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진주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 만드는 '문화개척자'

동글동글한 계란형 얼굴, 서글서글한 눈매, 거무튀튀한 피부에 언뜻 보기엔 장난기 어린 얼굴. 하지만, 낮고 굵직한 목소리, 조분하면서도 부드러운 서울 말투에서 나오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지역문화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꿀 비전이 쏟아져 나온다. 전문예술법인 극단 현장 고능석 사무국장. 편집장이 내린 창원 인근 근거리 취재 지시에도, 내가 진주에 있는 그를 찾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다른 지역에선 보기 드물게 예총·민예총으로 구분되는 문화예술단체의 경계를 넘어 지역 실정에 맞는 새로운 문화 생산과 공급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결과를 거침없이 실천하는 '문화개척자'의 면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본디 예부터 지명에 '볕 양'(陽) 자가 든 고장이 강을 낀데다 해가 잘 들어 곡식이 잘 여물고, 살기 좋다고 했다. 곡식이 잘 여무니 생산량도 많았고, 곡식이 많으니 배를 주리는 사람 역시 다른 지역보다 적었을 터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일찍이 풍류와 멋을 알아 다양한 문화예술의 향취를 누리고 살았다고 전한다. 대표적으로는 한양(漢陽)을 들 수 있을 것이고, 경남으로 보면 '진양'(晉陽)과 '밀양'(密陽)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두 도시에 각각 조선시대 3대 누각으로 손꼽히는 '촉석루'와 '영남루'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주 문화는 그렇게 잘 형성된 환경적 토양 아래 성장해 왔다. 현재 진주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단체들만 봐도 여느 타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유지·운영되고 있다. 진주를 기반으로 사천과 창원에 각각 공동창작작업장과 사무실을 둔 '큰들문화예술센터'를 비롯해, 역시 진주를 기반으로 성장해 서울에 진출한 국악그룹 '들소리' 등등이 그 면모를 잇는 중이다. 게다가 지난해 제61회를 맞은 진주 '개천예술제'는 지금은 전국 지역마다 열리는 문화예술대제전의 효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주의 문화적 토양을 뒷받침하는 큰 주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문예술법인 극단 현장'이다.

고능석 전문예술법인 극단 현장 사무국장./김구연 기자

진주 극단 현장에 들다

'극단 현장'은 지난 1974년 8월 30일 설립됐다. 이희대, 모왕갑, 손정수, 김용우, 황금, 서영수, 정대영, 김형규, 조희래, 조구환 등 17명의 창단 멤버로 시작한 극단 현장은 같은 해 만들어진 경상대학교 극예술 연구회를 주축으로 한 '경상극회'와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경상극회'에서 배출된 인력들이 극단 현장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당시 극단 현장은 전업 연극 단체가 아니었다. 단지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연극을 만들고 공연하기를 즐기는 '연극 동호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를 '전문 연극 단체'로 발돋움시킨 주축 가운데 한 사람이 고능석 사무국장이다. 그 역시 경상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출신으로 지난 1994년 대학 4학년에 막 올라서면서 극단 현장에 들어갔다. 그때 조구환(현 극단 현장 상임연출가), 이훈호(현 사천 극단 장자번덕)와 함께 뜻을 맞춰 극단 현장을 한 차원 더 상승시켰다.

그는 1987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극을 가까이 접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가자마자 동아리를 물색한 그는 1학년 초반에는 풍물패와 연극을 두고 고민했단다. 그러나 운동권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 고등학교 선배들 이야기와 막연한 두려움에 동아리 가입을 미루다, 2학기에 들어서야 극예술 연구회로 방향을 정했다.

