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과의 대화] 한영수·박종훈·이춘모

<피플파워>가 경남지역의 시민운동가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첫 번째 '정치'에 이어, 두 번째 대화 주제는 바로 '시민운동'입니다. 시민운동가 스스로 말하는 시민운동의 현실, 과연 어떨까요? 어떤 곳에선 한숨 소리만 들리는데 또 어떤 곳에선 시민운동(또는 시민운동가 개인)이 크게 주목을 받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한영수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박종훈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이춘모 진해시민포럼 집행위원장이 주인공입니다.

얼마 전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박원순 서울시장을 정면 비판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강 교수는 월간 <인물과 사상> 12월호 '정치가형 시민운동가의 성공인가 : 박원순 현상의 명암'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박 시장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가 시민운동에 끼친 부정적 영향을 신랄하게 꼬집었습니다.

'협찬인생', '시민단체의 파쇼' 등 일부 과도한 표현이 거슬리긴 하지만, 시민운동의 현실과 관련된 평소 궁금증을 푸는 데 적잖은 참고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민운동은 망해도 시민운동 지도자는 흥하는 나라, 이게 대한민국인가?"란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글에 따르면, 시민운동가 출신인 박원순 시장의 모델은 '정·재계의 막강한 인맥을 활용한, 풀뿌리에서 출발하지 않은 톱다운 모델'이라고 합니다.

박종훈 경남민언련·마창진환경운동연합 대표./박일호 기자

강 교수는 "일반적인 시민운동가가 박원순처럼 정치적으로 탁월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면서 이 모델을 아주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이 모델은 후계자를 만들 수 없는, 재생산이 불가능한 모델이다. 시민운동을 정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에겐 좋은 모델일 수는 있어도 전국적이고 일반적이고 항구적인 모델은 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박원순의 서울시장 당선은, 한 시민운동가의 '개인 플레이' 결과일 뿐 시민운동 전반의 상황과 성과, 실력 등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해석으로 들립니다.

시민운동은 바닥인데 일부 시민운동가는 성공?

강준만 교수의 분석이 맞는 걸까요? 서울에서는 대표적인 시민운동가가 시장까지 올랐고 시민운동 세력이 정국의 중심에 섰다는 이야기가 시끌벅적하게 쏟아지지만, 경남지역 시민운동은 이전과 다름 없이 힘들고 또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박종훈 경남민언련·마창진환경운동연합 대표./박일호 기자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마창진환경운동연합 두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박종훈(52) 대표는 현 상황을 이렇게 '핵심 요약'합니다. "시민단체가 세상에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하는데, 희망을 주기에는 모두 너무 지쳤다. 활동비, 활동인력, 활동력 총체적 난국이다."

박 대표는 특히 민언련 대표로서 "미디어렙 문제, 마산·진주 MBC 통합 등 주요 이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실무자 2명으로 언론의 공정성을 지켜나가기엔 한계가 있다. 나 역시 대표로서 제 역할을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진주지역 시민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한영수(55)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진주YMCA 이사)의 진단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한 대표는 "시민운동 전반의 총체적 침체라고 할 수 있다"며 "진주·마산 MBC 통합 반대, 혁신도시 지키기 등 굵직굵직한 현안에 시민단체가 공동대응하긴 했지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공감과 참여가 안 보인다. 심지어 무시와 무관심마저 느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진주는 노동자 자주관리 형태의 버스회사(삼성교통·시민버스) 창립에 큰 역할을 하는 등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그 어느 곳보다 강했던 지역입니다.

시민단체, 어정쩡하게 관망만 하다간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일까요? 정권·자치단체와의 관계 변화, 관성적인 운동 방식, 활동가들의 헌신에 기댄 구조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영수 대표의 다음과 같은 분석이 특히 눈길을 끕니다.
"거대한 정치·사회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탓이 그 무엇보다 크다고 본다. 시민 대다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려 거기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시민운동은 경제적 문제든 의식이든 시민들의 삶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어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한영수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대표./박일호 기자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한 대표가 오래전부터 입버릇처럼 제기해온 화두입니다. 그는 "세계화가 무서운 힘으로 지역 구석구석까지 일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인간성과 공동체성의 파괴는 불 보듯 뻔한 일"이라며 "하지만 최근 월가 시위에서 나타났듯 이에 맞서는 반세계화 목소리 역시 거세지고 있다. 여기에 어중간하게 편승하거나 관망만 하는 시민운동은 더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한영수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대표./박일호 기자

시민단체는 그간 중립성·공정성을 주로 강조하며 '보다 분명한 색깔 드러내기'를 주저해왔습니다. 반세계화 문제뿐 아니라 선거 등 정치권 이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 공간의 분위기에서 알 수 있듯, 개개 시민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참여하는 시대입니다. 이전과 같은 시민운동의 모습은 우유부단하고 어정쩡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립성 탈피, 선거에 적극 개입하는 이유

