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15) 경북 김천시 개령~구미시 안곡역

◇개령 가는 길 = <여지도서>, <해동지도>, 개령현지도(규10521 v.4-9), <대동여지도> 16-3 등의 고지도에는 옛길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지난번에 지났던 부상역과 갈항현을 넘고 감천(甘川)을 건너 남수(南藪 : 개령현 남쪽에 있는 숲이라 그리 불렀다)와 유산(柳山) 사이로 길을 잡아 양천역(楊川驛)을 거쳐 복우산(伏牛山) 동쪽의 우현(右峴)을 넘습니다. 우현은 개령에서 선산으로 가는 오른쪽 고개라 그리 불렀습니다. 달리 개령현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아 감문산 봉수 서쪽을 지나 좌현(左峴 : 우현의 서쪽 고개)으로 복우산을 넘는 길도 있지만 이 길은 개령에서 곧장 안곡역으로 이르는 지름길로 성주-부상역 루트와는 별개입니다.

송북리에서 본 우현(右峴 : 이태재). 멀리 사진 위쪽 가운데로 보이는 고개. /최헌섭

오늘은 아포읍의 국사리 길못에서 북쪽으로 나섭니다. 길못에서 4km정도 지나 공쌍마을에서 강 건너 개령면 태촌리 이천마을을 잇는 다리로 북천(北川)을 건넙니다. <대동지지>를 토대로 하면, 부상역에서 30리를 지나 북천을 건너게 됩니다. <대동여지도> 16-3에는 북천이라 적고 개령현 바로 아래에는 감천(甘川)이라 적었습니다. 아포의 북쪽을 흐르는 내라 그리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감천이나 북천은 우리말로 북쪽에 있는 내를 이르는 '달내'를 한자를 빌려 적은 것이니, 이곳에서 감천을 일러 신을 이르는 옛말 감 가마와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은 재고해야 할 듯 싶습니다. 내를 건너 서쪽으로 가면 머지않은 곳에 개령이 있고 동쪽에는 양천역(楊川驛)이 있던 양천리 양천마을이 나옵니다. <대동여지도>16-3에는 양천역 근처까지 가항천(可航川)으로 그려져 있어 역의 이름은 배를 대는 내란 뜻의 '버들내'를 한자로 적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동지도>에는 내를 건넌 지점에 풍영정(風詠亭)이 있었다고 나오고, 옛길은 거기서 동쪽으로 진행하여 선산에서 오는 길과 만나 북쪽으로 진행합니다. 지도에는 이곳에 진장(陣場)이 있다고 했는데, 선산과 개령 성주를 잇는 교통의 결절지점이라 장이 섰던 것으로 보이고, 진은 나루 진(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를 건너면, 이즈음에서 서남쪽으로 개령면 소재지까지 이어지는 북천 가에는 남수(南藪)라는 호안림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남수는 <여지도서> 개령현 산천 신증에 '관아의 남쪽 2리에 있다. 사예(司藝) 김숙자(金淑滋)가 현감이 되었을 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관아를 따라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였다. 덕분에 읍터의 홍수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개령현 관아 남쪽에 있는 숲이라 그리 불렀을 터이고, 점필재의 아버지 김숙자가 개령현감이었던 때가 1450년 무렵이니 연륜이 만만찮음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개령숲이라 불리던 왕버들 위주의 호안림이 있어 학생들 소풍 장소로 즐겨 이용되었다니 성주의 성밖숲과 경관이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북천 가에서 순변사 이일(李鎰)이 주변서 모은 민군(民軍)과 서울서 데려 온 장사 등 800~900명을 데리고 진법을 훈련하기도 했는데, 조총으로 무장한 적의 기습을 받아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로 달아났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적은 이미 이때 개령을 지나 장천(長川 : 상주시 낙동면에서 북으로 흘러 낙동강에 드는 하천)에 둔을 치고 있었으니 척후병을 활용하지 않은 이일은 낌새조차 못 채고 궤멸했던 것입니다. 옛길 가에 있던 유산은 <여지도서> 개령현 산천에 '관아의 동쪽 2리에 있다. 감문산에서 떨어져 나온 산줄기이다. 감천이 유산 아래로 지나간다'고 했으니 옛길은 관아의 동쪽으로 열렸습니다.

   
 

◇안곡역 가는 길 = 북천의 개령 쪽 마을은 태촌리(台村里 : 배시내)이고 윗마을은 성촌리(城村里)인데 성촌리에 있는 태성산성(台星山城)에서 마을 이름이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동여지도> 16-3에는 감문산 봉수와 태성산성 사이로 옛길이 있습니다. 예서 외현천을 따라 난 길을 잡아 북쪽에서 복우산(지금 우태산) 서쪽의 우현을 넘어 안곡역으로 이르는 노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태성리를 지나 새터에서 명천에 이르는 중간 즈음의 갈림길에서 오래된 느티나무를 지나 외현천을 거슬러 오르면 감문면 소재지에 닿습니다. 삼한시대 개령면 일원까지 걸쳐 있던 감문국(甘文國)의 중심지로 231년에 신라 장군 석우로(昔于老)에게 정벌당했고 557년 감문주(甘文州)가 되었습니다. 석우로는 신라 왕족으로 주변 소국을 정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명장이었으나 치명적인 설화(舌禍)로 비극적으로 죽은 인물입니다.

통영로는 예서 지방도 913번과 만나는데 지방도를 버리고 하천을 따라 오르는 길이 옛길입니다. 이번에 다시 답사를 했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서설(瑞雪)을 밟으며 옛길을 걷는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되어 더 없이 즐거운 여정이 되었습니다.

감문면 소재지를 지나 삼성리에서 금곡리 가메실로 이어지는 길가의 마을 들머리에는 연자매를 마을 표지석으로 삼은 곳이 많습니다. 고개 아래 끝 마을인 송북리 송문마을 동쪽 골짜기를 거슬러 이르는 분수계가 바로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우현(右峴)입니다. 지금은 이태재라 부르는 이 고개를 내려서면 머지않은 곳에서 곧바로 안곡역과 안곡원(安谷院)이 있던 안곡리에 듭니다. 안곡역 옛터는 옛 안곡초등학교 일원으로 비정되는데, 이리로 이르는 옛길은 무을저수지에 잠겨 버렸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안곡역을 지나던 옛길이 잘 남아 있었는데 이즈음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수장되었다고 합니다. 안곡역은 개령 양천역과 상주 청리역을 이었습니다. 안곡은 우리말로 안골 안실인데, 골 안쪽에 깊숙이 들어 있어 그리 불렸을 것입니다. 교통 요충지로 성황을 이루어 1960년대에는 안실 마을에 마방(馬房)까지 운영하였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이밖에도 안곡역 시절을 헤아릴 수 있는 자료가 더러 있는데, 안곡1리 마을회관 앞에 2008년 복원된 우물과 마을 입구의 서낭당과 느티나무로 구성된 마을숲입니다. 역터에서 수다사로 향하는 닥밭골(저전 : 楮田)에는 광서(光緖) 15년(1889)에 명정된 효자 김광택(金光澤)의 정려비와 비각이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줍니다.

닥밭골은 묵밥이 꽤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안곡역 닿았을 즈음이 점심 무렵이라 우리는 여기서 길손의 한 끼 식사로는 모자라는 묵밥을 급히 말아먹고, 상송리 수다사(水多寺) 쪽으로 고개를 넘을 작정을 합니다. 안곡역을 지난 옛길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송정지를 지나 연악산(淵岳山) 수다사 방면으로 오르는 옛길은 임도로 모습을 바꾸어 문경으로 길을 대고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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