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부서지는 석양 가을 끝자락을 붙들고

“아니 이게 뭐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턱밑에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산중턱을 막 넘어서는데, 산마루로 이어지는 등성이에는 자동차 두 대가 나란히 다녀도 넉넉할 만큼 널찍하게 임도가 나 있는 게 아닌가.
한편으로 허탈해지며 배신감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랴, 계속 참고 오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을. 하지만 중턱 지나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바스락대는 낙엽을 밟으며 산자락에서부터 땀흘려 오른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진다.
산마루로 이르는 등성이를 오르는 길은 가을다운 맛을 조금밖에 느낄 수 없다.
사철 푸른 소나무들만이 삥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위쪽으로는 자잘한 이파리들마저도 벌써 다 떨궈버린 키 작은 떨기나무들만 무리 지어 있다.
맞은편 천개산(525m)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어우러져 있건만, 벽방산(650m) 꼭대기는 애써 찾은 보람도 없이 촉촉이 묻어나는 단풍을 거의 맛볼 수 없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자동차로 중턱까지 손쉽게 올라오지 못한 어리석음을 탓할 수 있겠는가. 벽방산이 시작하는 아랫도리에서부터 발품 들여 헐떡대며 올라오게 만든 어리석음과 무지가 오히려 사랑스러운 것이다.
과연 그랬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아니면 고창 선운사 같이 단풍으로 이름난 곳들은 이미 나뭇잎들이 다 졌겠지만, 바닷가에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높지 않은 남쪽 산들은 지금이 오히려 한창이려니 여겨진다.
벽방산 오르는 길은 마음놓고 단풍을 즐기라는 듯 별로 가파르지도 않고 알맞게 널찍하다. 군데군데 너덜이 나타나지만 걷는 데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돌과 흙이 자연스레 깔린 길바닥은 떨어진 가을 이파리들로 온통 가득하다.
밟을 때마다 나는 바스락 소리가 길가는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는 듯하다. 혼자 걸어 올라도 혼자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길 따라 좌우로 펼쳐진 붉고 노란 단풍은 곳곳에서 사람의 눈길을 잡아끌고 발길을 묶어둔다. 아름드리 소나무는 시쳇말로 ‘쭉쭉빵빵’ 뻗어올라 버렸고 그 아래로 활엽수들이 물든 이파리를 매달고 사람들을 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늦가을 벽방산은 오르는 들머리에서부터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든 단풍이 아름답지만 정상에 올라보는 즐거움과 보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위 봉우리가 그럴 듯할 뿐만 아니라 오르는 길 왼편으로 통영 앞바다도 한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오후 시간에 맞춰 오를 수 있다면 고즈넉하게 해지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오후 5시께가 되면 서편 하늘 바다 한 뼘쯤 위에 해가 걸리는데, 바다에 그대로 비쳐 마치 두 개가 빛을 뿜는 것 같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늘의 해와 바다의 해는 천천히 거리를 좁혀가는데, 어둑어둑해질 무렵에는 서로가 서로를 껴안은 채 수평선이나 섬그림자 너머로 꼴깍 숨어버리는 것이다.



▶찾아가는 길

마산.창원에서는 경남대학교 앞 댓거리를 지나 14번 국도로 곧장 가면 된다. 2번 국도와 갈리는 지점을 지나 고성읍을 둘러가는 고가도로를 지나면 나오는 네거리에서 신호를 받아 좌회전한다. 바로 1010번 지방도인데 마라톤 코스가 마련돼 있는 동해면 일주도로이기도 하다.
진주쪽에서는 33번 국도를 따라 오다 고성읍을 우회한 다음 일주도로로 합치거나 2번 국도를 따라 마산쪽으로 오다가 삼거리에서 14번 국도로 빠져들어도 되겠다. 여기서부터 곁가지로 새지 말고 곧장 7km 남짓 달리다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 15km 정도 달리면 된다.
고성군 거류면 소재지가 있는 당동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왼쪽으로 통영 미륵도 관광특구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에 ‘안정사’ 표지판이 서 있으니 쉽게 찾아들 수 있다. 이처럼 꼬불꼬불 이어지는 1009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안정공단을 한창 만들고 있는 공사현장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통영쪽으로 빠져나가라는 안내표지를 따르면 얼마 안가 안정마을이 나타나는데 오른쪽 벽방초등학교가 보이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된다. 2.5km 올라가면 안정사라는 절이 나오는데 그 앞마당에 차를 세워놓고 단풍 가득한 벽방산으로 스며들면 되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마산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고성까지 간 다음 통영쪽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안정 마을까지 가서 절집을 찾으면 된다.


▶가볼만한 곳

안정사는 벽방산 들머리 시냇가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37살 때(654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법화종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경주 불국사 아니라 창원의 성주사에 견줘보더라도 그냥 조그마한 절에 지나지 않는다. 가운데 대웅전이 있고 맞은 편에는 후줄근한 모습으로 북이나 운판 따위를 걸었을 만세루가 서 있다. 대웅전 양옆으로는 칠성각과 명부전.나한전이 조그맣게 엎드려 있다.
절집 마당은 잔디를 입혀 놓아 색다른 느낌을 주는데 오른쪽에 있던 탐진당은 최근에 불타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귀의삼보하옵고……’ 하며 탐진당 재건을 위한 불자들의 시주를 바란다는 안내문이 한편에 마련돼 있다.
하지만 크기로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 안정사의 자랑은 대웅전 뒤쪽 대숲 너머로 울창하게 치뻗은 솔숲이다. 얼핏 보기에도 한 아름은 넘을 듯한 노송들이 그야말로 우거져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절에는 대궐에서 하사 받은 가마와 인수.궤 따위가 간직돼 있는데 여기에는 바로 이 솔숲을 둘러싸고 시비가 자주 일어나자 왕실에서 나무를 벤 사람을 절이 알아서 처벌할 수 있도록 어패를 내린 연유가 적혀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대웅전에서 마주보는 천개산의 단풍도 무척 아름답다. 군데군데 소나무숲과 어우러져 있는 게 손으로 꼭 쥐면 물이 묻어날 것만 같다.
절집으로 들어서는 현대식 다리인 ‘해탈교’ 이쪽저쪽에 드문드문 서 있는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들어 둘레를 밝혀주고 있다. 일손이 없어서인지 빨간 감이 그냥 매달려 있는 감나무들도 절집 풍경에 아름다움과 멋을 더해주고 있다.만세루 옆에는 북을 매달아놓은 누각이 있는데 콘크리트 건물이어서 맛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옆에 있는 당간지주와 언제 쓴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퇴색돼 있는 당간나무는 절집에 고풍스러움을 한결 더해준다.
전체로 볼 때 안정사는 아직까지는 현대의 대규모 개발 논리에서 살짝 비껴나 있어 오가는 길손들이 잠깐이라도 들러 소슬한 산바람에 가슴을 열어보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 안정사 이르는 길에는 확장포장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탐진당 재건까지 돌격대식으로 치러진다면 지금의 아늑함은 가뭇없이 사라질 지도 모르겠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