최근 시민운동이 내년 선거와 야권 통합 등 정치 이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 흐름을 냉정하게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권 연대기구인 '경남 혁신과 통합' 공동대표를 지낸 박종훈 대표는 "우리 지역에서, 나아가 대통령선거에서 제대로 된 후보를 당선시키는 일이라면 단체든 개인이든 진보진영 모두가 정치적 득실을 떠나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대타협을 통해 시민들한테 카타르시스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긴다. 잘 안 되면 혼자서라도 몸부림치고 괴성이라도 지를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시민운동의 불모지'로 일컬어졌던 진해지역의 시민단체도 내년 총선에 공동대응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지난 11월 29일 출범한 '2012 진해시민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 이춘모(64) 진해시민포럼 집행위원장은 "잘못된 행정통합을 주도한 한나라당의 어부지리를 용납할 수 없다. 반드시 여야 1대 1 구도를 만들어, 독주체제를 막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통합 후 진해는 많은 걸 잃었다. 좋아진 게 없다. 진해시청은 선출직이 아닌 공직자가 근무하는 구청이 되어 버렸다. 서부상권은 문을 닫는 점포만 늘어간다. 우리는 통합 당시 끝장 토론과 주민투표를 주장했으나, 한나라당 시의원들은 이를 무시하고 중앙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강행했다. 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야권 시의원 후보가 7명이나 당선되는 등 한나라당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통합청사 진해 유치 등을 실현하려면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바꾸는 게 최우선이라고 본다."

이춘모 2012 진해시민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위원장./김구연 기자

지역 이기주의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하지만, 이렇게 자기 지역을 중심에 둔 주장은, 이른바 '지역 이기주의'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 역시 예외는 아닌데, 이춘모 위원장은 "진해·마산·창원 전체의 미래를 위한 대안 제시를 지역 이기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춘모 2012 진해시민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위원장./김구연 기자

"나도 그런 비판 듣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개적 자리에선 통합청사 문제 등에 대해 발언을 자제한다. 진해의 주요 시민단체가 모두 참여한 '강제통합 무효 진해시되찾기시민연대'에 이름을 안 올린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다. 통합청사 진해 유치의 필요성에 많은 전문가가 공감하고 있다. 우리 지역은 이제 경제자유구역과 신항만을 중심으로 한 대양을 향한 해양도시로 도시발전의 중심축을 설계해야 한다. 내륙 분지형인 옛 창원으로 도시의 중심축을 좁혀가는 중심부 쏠림현상을 과감히 바꾸려는 사고가 필요하다."

혁신도시 지키기 운동 등을 펼친 진주지역 시민단체도 고민이 많은 듯합니다. 한영수 대표는 "지방자치가 도입되면서 일찌감치 우려된 부분"이라며 "시민운동은 자신이 혹 지역 이기주의에 편입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점검해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운동가들은 '지역 이기주의 아니냐'란 물음에 분명히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혁신도시 문제는 지역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의 토대 위에서 이미 정해진 원칙을 지키라는 요구였기 때문에 지역 이기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봤다. 지역 MBC 통합도 지역민의 방송수혜 권리 박탈이라는 측면에서 나서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재정 의존, 약이냐 독이냐

박종훈 대표는 '권력과의 관계' 역시 시민운동이 경계해야 할 지점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하나의 돌파구로서 '민관협치'가 제시됐고 실제 많은 시민단체가 자치단체나 각종 기구에 참여했다. 예산, 활동공간을 지원받는 등 혜택도 있었지만 분명히 '독'이 된 측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운동은 운동이고 협치는 협치여야 한다. 운동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협치 등을 통해 타협하기 시작하면 결국 발목이 묶이게 된다. 협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 활동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게 맞다는 뜻이다. 도나 시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것도 원칙적으로 없어야 한다. 한번 소금을 받아먹으면 계속해서 물을 들이켜게 된다. 세상이 현실과 타협하더라도, 운동은 그래서는 안 된다."

시민운동은 정말 이래서 힘든 것 같습니다. 바로 눈앞에 오아시스가 펼쳐져 있다 해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절대 넘어선 안 될 '원칙'이라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넘는 순간, 시민운동은 더는 시민운동이 아니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피플파워> 독자님들에게 시민운동가는 어떤 존재인가요? 세상을 밝게 만드는 아름다운 사람들? 아니면 세상을 괜히 시끄럽게 만드는 귀찮은 사람들? 어느 쪽이든 가끔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돈도 명예도 지위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오직 '좋은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 그 자체로 존중받을 만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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