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김주완이 만난 사람] 309일 크레인농성 김진숙 지도위원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참 답답한 사람이다. 왜 저렇게 힘든 삶을 선택했을까?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좀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텐데, (실제 그런 노동운동가도 적지 않은데) 왜 저리 극단적으로 제 몸을 혹사시키며 하는 걸까?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그를 부산 오케이오병원 입원실에서 만났다.

김진숙. 1960년생. 경기도 강화 출신. 18세 때 부산 자갈치의 작은 봉제공장 노동자로 시작하여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케키 장사, 땅콩 장사, 신문 배달, 우유 배달, 주간지 판매, 주방 세제 외판원, 시내버스 안내양, 대우실업 노동자를 거쳐 1981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 여성 최초의 조선소 용접공. 철판 사고로 오른쪽 발목 부상.

스물여섯 살 때인 1986년 해고. 세 번의 대공분실. 징역 수배 다시 징역. 부산노동자연합 의장.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정권과 자본에 맞서다 죽어간 동지들 장례 치르고 추모사 하다 보니 쉰둘.

2010년 1~2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24일째 단식 중 실신. 2011년 1월 6일, 8년 전 김주익 노조지회장이 목숨을 끊었던 바로 그 85호 크레인에 올라 목숨을 건 농성 시작. 엄동설한을 지나 장마철과 삼복더위를 견디고 다시 겨울을 맞이할 무렵인 11월 10일 309일 만에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내려온 '철의 여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여기까지가 대략 알려진 김진숙의 이력이다. 그러나 직접 만난 김진숙은 '철의 여인'이란 이미지와는 너무 멀었다. 70~80년대 남동생의 학비를 책임지고 도회지 공장으로 떠난 가냘픈 우리 누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필자도 그 시절 그런 누나의 희생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수많은 남동생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김진숙의 책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를 읽는 동안 계속 코를 훌쩍거렸고, 163cm, 51kg의 가녀린 체구와 맨얼굴의 거친 피부가 인터뷰를 하는 내내 애달프고 안쓰러웠다. 그래서 인터뷰 말미에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

평범한 행복조차 사치였던 삶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오셨는데, 지금부터라도 좀 편하게 살 순 없나요?

"한진중공업은 저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죠. 제가 결국은 돌아가야 할 곳도 한진중공업이라고 생각하고…. 스물여섯 살 때 해고되어 그 아픔들이 너무나 뼈저리기 때문에 제 인생은 한진중공업에 되돌아가야 완성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게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단 하루를 일하더라도 그냥 한진중공업에 복직하는 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진이 좀 안정되고 조합원들도 더는 투쟁하지 않을 만큼 되면 제 인생도 편해지겠죠."

한진중공업은 그에게 한(恨)이었다. 그 한에서도 좀 자유로워질 순 없을까? 이번엔 결혼 이야길 꺼냈다. 늦게나마 가정을 이루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결혼은 왜 안 하셨나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끌리는 사람도 없었나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저는 이른바 결혼 적령기라는 나이에 해고되고, 그 이후는 내내 쫓기는 삶, 아니면 구속돼 있고, 뭐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현장에서 누가 '좋은 사람이다'고 소개를 해도 딴 사람은 연애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아, 저 사람하고 같이 노동조합을 한 번 해볼까' 이런 생각이 우선 들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뭐, 오히려 결혼을 했으면 가족들까지 다 힘들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동지끼리 하는 결혼도 있잖아요.

"에이, 여자들은요. 운동세계에서도 달라요. 오히려 고통이 더 커지죠. 활동도 하고 집안 살림도 해야 하고, 시댁 관계까지 챙겨야 하는…. 그래서 결혼한 사람들 보면 되게 힘들게 살아요. 나름대로 그게 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짐이 더 생기는 거죠."

다른 가능성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다. 무엇이, 어떤 현실이 이 가냘픈 여인을 한 치의 허튼 감정조차 용납할 수 없는 노동운동의 전사(戰士)로 만들었을까? 그는 왜 함께 농성 중이던 동지들조차 몰래 한겨울 칼바람이 몰아치던 1월 6일 새벽 1시 50분 홀로 85호 크레인에 올라가야 했을까?

-왜 올라가기로 결심한 겁니까?

