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시민운동과의 대화-장계석·남애경·설미정

<피플파워>가 경남지역의 시민운동가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바로 ‘주민공동체’입니다. 주민들 스스로 자기 지역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시작된 이 운동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요? 사업 내용도, 성격도 다르지만 크게 보면 지향하는 바가 모두 같은 단체의 대표자들입니다. 장계석 경남정보사회연구소장, 남애경 푸른내서주민회 대표, 설미정 ‘꽃들에게 희망을’ 희망지기가 주인공입니다.

경남·창원은 주민공동체운동에 관한 한 전국에서 가장 앞서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994년 설립된 경남정보사회연구소는 지역·마을에 기반을 둔 ‘도서관 건립운동’을 전국 최초로 시작해, 역시 전국 최초로 창원시를 ‘도서관(평생교육센터)의 도시’로 만든 주역입니다.

남애경 푸른내서주민회 대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리에 자리 잡고 있는 푸른내서주민회는 경남을 넘어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단체로, 주요 언론에서 주민자치운동의 ‘모범 사례’로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창원시 사파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봉사단체인 ‘꽃들에게 희망을’은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운영구조를 갖고 있는 단체입니다.

예정된 난관, 길바닥에 나앉을 뻔하기도

그래서일까요? <피플파워>가 이제껏 만났던 시민운동가와 달리 이들 단체 대표자는 비교적 밝은 분위기에서 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설미정(42) ‘꽃들에게 희망을’ 희망지기는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 중 하나는 ‘재미’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할까, 사고 칠까, 함께 즐겁게 놀까 많은 사람이 열심히 궁리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꽃들’은 특이하게도 대표-사무국장-간사 같은 위계구조가 따로 없으며 모든 구성원이 그저 ‘희망지기’일 뿐입니다.

살림이 넉넉해서, 혹은 회원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희망과 재미를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설미정 씨는 지난 2000년 단체 결성 후 단 한 번도 상근 활동비를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처음엔 사무실조차 없어 다른 시민단체에서 더부살이를 하거나 길바닥에 나앉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설미정 ‘꽃들에게 희망을’ 희망지기.

1998년 문을 연 푸른내서주민회도 불과 4년 전에 지금의 사무실과 유급 상근자(1명)가 생겼습니다. 그전까지 주민회 산하 각 동아리들은 모임 공간을 알아서 찾아야 했습니다. 필요한 물품도 이곳저곳에서 빌려다 쓰기 일쑤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요 활동가들의 희생과 헌신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홀로 40여 명의 회원(현재 총 250여 명)을 가입시킨 남애경(48) 주민회 대표 등의 ‘괴력’이 없었다면 주민회는 현재처럼 안정적 모습을 갖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민회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와 참여는 여러 측면에서 확인됩니다. 2006년과 2010년 주민회 사무국장 출신의 송순호 씨가 마산시의회·창원시의회에 연속으로 진출한 사실이 그렇습니다. 주민회가 매해 여름 개최하는 푸른내서문화제는 1주일 동안 연인원 7000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내서읍의 대표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꽃들이 매달 저소득층 110가구에 쌀을, 매주 28가구에 밑반찬을 지원하는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결성 초기 설미정 씨를 비롯한 ‘언니들’의 악착같은 활동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끈질기게, 될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해 돈 있는 사람은 돈을, 정육점 주인은 고기를, 방앗간 주인은 떡을, 트럭 운전사는 운송을,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몸’을 지원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어려운 가정을 찾아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해온 설 씨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는 게 있으면 이를 나누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걸 좀 더 짜임새 있게, 재미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면서 “각자 스스로 ‘주체’로 느끼게끔 운영하고 챙기고 소통한 것도 꽃들이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안 될 때는 막 덤비고 협박하고 그러기도 한다”며 웃기도 했습니다.

도서관은 도서 보급처가 아니다

장계석 경남정보사회연구소장.

장계석(49) 소장이 이끄는 경남정보사회연구소는 이 두 단체에 비해 고민이 좀 많은 편이었습니다. 언뜻 단체명 등만 보면 주민공동체운동과 무슨 상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연구소가 주력해온 ‘도서관’은 그냥 도서관만 뜻하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도서 보급처가 아니라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논의하는 자리로, 우리의 마음을 주고받는 터전으로 마을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도서관운동의 핵심 목표입니다. 마을도서관은 ‘사회교육센터’를 거쳐 ‘평생교육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현재 (구)창원시 모든 동에 하나씩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중·후반 전성기를 누렸던 이 운동은 2000년대 들어 시련에 부닥친 상태입니다. 협조 관계를 유지했던 자치단체장이 바뀌고 당시 행정자치부가 ‘주민자치센터’ 설치와 관련한 조례를 만들면서 갈등과 혼선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이 없고 운영 주체만 다를 뿐, 주민자치센터와 마을도서관(당시 사회교육센터)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어 창원시가 2005년 평생학습도시 정착을 위한 교육센터 관련 조례를 제정하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후 도서관은 다시 ‘평생교육센터’로 명명됐는데, 마을도서관, 사회교육센터, 주민자치센터, 평생교육센터, 평생학습시설 등 용어 자체부터 뭐가 어떻게 다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계석 연구소장은 이와 관련 “복잡한 용어상 혼란도 문제지만, ‘민’에서 ‘관’ 주도로 바뀌면서 애초 지역공동체운동으로서 취지가 퇴색된 게 보다 심각하다. 주민자치센터든 평생교육센터든 전문성 없는 관변단체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만날 노래교실, 스포츠댄스 같은 취미 위주 프로그램만 운영되고 있으며 민주시민으로서 소양을 쌓을 수 있는 교육 등은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합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강좌·답사·체험·탐방 등 알차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많이 갖추고 있는 연구소이지만, 현재 창원시 26개 전체 평생교육센터 중 위탁 운영하는 곳은 단 4곳뿐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좋았던 시절만 추억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장 소장은 “연구소는 지금 ‘과도기’를 경과하고 있다. 어떻게든 다른 형태로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라고 토로합니다.

