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배종혁 마산창원진해 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이분 왕년에 한주먹 하셨다.

“이정재, 임화수, 칠성이가 있던 종로 4가 화랑동지회. 내가 거기에 있었다고. 이정재가 1917년생인가 그렇지? 내가 1938년이고, 그니까 큰 형님뻘이지. 내가 김두한이한테도 밥을 얻어먹고 그랬다고. 김두환을 딱 만나서 형님, 허면 우선적으로 밥 먹었냐! 그게 동생들한테 하는 첫 인사야.”

그의 청춘은 활극 그 자체다.

“20대는 말도 못했어요. 내가 세 번 죽었다 살아남았잖아.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서. 내가 해병대 지원하러 진해에 왔었어요. 가니까 무엇이 잘못됐다 안 된다고 해서 다시 서울 올라가는 길이었어. 진해에서 삼랑진까지 나와서 기차를 탔는데, 장병 열차 그거 아무나 못 타잖아. 막무가내로 올라탔지. 객실에는 못 들어가고 승강구에 서 있었다고. 거기서 시비가 붙어서 몇 대 얻어맞았어. 그런데 계속 서울놈의 새끼 그러면서 시비를 거니까 내가 그놈들을 껴안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버렸다고!”

마산 창원 진해환경운동연합 배종혁(74) 의장과 마주 앉았다. 뽕잎 차를 권했다. 그가 맛있다고 웃었다. 오랜 객지 생활, 만만치 않은 성격이 만들어낸 그 웃음은 왠지 슬펐다.

전쟁고아

배종혁 마창진 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이서후 기자

“지금 제일 보기 싫은 게 뭔지 알아? 해마다 다가오는 명절날! 왜 싫으냐. 내 마음을 더 괴롭게 만들어. 골목마다 고향을 찾아줘서 반갑다고 펼침막이 붙는데 속으로는 나도 고향이 있는데, 그게 제일 보기 싫어. 이게 누굴 약을 올리나 하고.”

배 의장은 전쟁고아다. 한국전쟁 때 가족과 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소식도 모른다.

“나 고향은 이북이에요. 황해도 연백. 전쟁통이었지. 폭탄이 떨어지면 옆에가 엉망이 되잖아. 그렇게 전쟁 와중에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 거야. 남쪽으로 가는 피난 대열에 끼여서 서울에 왔지. 이후에 가족 소식은 전혀 못 들었어. 그래서 인천, 거 인천이 전부 피난 온 사람들 집성촌이 되다시피 했거든. 뭐 소식 들으려면 인천으로 가는 거야. 자주 갔었지.”

나이 열두 살에 혼자 서울에서 살게 된 배 의장. 그의 생활은 말 그대로 풍찬노숙이었다.

“잘 데가 없어서. 천도교 그 저 종로2가에 천도교 본관이 있잖아. 문 열려 있으면 그냥 들어가서 자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거, 음식물 쓰레기 나오는 거, 끓여서 팔았어. 지금은 그게 부대찌개지. 그때 당시에는 음식에서 담배꽁초도 나오고 껌 씹다 버린 것도 나오고. 그것도 못 먹어서. 그때 당시에는 그게 왜 그렇게 맛있는지 말이야. 그때는 한 끼 먹고 나면 그다음 끼를 걱정해야 해. 그런 세상을 살았지 내가.”

그렇게 주먹 세계에 발을 들여놨다. 싸움질은 자신 있었다.

주먹공장 공장장

“싸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했지. 동대문파, 명동파 이렇게 갈라져 있었다고. 종로는 우리 동대문 관할이고. 그래서 종로에서 하다가 내가 명동으로 들어갔지. 명동에 정팔이형이라던가 신상사, 이런 패거리들과 같이 있다가, 내가 그 당시에 거기서 계속 뭘 했을 것 같으면은 명동 노른자 땅 얼마든지 내가 가질 수 있었어. 그때는 주인이 없었거든. 팔팔 거리고 쌈하고 돌아다니는 데는 도가 텄으니까.”

그런 그가 주먹 세계에서 몸을 뺐다. 그리고 백기완을 만난다. 배 의장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배종혁 마창진 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이서후 기자

“거기서 고향 누님을 만났어.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공부를 하는 방향으로 하고 거기서 빠졌지. 빠지는 것도 힘들었지. 잡히면 지포 라이터로 손을 막 지지고 그랬어. 그렇게 허구서 인제 백기완하고 만나게 된 거야. 같이 문맹자들 공부시키러 가자, 해가지고 서울역 철도청에 들어가서, 반공갈이지, 화물차 두 칸을 기차에다 달아서 서울에서 구례까지 간 거야.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회동 화개장터 거기에 기점을 두고서 거기서부터 강 건너 백운산 일대 이쪽저쪽 해서 산골에 들어가서 촌사람들 몇 명씩 모아놓고 기역니은 공부 가르치는 거야.”

