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14) 경북 성주 부상고개 넘어 김천 제석리까지

벌써 임진년 새해 첫 달을 보냈습니다. 우리 지역은 남녘이라 사나운 추위를 느끼기 어렵지만, 통영로 여정이 지나는 경북 성주 개령 일원은 이번 주 줄곧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제 2월이고 보니 다음 소식 전할 때쯤이면 주변에서는 철 이른 매화 소식도 접할 수 있겠지요. 오늘은 봄날을 기다리며, 의마총(義馬塚)이 있던 대마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아 나섭니다.

부상고개 가는 길

옛 의마총 자리를 지난 길은 대체로 백천(白川)의 서쪽을 따라 북쪽으로 곧게 열렸습니다. 백천의 옛 이름은 마포천(馬鋪川)인데, 근원은 원집이 있던 대야원동(大也院洞)에서 비롯했습니다. <여지도서> 성주 역원에 대야원(大也院)은 성주읍의 북쪽 29리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은 신거리고개라 부르는 부상고개 남쪽에 있었던 듯합니다. 대마에서 부상고개로 이르는 길에 대마점(大馬店)의 자취는 없으나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주는 빗돌 5기가 지금의 초전면 사무소에 모아져 있습니다. 이 빗돌들은 옛 성주목(星州牧) 시절 고을 원을 지낸 이들의 선정을 기리는 것인데, 이즈음이 옛 교통의 요충이었기에 남은 유물들입니다.

면소재지를 빠져나오면 대마평(大馬坪) 넓은 들을 점령한 은색 비닐하우스단지 가운데로 905번 지방도가 곧게 뻗어 있습니다. 옛길은 백천과 나란히 났으므로 우리는 이 길을 버리고 둑길을 따라 걷습니다. 머지않은 곳에 장승백이라는 마을이 내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옛길은 지금의 도로보다 더 동쪽으로 열렸음이 분명합니다. 장승백이를 지나자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로 이르는 갈림길에 세운 이정표가 눈에 듭니다. 이곳 태실은 세종대왕의 왕자들의 태를 모신 곳인데, 간혹 그 명칭 때문에 세종대왕의 태실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합니다. 세종대왕의 태실은 그가 그리 아꼈던 손자 단종(端宗)의 태실과 함께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습니다.

부상고개 미륵불

미륵원 미륵불.

김천시와 경계를 이루는 부상고개 서쪽 미륵암에는 고려 초기에 돌로 만든 미륵 부처님이 있습니다. 아마 김천과 개령의 지경(地境) 고개였을 이곳에 옛 미륵원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미륵불은 바로 이곳에 모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지도서> 개령현 역원에 '미륵원(彌勒院)이 관아의 남쪽 38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고, 같은 책 도로에 남쪽 성주와의 경계가 38리라 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머리에 둥근 갓을 쓴 이 미륵불은 원래는 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미륵원 터)에 있던 것을 1980년대에 미륵암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습니다. 미륵 부처가 이곳에 세워진 배경은 지난 답사 때 의마총(義馬塚) 전설에서 보았듯 빈번한 맹수의 출현과 도둑으로부터 길손의 안전을 빌기 위한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이 고개를 내려서면 부상역이 있던 부상리 부상마을에 듭니다.

부상역

부상역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남면 부상리 역말(역촌: 驛村)의 부상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전통시대의 역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개령현 역원에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고 했으며,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를 실었습니다. <여지도서> 개령현 역원에 "부상역은 관아 남쪽 30리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다"고 나오며, 같은 책에는 이곳에 부상관(扶桑館)이 있다고 했습니다. 역이 있던 초등학교도 이제는 폐교가 되어 역터 자취는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 정문에서 바라본 역터는 옛 지지에 나오듯 금오산(976.6m) 남쪽 기슭에 당당하게 있습니다.

갈항현

<대동여지도> 16-3에는 부상역을 지나 갈항고개를 넘어 동창(東倉)에 이르는 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개의 이름인 갈항(葛項)은 개령현의 남쪽 고개란 뜻입니다. 남쪽을 이르는 갈과 고개의 다른 표현인 목을 적기 위해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적은 것이니, 갈항고개는 역전앞과 같은 이중수식인 셈이지요. <여지도서> 개령현 산천에 '갈항현(葛項峴)은 관아의 남쪽 27리에 있다. 금오산(金烏山)에서 떨어져 나온 산줄기다. 곧 부상역을 거쳐 성주를 오가는 길이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니 갈항을 개령의 남쪽 고개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봉리에서 본 갈항고개. 갈항은 개령현(지금 김천시 아포읍 일대) 남쪽 고개라는 뜻이다.

갈항사

<여지도서> 개령현 역원에는 '갈항현 아래에 갈항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나옵니다. 옛길은 지금의 지방도 905호선보다는 약간 더 서쪽으로 열렸습니다. 바로 고개를 향해 곧추 오르는 옛길의 경제학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옛길을 찾을 수 없어 부득이 지방도를 따라 걸었습니다.

<여지도서> 개령현 사찰에는 갈항사(葛項寺)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갈항사는 금오산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신라의 고승 승전(勝詮)이 화석화(化石化)된 해골 돌을 가지고 이 절을 처음 세우고, 관아의 아전과 하인들을 위해 화엄경을 강의했는데, 그 해골 돌이 80여 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고 전합니다. <삼국유사> 승전의 해골에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승전은 곧 상주 영내의 개령군 경계에 사원을 개창하고 돌해골을 관속(官屬)으로 삼아 <화엄경>을 개강하였다. 신라의 사문 가귀(可歸)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법등을 전하여 잇고, 이에 <심원장>을 찬술하였다. 그 대략을 말하면, '승전 법사가 돌무리를 거느리고 (불경을) 논의하고 강의하였으니 지금의 갈항사이다. 돌해골 80여 매가 지금까지 주지에게 전하고 있으니, 자못 영험하고 기이함이 있다'고 하였다"고 나옵니다.

   
 

경덕왕 17년(758)에는 남매 사이였던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과 문황태후(文皇太后), 경신태왕(敬信太王)이 3층석탑 2기를 건립하였습니다. 절터에 있던 석탑 2기 가운데 동탑에는 이두문이 새겨져 있으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758) 중에 세워졌는데, 남매 3인이 그 일을 이루었다. 오빠는 영묘사 언적 법사이고, 큰 누이는 조문황태후이고, 작은 누이는 경신태왕이다." 위의 두 탑은 '갈항사지쌍탑'이라고도 하는데 1916년에 이곳을 떠나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갈항사 이야기를 토대로 할 때, 갈항고개를 방위 지명으로 볼지, 아니면 갈항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갈항사는 부상역의 북쪽에 있는 갈항고개에서 동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상역에서 길을 대어 온 역로는 갈항사가 있는 곳으로 이르지 않고 동창(東倉)이 있던 오봉리를 지나 서북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오봉리를 벗어나면 바로 아포읍 제석리에 듭니다. 마을의 이름은 배후의 제석봉(帝釋峰: 512.2m)에서 비롯하였으니 그곳 산정에는 제석신앙과 관련한 유적이 있을 법하지만 살피지는 못하고 지납니다. 달리 이곳에는 선조 연간인 1600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좌된 정여립의 사촌 처남 소덕유와 역모를 도모하다 처형당한 장사 길운절(吉雲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의 역모 사실은 <선조실록>에 전하며, 미리 역모를 알려 연좌죄는 면하였으나 그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가 태어난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못을 팠으니 그 못을 길지(吉池)라 했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국사리와의 경계에 길못이란 작은 못이 남아 당시의 일을 전합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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