"제가 2009년도에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고, 86년도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복직시키라는 결정을 받았어요. 그걸 가지고 2009년 11월부터 계속 출근시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회사는 복직은커녕 구조조정을 내세워 계속 명퇴를 시켰어요. 아침마다 보면 출근하는 조합원들 숫자가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어요. 거의 매일 희망퇴직을 쓰고 나갔으니까. 한진중공업이 울산공장도 있고 마산공장도 있고 다대포공장도 있고 그랬는데 이게 차례차례 폐쇄됐거든요. 울산 마산에 있던 조합원들도 영도로 출퇴근하게 했어요. 통근버스를 타고. 그러려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야 했는데, 마산에서 오는 통근버스가 처음엔 가득 차서 왔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2/3로 줄어들고 절반으로 줄어들고, 제가 크레인에 올라가기 직전에는 네 명이 타고 왔어요. 그런 절망감이 컸습니다. 이러다가 영도까지 문 닫는 것 아닌가.

그리고 제일 컸던 것은 2003년도에 김주익, 곽재규라는 저희 20년 지기가 목숨을 던져서 지켜냈던 조합원들을 이렇게 할 수는 없다. 2003년 2500명이었던 조합원이 지금 800명 남아 있거든요. 더는 누구를 믿을 수도 없고, 그때 당시 집행부의 방침은 희망퇴직을 받아들이는 거였으니까. 이렇게 되면 조합원을 다 잃을 수도 있겠다 싶었고, 저도 또 86년 해고되어서 해고의 아픔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어본 사람이니까 내 동료 내 후배들에게 그런 아픔을 겪게 할 순 없다는 생각이 컸죠. 작년엔 단식도 해봤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크레인을 택했던 거죠."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크레인, 아픔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옆에 앉아 있는 황이라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을 가리키며) 이라 씨한테도 전혀 귀띔조차 않고 올라갔던 건가요?

"전혀, 아무하고도 의논할 수가 없었어요. 딴 데도 아니고 85호 크레인에 올라간다는 건 우리 조합원들에게 엄청난 상처거든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다 말리죠. 저 같아도 만약에 누가 거길 올라간다고 그러면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말렸을 테니까. 그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냥 일단 올라갔고 1월 6일 새벽에 조합원들에게 문자를 보냈죠. 난리가 났었어요. 전화 와서 뭐 울고불고, 당장 내려와라. 누나가 왜 거길 올라 가냐. 우리가 올라가서 끌어내리겠다 그랬는데, 안에서 문을 잠가놓았으니까. 집행부도 끌어내리겠다고 그랬는데 문이 잠겨 있으니…."

-크레인을 마징가제트로 개조하고 싶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하하. 올라와서 저 친구(황이라 씨)가 스마트폰을 올려줬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트위터를 몰랐어요. 그때부터 트위터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이 시작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무슨 말을 써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런데 '이 싸움에 여러분이 연대해주십시오' 이런 말을 쓰기가 싫더라고요. 연대라는 게 '해주십시오' 이래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마음에서 일단 우러나와야 하는 거고. 그래서 그냥 제 마음을 달래는, 저를 위로하는 수단으로 쓰고 싶었어요. 어떤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고 그런 것보다는. 그래서 농담 비슷하게 가볍게 이 공간을 알리고 싶었던 거죠. 85호 크레인이라는 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공간인데, 공간에 대한 부담감들을 줄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죠."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아직도 목 디스크와 허리 통증 때문에 고생하신다고요?

"예. 옛날에 많이 맞아서 그래요."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부터 아픈 곳이었나요?

"그랬죠. 그런데 크레인 공간이 좁았거든요. 몸을 다 못 폈어요. 처음 올라가서 한 2월쯤에는 목이 되게 아팠거든요. 그런데 표도 못 내고…. 아래서 걱정할까 봐. 거긴 아파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잖아요.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꿋꿋하게 살았습니다.(웃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난 겨울에 많이 추웠고, 좁고…. 그러니까 처음 올라가서는 몸에 멍이 많이 들었어요. 거기가 조종실이니까. 조종석 의자가 되게 크거든요. 무겁고 크고, 계속 돌아가는데, 기계들이 벽에 붙어 있고, 그러니까 일어서다가도 부딪치고 어깨도 부딪치고, 머리도 부딪치고, 눕다가도 몸 돌리다가 부딪치고…. 워낙 좁으니까. 그걸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어요."

-(예전 대한조선공사 현장에서) 철판 사고가 났을 때, 막상 죽음을 직감하니 마음이 편하게 느껴졌다고 표현한 글을 봤는데, 혹시 그런 유혹을 느낀 적은 없나요?