자신도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창녕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고등학교 교사로서다.

“그 길로다가 인해가지고. 공부를 서울서 했어. 열심히. 사람을 잘 만나서 학교는 다 나왔어. 학교 다 나와서 전기 계통으로 한번 해보겠다고 그러니까.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있을 때, 그때 인제 하도 배종혁이가 서울 바닥에서 유명하다가, 사람 된다니까 주변에서 또 물이 들까 봐, 창녕에 재일교포가 있었다고 손무상 씨라고, 고암에. 창녕공업고등학교, 그전에 내가 들어갈 때는 창녕종합고등학교였지, 그 학교로 보내줬어요. 학교에 들어가서 근무하라고. 내가 전기를 배웠거든. 창녕공고 와서 전기를 가르쳤어. 실습을 가르친 거지. 거기 변전소도 내가 설계를 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우포를 만났다. 우포는 배 의장에게 제2의 고향, 부모와 같은 곳이다.

우포를 만나다

“학생 모집하고 돌아다니면서 의령, 합천 가면서 낙동강을 넘나드는 일이 잦아졌어. 그러다 보면 낙동강 좋은 경관도 보고,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라보기도 하고 그랬지. 우포늪은 그때 당시는 몰랐어. 자꾸 왔다갔다하다 보니 우포늪이 있더라고. 내가 우포늪을 찾았을 적에는 창녕은 부곡온천 정도만 유명했지. 돈 있는 놈들이 가끔 겨울에 찾는 곳이 우포늪이야. 그 당시에 겨울에 사냥하러 바글바글했거든. 기러기 고니 같은 거. 어민들이 제보해. 어디에 몇 수십 마리가 앉았다, 그러면 이것들이 지프 타고들 온다고. 와 갔고 그냥 디리 갈기는 거야. 갈기면 물에 빠진 건 건져 와야 할 거 아니야? 그 몫은 어민들 몫이야. 전부 거둬다가 갖다 주면 돈 받아먹고 살고. 그러던 곳이었거든. 그걸 내가 환히 알지.”

당시 우포늪은 쓰레기장이었다. 배 의장은 매일 우포늪을 돌며 쓰레기를 주웠다. 한 바퀴 도는데 딱 하루가 걸리는 일이었다. 쓰레기를 주우며 속으로 수없이 욕을 해댔다. 내 쓰레기 버리는 이놈의 자식들을 가만 안 둔다! 우포늪 깡패 할아버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우포늪 지킴이 주영학씨와 함께./이서후 기자

“창녕읍에서 쓰레기 같은 거 차에다 싣고 와서 그냥 버리고. 냉장고, 의자 같은 것도 굴려서 늪에다 떨어뜨리고 가버리고. 이걸 잡아야겠다 해서 거기서 잠복도 자주 하고 그랬어. 말도 못했어요, 그거. 창녕군 쓰레기 매립장이 우포늪하고 아주 붙어 있었다고. 여기서 나오는 침출수가 전부 우포늪으로 들어오는 거야, 이게. 이것도 전부 해결했잖아요. 창녕환경운동연합을 내가 만들었거든. 1996년인가. 우포늪 때문에 만든 거지. 그전에는 혼자 담배꽁초 주우러 다니고 그랬거든. 엉망이었어, 우포늪이. 그 안에 마을들이 이렇게 있으면은 옆에 산이 있어. 우포늪 주변에 산이란 산은 다 쓰레기장이었어. 수십 년을 살면서 산에다 갖다 버리는 거야. 그게 비가 오거나 그러면 산에서 흘러 내려서 우포늪으로 다 들어오는 거야. 그걸 청소를 하자니.”

배 의장은 당시 창녕군에 도움을 구했다. 군청에서는 사람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힘들다고만 했다. 고민하던 배 의장이 생각해 낸 게 군대다.

