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어느덧 내 모습 산이 되어 있더라"

“스님, 이건 머라꼬 그린 건데예?”
“산이고 천지라 안 카나. 내 놀이터아이가.”
“스님은 좋으시것네예. 온 데 맘껏 놀 수 있어서예.”
“…….”
“스님. 그리 놀모는, 부처님이 이제 고만 놀고 염불하라고 안 부릅니꺼?”
“이 눔아, 내 염불은 붓 가지고 노는 기다.”

남해 망운사 오르는 길은 멀고 아득했다. 길은 외통수처럼 좁고 가파르고 길 양 옆은 키 큰 나무들이 치솟아 그 너머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가 싶으면 어느새 툭 트인 하늘이 눈앞을 차지하고 아래는 먼 산들의 능선들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한 구비 돌 때마다 하마 일주문이 나오나 목을 내뺐지만 드문드문 서있는 작은 표지판은 화살표와 함께 더, 더 가라고 할 뿐.

단정한 일주문이 보여 다 왔다 했는데 대웅전은 보이지도 않고 길이 계속이었다. 다시 길을 따르니 오래된 돌계단과 돌문이 나온다. 아, 망운사.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사진제공 조경국

금당갤러리에는 분타리카 꽃 그림자 하늘거리고

아뿔사, 문 앞 댓돌에는 이미 신발이 여러 켤레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선약을 했었지만, 성각 스님은 먼저 온 불자들과 얘기를 나누시는지 두런두런 목소리가 멈췄다 이어졌다. 어찌해볼 요량도 없이 경내를 휘 돌던 우리 일행은 종각 옆 건물로 들어섰다.

선서화 수십 점이 전시된 갤러리, 아니 부처가 연화대좌하고 있는 금당이기도 했다. 첫 발을 들이는 순간, 눈을 가득 채우는 건 수묵의 작품들이었다.

‘산승’은 돌아앉아 있었다. 묵언수행의 담담함과 고즈넉함이 그 어깨에 오롯이 남아있었다. 암자는 깎아지른 산꼭대기에 숨어있어, 사람들은 먼 곳에 있고 산승의 불경 소리만이 골짜기를 따라 흘러나오는 듯했다. ‘산심’, ‘무심’은 ‘불심’이었고, 산승이 ‘참나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아스라했다. ‘기우귀가’, 동자는 흰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분타리카’ 피어, 3천년마다 한번 씩 피는 이 꽃은 수백의 꽃 이파리로 세상의 그늘을 덮고, ‘진여, 분타리카와 진공묘유의 세계’에서 동자는 평화롭고 천지만물은 그윽하였다. 여기에 ‘관음보살 8곡병’, 관음보살은 때론 구름을 타고 용을 타고 때로는 바위에 앉아 중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려서 열매는 저절로 익으리라’던 달마대사는 ‘무심’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갤러리 안은 고요했다. 하지만 화선지 안에서는 천진스런 동자들이 놀고 있었다. 우담바라와 함께, 복돼지와 함께, 그도 아니면 두 동자가 그저 마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성각 스님의 글과 그림들이었다. 산승도 동자도 모두 성각 스님이었고, 모두 망운사를 찾는 불자이기도 했다.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사진제공 조경국

이현세와 겨루던 만화가 지망생

“나는 남해 창선이 고향인데, 방앗간집 아들이었어. 초등학교 3학년까지 거기서 다녔지. 초등학교 3학년 때 창선에서 배를 타고 부산엘 갔는데, 거기가 극락 같았어. 세상에 이런 데가 있구나 싶은. 그 후부터 출가할 때까지 줄곧 부산에서 학교 다니고 살았어.”

몰려온 불자들과 점심 공양을 끝내고 일주문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온 성각 스님은 보이차를 내밀며 벌써 이야기를 꺼내어 놓았다.

참말 다행이다 싶었다. 어려운 법문이나 화두로 시작되면 은근 강짜를 부릴 심사였던 지라, 술렁술렁 주워 넘기는 스님의 이야기는 달착지근했다.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사진제공 조경국

“나는 어렸을 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우연히 산을 그리는데 초록색이 참 좋아, 푸른 산을 가득 그리곤 했어.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 제일로 좋아하는 게 만화였거든.”