이렇게 연극에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그만의 독특한 집안 내력(?)이 작용했다. 진주 문산읍 상문리 상이마을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는 고 국장의 할머니는 진주 내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무당이었단다. 돌아가신지 오래인 지금까지 할머니의 용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이름을 날린 무당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연극을 하는 그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가 시켜서 한다"고 농 아닌 농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의 내력뿐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타고난 예술적 감각도 있었단다. "마을에 보면 '장고계'라는 것을 했어.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 온 동네를 돌면서 장구를 쳐주고 그 대가로 마을 사람들이 장구에 돈을 꽂아 주고 그런 거지. 그 돈으로 장구 치는 사람들끼리 놀러도 가고 그랬어. 장구 치고 북 치고 할 때 내가 거기 들어가서 막춤을 추고 놀았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면 아지매들이 잘한다고 좋아하고. 그런 끌림이 있었던 거지. 예술을 하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제법 있다고들 하더라고. 그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푸는 거지. 나는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지만."

초보 배우에서 전국연극제 대상까지…

고능석 전문예술법인 극단 현장 사무국장./김구연 기자

전문 연극 단체로 발돋움한 극단 현장은 연출 능력을 갖춘 전문 배우 양성이 절실했다. 이에 극단 선배들은 젊은 후배들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자 자비를 들여 서울로 유학을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고 국장은 극단 이훈호 선배와 함께 서울 공연예술아카데미로 유학을 간다. 그는 그곳에서 2년 동안 수학하며 연기·연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을 쌓았다. 오전 세 시간, 오후 세 시간 실습 위주로 이루어진 커리큘럼에 지칠 법도 했지만, 극단의 항상적 존립을 위해서라면 달게 삼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를 시켜야 했다.

서울에서 공부는 큰 도움이 됐다. 다시 진주로 돌아온 해인 1997년 자신이 출연한 연극 <불의 가면>(작 이윤택·연출 조구환)이 제15회 전국연극제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연기상을 받으며 배우로서 입지를 탄탄히 한다.

전국연극제 대상 이후 그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극단 현장이 전국연극제에서 자신이 쓴 작품 <불의 가면>을 공연하는 것을 본 이윤택 연출가가 이 작품을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공연해 주기를 요청한 것. 극단 현장은 이에 부산에서 한 달 동안 작품을 올렸다.

이 사이 이윤택 연출가는 <불의 가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배우 고능석'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사람 욕심이 많은 이윤택 연출가는 한 달간의 공연이 끝나고 곧장 조구환 연출가에게 "능석이를 우리 연희단 거리패에 데려다 좀 쓰겠다"고 요청했고, 조 연출 역시 이를 승낙한다.

이로써 고 국장은 '연희단 거리패'의 일원으로 새로운 연극 인생을 살게 된다. 97년 하반기부터 98년 말까지 약 1년여 동안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오구>, <시골선비 오남명>, <파우스트>, <햄릿>, <눈물의 여왕>, <산넘어 개똥아> 등의 다양한 작품에서 주·조연으로 맹활약했다. 이 당시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한 번은 독일에서 <햄릿>을 공연하게 되는데, 내가 레어티즈를 맡았어. 레어티즈는 전통적으로 잘생기고 멋진 애들이 하거든, 근데 이윤택 연출이 갑자기 권력욕에 물든 레어티즈를 한 번 가자고 그러더라고. 그때도 내가 머리숱이 좀 없었거든(웃음).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햄릿 자체가 오필리어의 장례식장에서 결투가 이어져 다 죽거든. 그런데 거의 마지막쯤에서 내가 칼을 들고 햄릿을 찔러야 하는데, 칼이 없는 거야. 그래서 옆에 있는 스텝한테 (속삭이며) '칼, 칼, 칼' 이러는데도 칼이 어디에도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얘를 목 졸라 죽일까, 때려죽일까 오만 생각을 다하는데…. 순간 그때 무덤지기의 삽이 보이는 거야.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삽을 들고, 칼처럼 찌르는 시늉을 했지. 그리고 왕을 죽이러 삽을 들고 가는데, 그때 그 시간에 나중에 스텝이 칼을 찾아온 거야. 그러니까 왕 역할을 맡은 친구가 삽으로 내려치는 걸 막고, 속삭이면서 '야 칼 있다. 칼 있다' 말해주더라고. 그래서 다시 칼을 빼들고 왕을 죽였지. 그렇게 장면이 넘어갔어. 연극은 그렇게 끝났는데, 두렵지…. 소품도 제대로 안 갖추고, 예정에도 없이 삽으로 결투 장면을 했으니…. 그런데 화를 낼 줄 알았던 이윤택 선생이 막 좋아서 죽는 거야. '이게 연희단 방식이야~ 즉흥으로 응~ 캬~'이러면서 말이지. 그런데 그게 베를린 신문에 났어. 내용을 보니까 '총과 칼 그리고 농기구를 이용한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지금도 연희단에서는 '고능석의 삽'은 전설로 남아 있지."