“창녕에 육군 군단이 하나 있거든.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군단장을 만나야겠다. 그래서 위병소에 가서 군단장을 만나려는데 절차가 어떻게 되느냐 물어봤지. 그게 이뤄져서 만나러 들어간 거야. 지금 우리 할망구가 타고 다니는 1톤 포터가 있어. 그걸 끌고 가니까. 군단장 쓰리스타 만나러 온 사람이 덜덜덜 1톤 트럭을 타고 들어가니까 부관들이 다 의아했지. 안내받아 들어가니까 사무실에 빨간 판에 노란 별 세 개가 불이 켜져 있더라고. 사무실 말고 접견실이 있어. 거기서 만난 목적을 쭉 이야기했지. 지금 우포늪이 이런 상황이니까. 군에서 병력을 협조 해달라고. 청소를 좀 해야겠다.”

배 의장이 군단장 만나러 갈 때 타고 간 트럭./이서후 기자

군단장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군단 예하 부대에서 차출된 병력이 우포에 집결했다. 청소는 군사작전을 벌이듯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나중에 온 걸 보니 기가 막혀. 식사 차량, 구급차도 몇 대씩 오고, 쓰레기 실을 트럭, 중장비도 오고 그랬어. 6~7명씩 분산을 해서 산에 올라가는데 거기에 무전병이 한 명씩 따라가. 작전 지도도 보면서 쓰레기를 치우는데, 이야, 기가 막혀 그냥! 그래서 청소를 다 마쳤어. 그게 소문이 나서 창녕군에서 지네한테 통고도 없이 했다고 좀 뾰로통했어. 그다음에 내가 폐교된 학교를 교육청에 이야기해서 우포생태학습원이라고 만들었거든. 근데 건물도 운동장도 엉망이라. 그것도 군대에 부탁했더니 또 했어. 나도 완전히 재미 붙여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배 의장이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해서다. 그리고 햇볕이 따갑던 어느 가을날 아침 우포늪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우포늪./이서후 기자

다시 우포에서

“우포늪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좋아. 봄은 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볼거리가 많이 있어. 그러니까 이걸 그냥 놔둬야 해. 여기다가 그냥 데크를 놓고 그러고 있으니. 새들이 많이 오면 군무를 이루고 그러잖아. 그거 좋은 거지. 그니까 그만큼 많이 오게끔 인간들이 뒷걸음질해야 하는데 자꾸 앞으로 간다고. 가까이 안가고서도 가깝게 볼 수 있는 도구들도 많이 생겼는데 그런 걸 이용해서 멀리서 봐야지. 보면 카메라 기자들, 저렇게 새가 많이 있잖아? 숲 속으로 카메라 들고 살살 기어간다고. 그러고는 오디오맨 보고 쫓으라고 한다고. 그러면서 날아가면 그거 찍고 말이야. 다반사야 그런 게.”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배 의장./이서후 기자

제방 길을 걷다 주영학(64) 씨를 만났다. 이분, 우포늪 감시원으로 국무총리,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분이다. 배 의장은 그를 두고 가장 일 잘하고 믿을 만한 후배라고 한다. 주 씨도 지금 자신이 우포늪에서 하는 일은 모두 배종혁 의장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주 씨의 말을 들어보자.

“의장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의장님 고생 많이 했어예. 의장님이 우포늪을 살맀어예. 제가 전부 다 봤기 때문에. 제가 이방면에서 산불 감시원을 했거든예. 의장님이 매일 일하는 거 보고. 그래서 내가 우포늪으로 오게 됐어요. 대통령 표창을 5월 11일 날 받았는데, 여기 유명해지고는 제일 처음 받았는데, 다 의장님 덕택이라. 청소하는 건 다 의장님한테 배웠지예.”

주영학 씨의 대통령 표창장을 보는 배종혁 의장

주영학 씨를 보내고 나니 저 앞에 어린이집 아이들이 제방 길에서 놀고 있다. 우포늪에 견학을 왔나 보다. 그 아이들을 바라보고 배 의장이 말했다.

“우리만 사는 게 아니잖아. 다음 세대한테 물려주고 우린 가고. 점점 과학이 발달하면서 앞으로 큰 변화가 더 많이 생기는데 새로운 세대한테 문화유적이라든가 물려줄 게 있어야지. 그리스니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유산 많잖아. 지금 우리나라 정부가 그쪽에서 나라를 운영했으면 그거 다 없어졌을지도 몰라. 그래놓고 좋은 문화를 찾는다고 헛소리들은.”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다독거리고 옷을 추슬러 입힌다.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가, 철새 소리와 겹친다. 배 의장이 다시 우포늪을 바라본다.

배종혁 마창진 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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