단박에 이해되는 듯했다. 선서화라 해서, 화두로 가득 차 그림의 의미를 곰씹고 또 곰씹어야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성각 스님의 선서화가 왜 어린 아이처럼 맑고 그토록 투명하며 밝은 기운으로 가득했는지를.

이 스님, 달랐다! 지금껏 몇 뵀던 스님들은 출가 전 속가 이야기는 밝히고 싶지 않은 듯 띄엄띄엄이었는데, 성각 스님은 어린 아이마냥 그 시절로 돌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뚜르르 꿰어가고 있었다.

“틈만 나면 만화방에 처박혀 만화책을 보고 또 보고 했지. 그때 만화가 손의성 선생의 주인공 '혁'이 나오는 만화는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혁이 일본 긴자 동경 사거리에서 옷깃을 날리며 악당들과 싸우는 장면들은 그냥 마구 빠져드는 거지. 오명천 무협만화, 김태곤의 '보리밥' 등 그때 내가 보고 또 본 만화책들이지. 그걸 열심히 따라 그리기도 했어. 내가 봄매화를 좋아해서 '매화클럽'이라는 만화동호회를 만들기도 했지. 그때 손의성 선생 만화책에 독자투고도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한국 만화계의 대표인 이현세 씨가 나랑 1, 2위를 다퉜어. 나는 주로 신비물과 무협만화를 많이 그렸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선서화를 그리는 성각 스님이 만화가였다니,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만화작가로도 수 년 동안 서울에서 부산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어른들은 빌어먹는 거라 해서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안 좋아했어. 그땐 음악하면 딴따라, 그림하면 환쟁이라 해서 전부 광대 취급했으니까. 근데 결국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 인연이라는 게 참 어찌할 수 없는 거지.”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사진제공 조경국

재미있다, 이 스님. 속가 이력이 흥미로웠다.

“지금은 만화를 그리지 않지만, 죽기 전에 대 역작을 한 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자신의 알에서 깨어날 수 있는 그런 스토리를 생각해보는 거지.”

영원한 대자유인을 꿈꾸며

성각 스님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들을수록 같이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쫀득쫀득하니 찰기가 있었다. 손짓을 하거나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엮어가는 품이 조선시대 장이 서는 마을마다 길목에 앉아 책 속 이야기 한 자락에 엽전 몇 푼 받던 전기수 같기도 했다.

“부산 살던 시절, 어머니는 양산 내원사에 곧잘 가셨어. 20대 후반부터 어머니 뒤를 따라 다녔지. 근데 염불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참 낭랑하게 들리고 목탁소리가 언젠가부터 마음으로 들어왔어. 어떤 음악도 그 음을 내지 못하겠더라고. 누구를 부르고 기다리는 듯한, 그리워하는 듯한. 그대로 빨려들었지.”

그래서 출가하게 됐을까. 젊은 시절 열에 둘은 절이나 교회, 성당을 찾아 수행자가 되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수행자가 되는 이는 흔치 않다.

“30대 초반에 산이 좋아, 이 산 저 산 다니는데 계속 산을 동경하고 있더라.”

어느 새 성각 스님은 가없이 맑고 단아한 납자가 되고픈 마음을 품게 되었다. 나고 죽음이 없는 도리를 체득하고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출격장부(出格丈夫)가 되고 싶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자신했다. 성각 스님은 부처님처럼 살고 싶었다.

산승의 인생은 글과 그림으로 익어가고

“당시 내가 여기 왔을 땐 망운암이었어. 낡고 협소해서, 보잘 것 없었어. 근데 고즈넉하니 주변 풍광을 잘 보존하고 있었지. 딱 보자마자 ‘내가 있을 터’라는 생각이 들었어.”

몇 해 동안 남해 화방사에 머물던 성각 스님은 곧장 망운암으로 올라왔다. 망운암은 덤불에 덮인 산길을 1시간 여 걸어가야 했다. 성각 스님은 길을 가는 게 좋았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게 좋았을 거다.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다 보면 꽃들이 있어 좋고, 햇볕이 있어 좋고, 바람이 달빛이 있어 마냥 좋았을 거다. 성각 스님은 천진불 선재동자의 마음이 되어 길을 나섰던 것이다.