그러나 고 국장은 연희단 거리패에 정을 두지는 못했다. 합숙 등 군대식 생활 패턴과 배우를 쥐어짜듯 가르치는 시스템이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내 몸이 안 맞더라고, 정서적으로도 안 맞고. 내 정서는 돌담길처럼 돌아가는 좀 따뜻하고, 곡선처럼 유한 편인데 거기는 직선적이고 상명하달식의 문화가 영 안 맞았어." 그렇게 그는 진주로 돌아왔다.

고능석 전문예술법인 극단 현장 사무국장./김구연 기자

'배우에서 기획자로' 극단 현장의 성장을 이끌다

다시 돌아온 그는 어느덧 극단의 중견이 되어 있었다. 작품 제작은 물론, 늘어난 단원들과 후배들을 챙기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대균 대표마저 진주MBC에서 중책을 맡게 되고, 또 노조지부장을 역임하면서 극단에 관심을 두기가 쉽지 않아졌다. 그래서 그는 지난 2005년부터 극단 내에서 '배우'보다 '기획자'로서의 역할이 더 커지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무를 맡은 후 극단 현장은 경남 연극계 전체가 부러워하는 극단으로 성장했다. "지원금이나 이런 건 다른 데나 우리나 거의 비슷해, 나는 그걸 의미적인 데서 많이 찾는데, (정)대균이 형님이 자기 돈을 많이 부었어. 그 영향이 큰 것이, 극단 내에서 나누고, 베풀고, 배려하는 마음들이 잘 흘러나왔고, 나도 그걸 다음으로 넘겨주는 것이 내 임무다 생각하거든. 그게 극단 현장을 이끄는 동력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역사성이랄까? 오랜 역사가 있다 보니 선·후배 탄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배경이지 않나 싶어."

그런 배경 덕일까? 극단 현장은 지난 2005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후원회원을 모집해 주변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회원 또한 60여 명이 넘는다. 또한, 상근 단원 10여 명을 고용해 매월 월급을 주는 시스템을 갖췄다. 경남 내 다른 극단에서는 아직 상상에 그치는 현실인데 말이다. 게다가 경남 내에서도 가장 크고, 시설이 좋은 소극장을 가지고 있다. 기존 영화관을 고친 소극장 '현장아트홀'은 무대의 넓이와 깊이가 클 뿐만 아니라 층고가 높아 조명을 활용하기가 수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00여 명이 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고능석 전문예술법인 극단 현장 사무국장./김구연 기자

새로운 문화 생산·공급 체계를 고민하다

이제 연극인으로서 고능석을 넘어 '문화개척자'로서 고능석 사무국장을 보자. 내가 그를 인터뷰 대상을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 여타 지역들은 예총·민예총 등으로 구분되는 문화단체라는 틀 안에서 지역의 문화예술이 형성된다. 그러나 고 국장은 이러한 틀을 깨고 어떤 단체들이든 지역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또 협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문화를 꼭 문화예술단체만이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넘어 시민단체 등과도 함께하는 논의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좀 더 지역민들이 원하는 문화 생산 및 공급의 포맷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다.

"나는 솔직히 예총 무용론자이고, 협회 무용론을 주장하는 편이다. 민예총도 예총에 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나 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야. 예총 자체가 워낙 관제 쪽에 물이 들어 있으니 거기에 대한 부정으로 만들어졌지만, (따로 단체를 만들어서 예총과 비슷한 문화 권력이 되기보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올곧은 생각들을 한 시민단체, 문화예술을 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함께하는 것이 옳다는 거지."