"많았죠. 그런 유혹 여러 번 겪었죠. 사실 희망버스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157일 차 되던 날 1차 희망버스가 왔는데, 사실 2003년도에 129일 만에 김주익 지회장이 목숨을 끊었는데, 그 129일이라는 숫자와 60명이라는 숫자(이탈하지 않고 버틴 조합원 수)에 굉장한 압박을 받고 있었어요. 내가 그걸 과연 넘길 수 있을까. 특히 그땐 집행부하고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고, 집행부는 85호 크레인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고, 저로서는 하여튼 최선을 다하는 방법으로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잘 안 풀리고…. 그럴 때마다 그런 유혹을 많이 느꼈는데, 희망버스가 오면서 그야말로 희망을 가지는 계기가 됐죠."

-한국의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 역사상 희망버스라는 게 전혀 새로운 것이잖아요. 희망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감이 안 왔어요. 정말 그런 게 처음이잖아요. 그냥 저도 트위터나 그런 소문으로만 들었거든요.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요. 그게 뭐냐. 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김여진 씨도 온다고 하고, 백기완 선생님도 오신다고 하고, 법륜스님도 오신다 해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오네. 그러면 여론화될 수는 있겠다. 그 정도였는데, 처음 희망버스가 왔을 때 밤에 영도대교에서 막혀 있다가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촛불이 너울너울 오면서 사람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더라고요. 뭉클했었죠. 그 정도 규모로 집회가 만들어진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왔다는 게 정말 감동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크레인에 출입이 가능했는데, 사람들이 크레인에 장식도 달아주고 그림도 그려주고, 되게 기뻤죠. 그날."

희망버스의 교훈은 진정성

-희망버스라는 게 운동의 희망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민주노총이라는 조직노동운동이 무력해 있는 상황에서 '날라리'로 표현되는 시민들이 앞장서서 했다는 것은 조직노동운동 쪽에서 보면 굴욕일 수도 있을 텐데.

"저도 조직노동운동을 30년 가까이 해왔던 사람인데, 사실 크레인에 올라가면서 그런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노동자대회 한 번, 부산에서 민주노총 결의대회라고 한 번, 그렇게 해서 하고 나면 별다른 압박수단이 없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사측에도 별로 위협이 되지 못하죠. 왜냐하면, 저 사람들은 왔다가 무슨 프로그램으로 집회를 하고 몇 시에 돌아갈 거라는 게 다 나와 있는 예측 가능한 집단이잖아요. 조직운동이라는 게. 그런데 희망버스는 그게 없는 거예요.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에 저 사람들이 와서 뭘 할지도 모르고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고,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거고. 또 그들이 담을 넘어왔단 말이죠. 용역들도 다 도망가고. 사측에서도 금속노조가 뭘 한다, 민주노총이 뭘 한다 하면 전혀 긴장하지 않았어요. 경찰도 그렇고. 그런데 희망버스가 가지는 그런 폭발력 때문에 굉장히 긴장했거든요.

사실 민주노총에서 집회한다고 해도 부산지역 뉴스에 단신으로나 짧게 언급될까 말까 전혀 여론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희망버스가 온다면 어버이연합이니 뭐니 수구집단에 의해서 오히려 여론이 만들어졌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의외성도 있었지만, 이분들이 가지는 진정성이었죠. 그러니까 올 때마다 물대포를 맞고, 수십 명이 연행되고, 그럼에도 서울에서 광주에서 울산에서 대전에서 다 자기 돈 내고 오는 거예요. 자기 시간을 1박 2일씩 들여서. 차 타는 시간만 해도 열 시간씩 들여서. 그런 게 저한테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던 반면에 사측이나 경찰에게는 굉장히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게 한 달에 한 번씩 주기로 끊임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그런 힘들이 승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희망버스를 계기로 조직노동운동이 배워야 할 교훈이라든지, 나아가야 할 길은 뭘까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진정성이라고 생각해요. 진짜 대상에 대한 애틋한 마음. 노동운동은 이미 분노가 일상화해 있죠. 워낙 처절한 싸움을 오랫동안 해 와서 그런지 긴장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긴장을 한다고 그래도 답도 없고. 한진중공업이 싸울 때도 전북고속, 유성기업, 재능도 쌍차도 다 절박한 사업장이잖아요. 누적된 분노, 누적된 스트레스들이 이미 고착화해 있는 것 같아요. 누가 크레인에 올라갔다 그래도 처음엔 좀 놀라겠지만 딴 데 또 일 터지고 하니까 한 군데 집중할 수 없었는데, 오히려 트위터를 통해서 이런 걸 처음 접했던 시민들에게는 더 애틋하고 더 간절했던 것 같아요.

