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를 뒤돌아 볼 때 20세기만큼 음악적 양식이 급변한 시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3년,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발레곡 '봄의 제전'(Rite of Spring)을 발표했을 당시 연주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청중을 피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충동적이며 불규칙적인 리듬, 불협화음들은 당시 청중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오늘날 20세기의 대표적인 명곡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하는 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지난해 우리지역 창원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보적인 예술이 동시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늘 시간이 필요했다. 보편적 이해는 갈등의 단계를 거친 후에야 일반적으로 받아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명곡중의 명곡으로 꼽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이 그랬고,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역시 그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모든 예술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유명한 음악학자인 R. 스미스 브린들이 이야기한 것 같이 음악은 사회 환경의 소산이지 음악이 사회 환경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늘날 대중들은 늘 새로움과 변화의 삶을 꿈꾼다. 그러면서 물질문명의 새로움과 변화에는 매우 민감한 반면 정신적인 지적 문화의 변화와 새로움에는 많이 소홀한 듯하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지역 아니 우리나라 음악계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러다보니 창작자(작곡가)들은 그들끼리 또는 홀로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점 연주자와 창작자 사이의 골은 깊어지고 이러한 상황은 청중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연주자들은 대부분 18세기를 시작으로 19세기 말까지의 작품들을 만고불변의 텍스트로 삼아 무대를 만들다보니 새로운 현대음악을 들을 기회가 부족한 청중들은 생소하기만한 음악을 좋아할 리 없다. 혹 새로운 작품들이 발표된다하여도 1회성에 그치거나 아니면 연주단체가 지원금을 받기위한 수단으로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 선진국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나라들의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창조적인 활동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우리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연주단체인 시립예술단 또한 지난 몇 년동안 우리 지역의 창작곡을 외면하는 현실을 보며 참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나마 경남음악협회 최천희 회장의 주도하에 지난 2008년부터 시작된 경남의, 경남을 위한 '경남의 노래'와 '경상남도음악제'가 지역 음악인으로서 많은 기대된다. 경남의 문인과 음악인이 뜻을 모아 창작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경남의 노래'가, 하반기에는 경남지역 작곡가들의 창작곡이 보급된 콩쿠르가 함께하는 '경상남도음악제'를 통해 경남지역 음악계의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그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굳이 서양 음악사를 들추지 않더라도 많은 동시대의 작품들이 활성화될 때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연주의 꽃이 만개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동시대의 예술작품은 우리들의 모습, 우리 삶의 자화상이다.

2012년 새해가 밝았다. 올 한해 우리 시대, 동시대의 문화를 통해 우리의 모습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욱용(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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