이러한 그의 생각은 올해로 4회째를 맞는 '골목길 아트페스티벌'로 이어진다. 골목길 아트페스티벌은 연극 단체, 음악 단체, 무용 단체 등 소위 문화단체를 넘어 댄스스포츠, 댄스학원 원장 및 수강생, 팬플룻 동아리, 지역 통기타 가수, 마임이스트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다. 특히, 별도 무대 없이 동네 골목 또는 대로변에 짧은 시간 내에 즉흥적으로 펼쳐지는 공연은 지역민들이 굳이 문화생활을 즐기러 소극장이나 문화예술회관을 찾지 않아도 되게끔 구성되어 있다. 축제 기간만큼은 지역 전체에 전반적으로 문화가 흘러넘치게 하는 것이다.

"골목길(아트페스티벌) 같은 경우도 앞으로 패러다임은 예총·민예총 싸움이 아니라 문화예술단체들이 함께할 때 생기는 힘을 잘 살리는 쪽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이야. 그러니까 극단 현장이 지역에서 연극이라는 울타리에 혼자 있으면 힘들잖아. 다른 많은 문화 장르들이 함께 있고, 함께 할 때 거기서 생기와 힘들이 모이지. 그럼으로써 문화가 상대적으로 더 발전한다는 생각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안 외로우려면 야들(다른 문화단체들)하고 함께해야 하는 거지. 씻고 벗고 예술가들이 세상하고 만나는데 우리끼리 안심하거나 또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야, 우리(문화예술단체)만의 문화가 아닌 수요자인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새로운 문화 예술의 틀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주시 문화예술진흥정책, 장기적 플랜 없어"

이런 문화예술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진주시의 행정이 아쉬운 부분도 있다. 지난해 전국체전 개최 이후 진주시는 문화예술진흥 부분보다는 체육관광 위주의 정책을 주로 써 왔다. 그래서 진주시립합창단, 소년소녀합창단이 해체되고, 각종 문화예술진흥 관련 예산들이 삭감돼 많은 진주시민과 문화인들이 시 행정에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봐 왔는데, 진주시 문화예술 행정은 도나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위원회 등 위에서 주는 것을 받아서만 해 왔지, 자체적으로 진주 문화정책이 어떻게 돼야 한다는 등의 장기적인 플랜을 세운 적이 없어. 그런 플랜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으니까 공무원들도 임기응변식으로만 일을 처리하니 자기들도 힘들고, 오해들을 많이 하지.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하지. 유등축제를 하니까 그런데 유등축제는 문화예술이 아니야 관광이지. 거기에 자기들은 문화예술에 굉장히 많이 투자를 한다고들 생각을 하지. 생활체육이 튼튼해야 국가대표 저변이 확대되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기초예술단체들이 활동을 잘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지.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개천예술제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던졌다. "그러니 개천예술제도 예년만 못할 수밖에 없는 구조지. 첫 출발은 좋은데, 이 시대에는 맞지 않거든. 경연이니 뭐니…. 그 속에 유등도 빠져버렸고. 예전만 해도 진주시민의 날과 개천예술제 종야축제를 할 때 '문산 줄다리기'라고 엄청난 두께의 줄 당기기를 했어. 큰 도로 하나를 그것을 하면 진주 시내가 들썩들썩했거든. 그런데 시장이 그걸 없앴대! 예총은 그걸 또 없애라 한다고 '예~'하고 없애고 말이야. 그런 게 살아있는 진주 문화인데 말이지."

진주에는 극단 현장 말고도 정말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으로 사랑받는 예술단체가 많이 있다. 앞서 설명한 큰들, 들소리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고능석 사무국장은 여기서 위안을 얻는다. "어찌 보면 그래. 진주에 있는 문화예술 하는 사람들이 지자체에서 별로 지원이나 신경을 안 써도 워낙 잘들 하니까, 지자체에서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어쩌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 덕이니까 좋게 생각하면 또 좋은 일이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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