주말에, 아니면 매일 크레인 밑에 와서 노숙을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광주에서 대전에서 오셔서 크레인을 쳐다보고 앉아서 밤샘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돌아가서 다시 트위터로 계속 안부인사 전하고….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숙연해졌다.) 매일 저녁마다 오셔서 백배서원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서울에서는 또 매일 촛불행진을 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여서 하시는 걸 트위터로 소식을 접했어요. 비 오는 날도 땅바닥에 엎드려 백배서원 하시는데, 그분들이 시간이 남아서 그랬겠어요? 그리고 그분들은 저를 모르는 분들이었어요.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이 그런 진정성들을 충전하지 않으면 참 공허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촛불집회 때도 마찬가지였죠. 진정성이 있어야 대중의 역동성이 되살아나는 거다. 우리가 분노가 모자라는 것은 아닌데, 뭐가 대중을 얼어붙게 만들었을까. 민주노총 집회에 오면 뭐 대회사, 연대사, 노래공연, 문화공연, 결의문 낭독하고 박수치고 그냥 끝나 버리는, 그러니까 대중은 앉아서 박수만 치는 부대로 전락해버렸죠. 대중들에 의해서 어떤 힘이 나오는 게 아니라 힘은 이른바 중앙에서 나오고 프로그램도 거기서 다 나오고, 대중들은 프로그램이 뭔지도 모르고 박수나 치고 앉아 있으니까. 그러니 민주노총에선 고민한다는 게 유명한 사람 데려오는 것, 뭐 이렇게 되니까 그게 좀 안 맞았던 것 같아요. 조합원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게 아닌데. 희망버스나 촛불집회를 보고 배울 것은 아래로부터 스스로 힘을 만들어가는 건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죠."

-지도위원님의 노동자 사랑은 익히 알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노동자가 미웠던 때는 없었나요?

"파업현장에서 복귀하는 조합원들이 밉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가 만약 조합원이라고 한다면 처자식도 있고,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나는 해고자도 아니고, 집행부가 100% 신뢰도 안 가고, 100% 신뢰를 해도 힘든 싸움인데, 집행부는 임원들이 다 사퇴해서 도망을 가버리고 상집 간부도 절반 이상이 도망가버리고, 그런 가운데서 싸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만일 비해고자였어도 파업대오에서 끝까지 남아 있겠느냐 회의적이에요. 그래서 조합원들이 원망스럽거나 밉거나 하진 않아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미운 마음은 없어요."

-참여정부 때 노무현 대통령도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을 비판했잖아요. 거기에 대해 지도위원님도 분개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도위원님도 대기업 노동운동을 비판한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 한국노동운동이 극복해야 할 일은 뭘까요?

"제일 큰 게 비정규직 문제예요. 한진중공업도 그 문제를 넘어서야 하죠. 그게 노동운동의 아픔이고 아킬레스건이죠. 한진도 비정규직이 세 배가 넘거든요. 이분들에 대해서는 거의 방침이 없었어요.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에 대한 생각들을 바꿔야 할 게 많아요. 배불러서 나눠주는 건 연대가 아니라 자선이고 시혜죠. 나도 배고프지만 내 밥그릇을 내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연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그런 걸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대기업 노동자를 귀족이라 하고 바꾸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죠.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얼마든지 비정규직법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노무현 대통령이 옛날부터 활동도 함께 했고 기대도 컸는데…."

-저는 2차 희망버스부터 취재를 왔었는데, 그때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들을 만났습니다. 그 분들 말이 "박석운, 백기완, 김진숙은 직장도 없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겠느냐. 북한의 공작금을 받지 않고서야 저렇게 살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분들에게 대답하신다면.

"하하하. 저는 노조에서 월 100만 원씩 생계지원금을 받고 있어요. 그걸로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고요. 백기완 선생님 같은 경우도 힘들지만 평생을 운동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 건 세상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죠. 저는 모든 걸 북한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그분들의 사고 구조가 더 궁금합니다. 민주주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걸 북한과 바로 연결해버리는…. 반값등록금도 북한이고 촛불집회도 북한이고…(웃음)."

