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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한 숟갈, 나물에 쏟은 정성 물거품

[초짜 애식가의 음식 이야기] (9) 비빔밥

고동우 기자 kdwoo@idomin.com 2012년 02월 10일 금요일

지금은 '비빔밥' 하면 각종 나물과 육회, 고추장, 계란 노른자 등을 얹은 (전주)비빔밥을 주로 떠올리지만, 사실 비빔밥은 특정 형식으로 한정 짓기 어려운 음식이다. '밥과 반찬(의 비빔)'이라는 구성적 특성상 비빔밥은 우리 민족이 쌀을 주식으로 삼기 시작한 때부터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나물을 얹으면 나물비빔밥, 열무김치를 더하면 열무비빔밥, 멍게를 비비면 멍게비빔밥이 되는 음식이 '비빔밥'이다.

비빔밥을 둘러싼 온갖 '휘황찬란한 담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 중에는 바로 이런 측면이 존재한다. 비빔밥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주비빔밥이 유명해진 시점인 1980년대 즈음부터 전주지역과 주요 언론을 중심으로 그 유래 등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 3대 명물'설, 궁중음식설, 농번기음식설, 동학혁명설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음식 전문 연구자인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문헌상의 기록 등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없다.

비빔밥이란 이름은 1890년대 씌어진 요리책 <시의전서>에 처음 등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빔밥은 각 가정에서 별 격식 없이 해먹는 음식이었다. 그러다 식당의 메뉴로 자리 잡은 건 일러야 1920년대경으로 추정되는데, 이 경우도 당시 가장 유명했던 비빔밥은 '진주'와 '서울'이지 '전주'가 아니었다. 1929년 발행된 한 잡지의 특집기사는 '경상도 명물 진주비빔밥'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맛나고 값 헐한 진주비빔밥은 서울비빔밥과 같이 큰 고깃점을 그냥 놓는 것과 콩나물발이 세 치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놓는 것과는 도저히 비길 수 없습니다. 쌀밥 위에 색을 조화시켜서 날아가는 듯한 새파란 야채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진주비빔밥  

이는 나물을 잘게 썰고 육회를 곁들이는 현재의 진주비빔밥 특성과도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 진주와 서울의 '육회비빔밥'이 명성을 떨친 건 두 지역에서 우시장이 활발하게 운영됐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변변한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전국에서 날것 그대로의 육회를 먹을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전주에서 비빔밥이 본격 팔리기 시작한 시점은 이보다 한참 늦은 해방 이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전주비빔밥이 훨씬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국풍81 축제'로 대표되는 1980년대 향토음식 담론 형성과 이를 잘 활용한 전주 식당들의 적극적인 마케팅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주비빔밥  

정확히 어떤 요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과정에서 진주와 전주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졌다. 이전에는 육회의 있고 없음이 결정적 차이였지만 이제는 전주에서도 (고객 선택에 따라) 육회를 얹는다. 밥 짓는 방식(일반 물 대 양지육수)과 함께 나오는 국 종류(선짓국 대 콩나물국)가 다르다고는 하나, 비빔밥 그 자체로는 겉보기부터 맛까지 너무나 유사하다.

두 지역 비빔밥 맛을 비슷비슷하게 만드는 핵심 주역은 나물 종류도 육회도 무엇도 아닌 바로 고추장이다. 혹자의 표현에 따르면 고추장은 "한 숟가락이면 한 드럼의 육개장 맛도 변하게 할 정도"의 "한식 식재료 중 최강군" 양념이다. 많게는 10가지 가까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나물을 무쳐놓고선 우리는 여기에 이 강력하고 자극적인 양념을 투하해 비빈다. 이 순간 진주냐 전주냐, 숙채냐 생채냐, 육회냐 해물이냐는 구분은 거의 무의미해진다. 무엇이 들어갔든, 이 비빔밥은 그냥 '고추장비빔밥'이라고 칭하는 게 옳다.

'고추장 없는 비빔밥'이라니 상상이 안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저마다 고유의 맛과 향을 품고 있는 다양한 나물 하나하나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좀 심심하면 나물 간을 조금 세게 하면 되고, 그 역시 모자라면 국간장(조선간장) 약간을 더해 비비면 된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만 해도 고추장은 널리 쓰이는 양념이 아니었다. 주영하 교수는 비빔밥에 고추장이 얹어진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 육회를 꼽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육회의 신선도를 보장할 수 없던 시절, 살균과 냄새 제거를 위해 고추장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냉장시설이 발달된 지금에 와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다.

비빔밥은 집에서도 얼마든지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굳이 잘하는 식당을 찾는다면 경북 안동 헛제삿밥의 비빔밥을 추천하고 싶다. 안동댐 근처엔 헛제삿밥을 파는 식당이 몇 곳 있는데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고 음식이 깔끔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비빔밥에 고추장 등 양념이 더해져 나오지 않는다. 각자 취향에 따라 선택을 하면 된다.

   
 
  안동 헛제삿밥의 상차림.  

함께 나오는 생선·전·찜·김치·국 등도 지나치게 과하거나 엉망인 다른 집과 달리 딱 적당한 수준이다. 사실 이미 그 안에 많은 것이 들어간 비빔밥에는 과한 반찬이 필요치 않다. 특히 맵디 매운 고추장 비빔밥에 배추김치 등 각종 김치가 쫙 깔리고, 비빔밥 재료와 비슷비슷한 나물이 곁들여지는 건 겉치레요, 낭비일 뿐이다.

당장 실험을 해봐도 좋다. 콩나물·시금치·미나리·애호박·버섯 등 가장 만들기 쉬운 나물 몇 가지만 준비해 밥과 국간장에 비벼보자. 최소 2시간 이상은 정성을 쏟았을 '사랑스런' 나물들의 낱낱의 맛이 살아 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고추장은 그 사랑과 정성을 스스로 배반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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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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