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가 현대적 면도기를 발명하면서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는 광고 문구로 여성들의 제모를 부채질했다. 영화 <러브픽션>에서 겨드랑이털이 큰 이슈가 됐듯이 오늘날도 여전히 털을 뽑지 않은 여성과 남성(특히 여성)들은 놀림감의 대상이다. 달라진 건 있다. 과거엔 가부장적인 억압이, 현재는 기업들의 상술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인간을 그린 최초의 누드화는 무엇?

한 여인이 발가벗은 채 당당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

바로 스페인 태생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다.

1800년대 초 그의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가톨릭 사회였던 스페인은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고야는 '이단죄'로 종교 재판을 받게 됐다.

그 당시 누드화는 신화나 성경 속 인물을 대상으로 그려졌지만 〈벌거벗은 마하〉의 주인공은 현실의 여인이었다.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질문에 고야는 "제가 사랑했던 여인입니다"고만 말한 채 끝내 대답을 회피했다. 스페인 최고의 명문가인 알바 공작부인이 그림의 주인공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고야가 죽고 알바 공작 집안에서는 그 여인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무덤을 파헤치는 등 해프닝을 벌였지만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 중인 〈벌거벗은 마하〉는 최초의 누드화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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