나에게 진보정치는 상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최근 진보정당들의 분열과 통합 등 일련의 흐름에 대한 생각은.

"휴~(한숨). 저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는 상황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호소도 하고 했는데, 그게 안 됐어요. 그러고 나서 진보정당에 대한 애정이 한풀 꺾였습니다. 그때 탈당을 해야 했는데, 탈당을 하고 싶었어요. 사실은. 그런데 다 망하는 집구석에 나까지 그렇게 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탈당은 못했지만 그때부터 당 활동을 안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 당에 대해선 이런저런 얘길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럴 애정도 남아 있지 않고…."

-그래도 노동운동이라는 게 진보정치와는 뗄 수 없는 게 있잖아요.

"그렇죠. 당과 노동조합 조직이 유기적으로 서로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진보정당이 오히려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과연 당으로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저는 사실 의문을 가져요. 정말 필요하고 간절할 때 오히려 분열하고 너무 큰 상처를 주니까, 그래서 저도 너무 상처가 커서 그냥 그 얘기를 하기가 싫어요."

-언론 이야기 좀 묻겠습니다. 조선·중앙·동아일보가 신문을 통해 한국사회 과반 이상의 여론을 독과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 조중동 TV까지 나왔는데.

"얼마 전 보니까 시청률이 0.0 몇 프로라든가? 그렇게 해서 망해야죠. 그렇게 해서 신문까지 망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트위터가 조중동을 이길 수 있을까요?

"서울시장 선거가 굉장히 다이내믹 했잖아요. 사실 투표날까지만 하더라도 나경원 씨가 우세하다는 게 조중동의 보도였는데, 그걸 뒤집은 게 트위터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여론을 조중동이 사실 만들어왔잖습니까? 그 힘이 약해질 거라고 봐요. 트위터가 가진 실시간의 힘, 진실의 힘으로."

-김진숙에게 트위터란?

"아마 트위터가 없었다면 희망버스도 없었겠죠. 6월 27일 노사가 일단 기만적인 합의를 했는데, 아마 트위터가 없었다면 그걸로 끝났을 거예요. 신문에서도 모두 합의했는데 왜 그러냐는 보도로 일관했죠. 하지만, 트위터에서 그런 여론을 완전히 뒤집었죠."

김주완 편집국장과 김진숙 지도위원./김구연 기자

-지도위원님 책을 읽으면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과연 우리사회에 희망은 있을까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과연 희망이 있을까요?

"하하. 있겠죠. 희망버스만 봐도 그렇죠. 노동문제에 대해 그 많은 사람이 마음을 냈다는 자체가 저는 이미 달라지고 있다고 봐요.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 사람들의 억눌린 분노들이 있어요. 그게 언젠가는 터져 나올 거라고 보거든요. FTA 싸움에서 그렇게 한겨울에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시민들이 나가고, 아직도 그렇게 싸울 의지들을 갖고 있고. 사람들이 단단히 벼르는 것 같아요. 그게 내년 총선이 될지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무슨 계기가 올 거예요."

-혹시 진보정당 등에서 정치하자는 권유는 없나요?

"오히려 민주당 쪽에서 그런 얘기를 내놓고 하더군요. 저는 정치할 생각 없어요."

인터뷰는 이쯤에서 마무리됐다. 앞서 처음 인터뷰를 요청하는 전화를 했을 때 황이라(31)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이 받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펴낸 <소금꽃나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마흔일곱에도 해고자로 남아 있는 제가 20년 세월의 무력감과 죄스러움을 눙치기 위해 스물일곱의 신규 해고자에게 어느 날 물었습니다. 봄이 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내게도 저토록 빛나는 청춘이 하루라도 있었다면……. 볼 때마다 꿈꾸게 되는 맑은 영혼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원피스 입고 삼랑진 딸기밭에 가고 싶어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우) 김주완 편집국장(좌)./김구연 기자

이 대목에 나오는 '맑은 영혼'이 바로 황이라 씨였다. 그는 2005년 부산지하철 매표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됐다. 그때 나이는 스물여섯. 김진숙 위원과 같은 나이에 해고된 후, 2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친구이자 동지가 됐다. 이번 309일에 걸친 크레인 농성 때 하루도 크레인 아래를 떠나지 않고 식사와 옷가지는 물론 대소변까지 밧줄로 달아 올리고 내린 것도 황 씨였다. 그는 지금도 김 위원과 한 방에서 생활하며 간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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