연구소가 새로운 돌파구로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이른바 ‘대표 도서관 설립 운동’입니다. 장 소장은 “대표 도서관은 평생교육센터 등 도서관 정책 전반을 관장하는 일종의 ‘허브’,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소개하면서 “각 도서관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고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지 이끌어주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방의원들에게 토론을 제안하고, 관련 법과 조례 제·개정 운동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정치 색깔’ 뚜렷한 주민단체 괜찮을까?

푸른내서주민회 역시 경남정보사회연구소처럼 단체의 진로 ‘전환’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주민들 스스로 힘으로 지역 현안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해도 해도 안 되는 거대한 장벽 같은 게 있었던 것입니다. 남애경 대표의 말입니다.

“우리는 내서IC 통행료 징수 반대, 예비군훈련장 이전 반대, 골프연습장 건설 반대 등 지역민의 이해에 반하는 사안에 적극 목소리를 내왔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사안이 터진 후, 싸우고 천막농성도 해보고 그랬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제대로 된 지역공동체를 위해선 ‘뒷북’이 아닌 ‘선도’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건 그즈음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오랫동안 주민회 사무국장을 맡아 일해온 송순호 씨의 2006년 지방선거(마산시의원) 출마와 당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난해 8월 푸른내서주민회 회원들이 마산회원구 내서지역 자전거도로 모니터링을 위한 행사를 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양날의 칼’과도 같았습니다. 주민회가 특정 정당과 가깝다는 오해(?)가 퍼지면, 주민들 참여 폭 확대에 큰 지장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송순호 전 국장은 당시 민주노동당(현 통합진보당) 후보로 선거에 나섰습니다. 남애경 대표는 이에 대해 “주민회가 곧 민주노동당 아니냐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민회가 민주노동당에 들어간 게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관련된 사람이 주민회를 이끌었을 뿐이다. 우리가 진보적 색깔이 있는 건 맞다. 그래서 멀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겪어보면 진실을 알게 된다. 처음엔 껄끄러워하다가 나중에 주민회에 가입하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경우도 적지 않다. 송순호 의원 때문에 주민회와 민주노동당을 좋아하게 된 사람도 많다. 또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주민과도 아무 문제 없이 소통하고 있다.”

주민회는 심지어 MB악법 반대, 사립학교법 반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마산민중연대 활동 등 주요 쟁점에 대한 ‘선명한 입장’도 자주 발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23일에는 경남교육청의 고입연합고사 부활 방침을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처사”라고 성명을 통해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남 대표는 “주민회라고 지역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 삶과 연관된 문제라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희망지기들이 저소득층 가구에 보낼 밑반찬 등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생각도 열리기 마련

하지만 설미정 희망지기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설 씨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안이라면 모를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알림’이지 ‘선택’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를테면 복지혜택으로부터 소외된 빈곤층 문제 등을 소개하고 지원을 호소할 수는 있지만, 정책적·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설 씨는 “꽃들에게 희망을에는 다양한 종교, 정치색을 가진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며 “따라서 진보-보수 간 첨예한 정책이슈 등에 대해선 나 자신을 포함, 우리 단체의 입장 같은 건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꽃들과 푸른내서주민회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주민공동체를 지향하긴 하지만, 한 곳은 사회봉사에, 다른 한 곳은 지역현안 해결, 주민교육에 중점을 둔 단체이니까요.

스스로 진보적 색채가 분명하다고 한 설미정 씨 또한 꽃들이 무조건 중립을 지켜야 한다거나, 희망지기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자기 노동, 자기 시간, 자기 재산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열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서로 성향은 다르지만, 함께하면서 느낀 서로에 대한 믿음, 일관된 모습 같은 것들이 개개인의 시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진보 쪽 흐름, 분위기를 의외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과거처럼 억지로 ‘의식화 교육’ 같은 거 한다고 생각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세 단체 대표자들과 대화 내용을 정리하면서, 각 단체가 주민조직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 하나씩은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알차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노하우 등 주민교육 역량이 풍부한 경남정보사회연구소, 회원들의 활발한 참여와 수평적 소통구조를 자랑하는 꽃들에게 희망을, 지역현안 해결과 각종 동아리 모임 운영 등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앞장서고 있는 푸른내서주민회…. 물론 모든 걸 다 갖춘 주민조직은 존재하기 어렵겠죠?

경남정보사회연구소는 시민단체 ‘중간지원센터’ 역할도 지향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경남도청 인근에서 열린 ‘경남NGO박람회’는 연구소의 제안으로 개최된 것이다.

독자님들 생각은 어떤가요?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주민조직이 자기 동네에 있다는 것, 이건 반가운 일이 아닐까요? 주민들 스스로 공부하고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나누고 봉사하는 분위기를 싫어하는 부류는, 오직 무언가 속일 것이 많거나 주민들에게 감추고 싶거나 몇몇 소수 마음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싶은 그런 사람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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