꿈길을 들어선 듯, 그렇게 길 아닌 길을 걸어들어 온 성각 스님은 그 길로 망운암에 계시던 병약한 노스님을 꼬박 3년 동안 모셨단다.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사진제공 조경국

“인연이 묘하더라. 전생에 빚이 없으면 힘든 일이었지.”

암자를 내려간 노스님이 돌아가신 뒤 젊은 성각은 먼저 길을 닦고 가람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길이 제대로 없어 불자들이 오기 힘든 곳이었어. 그래, 길부터 내기로 했던 거지. 근데 그게 맘대로 쉽지 않았어. 다행히 어느 보살님 덕으로 잘 됐지. 길을 내니 전기나 전화는 아주 수월하게 되더라고. 내가 30대 중반부에 들어서서 불사를 시작했으니, 불사와 인생이 같이 익어간 거지.”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사진제공 조경국

성각 스님은 새벽예불을 마치면 하루 종일 밖에서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급히 서두를 것도 없지만 굳이 다리 펴고 쉴 일도 없으니 해가 저물도록 홀로 암자 주변의 터를 넓혀나가고 돌을 골라내고 풀을 매었을 것이다.

“선서화도 그때부터 시작한 거지. 일하다가 허리 한 번 펴고 먼 산을 내려다보면 눈 끝에는 바다가 머물고 그 위로 저절로 그림이 그려졌어. 굳이 붓을 들고 화선지 앞에 앉지 않아도 산이며, 산사가 먹빛으로 그려졌지. 눈앞에서 우담바라가 피고, 동자승이 선명해졌어. 눈으로 내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었지. 그러다가 저녁공양 끝내면 혼자서 또 밤늦도록 그려대는 게지. 파지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어.”

성각 스님은 ‘봄에는 꽃이 좋아 여름에는 바람이 좋아 가을에는 달빛이 좋아 겨울에는 흰 눈이 좋아’ 그렇게 선서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30여 년 동안, 성각 스님의 수행 생활은 ‘무심’을 좇아 글과 그림으로 짓는 참 행복한 불사였다고.

날은 축축해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아우성치는 눈발이 자꾸 눈앞을 가렸다.

망운사를 나서기 전, 성각 스님은 정좌하고 붓을 들어 산인 듯, 돌아앉은 수행승의 모습을 화선지 위에다 끄집어 내놓았다. 전광석화, 순간 달빛을 베는 무림고수의 칼끝이지 싶었다.

열린 입을 채 닫지도 못했는데 방문이 살큼 열리더니, 문틈으로 백발의 고운 노인이 수줍게 좀 도와달라고 했다. 밖엔 흰 눈발이 아우성을 쳤다. 앞산은 더욱 아득해지고 바람은 추녀 끝 풍경을 정신없이 두드려댔다.

“눈에, 소금 가마니가 젖으모는 안…….”

마당 귀퉁이에 있는 소금가마니를 안으로 들여 달라는 청이었다.

그랬다.

꼬부랑꼬부랑거리며 마을에 닿으니 거짓인 듯 하늘이 말갰다. 마을의 담벼락위로 오후의 느린 햇볕이 검실검실 넘어가고, 나른해지는 게 마치 낮꿈을 꾼 듯했다.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 스님./사진제공 조경국

남해 망운사. 그곳에는 행복한 산승이 살고 있었다. 현세에 사는 건지 선계에 사는 건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스님, 성각 스님. 오른쪽 눈썹이 하얀 산승은 천지만물 위에 그리움으로 기다림으로 따뜻한 묵향 풀어내며 열반을 꿈꾸고 있더라.

<성각 스님 프로필>

글과 그림으로 30여 년 간 수행생활을 해왔으며, 대중 친화적인 선서화로 이미 널리 알려진 분이다. 1995년부터 부산문화방송 8.15 50주년 광복기념일 초대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0여 회의 초대전을 열었고, B.S.T 국제미술교류전에 30회 가까이 참가했다. 부산문화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국회방송에 방영이 되기도 했다.

KNN, 불교방송, 부산일보 등 여러 방송과 신문을 넘나들며 지금도 활발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선학과 졸업, 동 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불교미술학과 졸업, 원광대 명예문학박사, 동아대 명예철학박사, 만화작가 및 문학시인, 국제펜클럽회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선예술의 이해>, <한용운의 채근담>, <만공스님의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산사에서 들려오는 소리>, <성각 시집 어느덧 내 모습 산이 되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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