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 애식가의 음식이야기] (4) 냉면과 밀면

'이 추운 겨울에 뜬금없이 웬 냉면 타령이냐'고 따져 묻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원래 냉면(평양냉면)은 겨울 음식이다. 조선시대 후기 학자 홍석모는 자신이 쓴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에 "냉면은 11월 동짓날에 먹는 음식"이라고 적고 있다. 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가을에 수확하고, 육수의 기본인 동치미가 겨울 음식인 것만 봐도 감이 온다. 변변한 냉장·냉동 시설이 없던 시절, 한겨울 밤 뜨끈한 아랫목에서 차가운 동치미에 신선한 메밀국수를 말아 먹었던 게 냉면이었던 것이다.

냉면, 그리고 밀면은 지역적 호불호가 선명하게 갈리는 음식이다.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는 경남·부산 지역 사람들은 새콤매콤한 진하고 복잡한 맛의 육수·양념(다진 양념)이 특징인 진주냉면이나 밀면을 선호하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역에서는 밍밍한 고기육수의 평양냉면을 더 찾는다.

그래서인지 서울에는 밀면을 파는 음식점만 아주 극소수 있을 뿐 진주냉면 전문점은 단 한 곳도 없다. 반면 경남과 부산에서는 일부 '흉내'를 내는 집이 있긴 하나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먹어보려야 먹어볼 수가 없다.

평양냉면(서울).

물론 서울에도 '자극적인 입맛'을 만족시켜 줄 냉면이 존재한다. 감자나 고구마 전분면을 쓴 비빔국수 형태의 이른바 함흥냉면이 대표적이고, 필동면옥·우래옥·평양면옥·을지면옥·봉피양 등 몇몇 평양냉면 전문점을 제외한 '공장산 냉면' '동네 고깃집·분식집 냉면' 거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기자는 위와 같은 측면에서 진주냉면과 함흥냉면, 그리고 밀면을 더 유사한 계열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냉면'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평양냉면과 진주냉면·함흥냉면 간의 거리는 진주냉면·함흥냉면과 밀면 사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멀어 보인다.

육수·양념에 나타난 맛의 지향점 외에, 양측을 가르는 또 하나의 핵심적 차이는 바로 면이다. 언뜻 보면 메밀면을 쓴다는 점에서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 동일한 계열 같다. 하지만 메밀 함량이 70~80%대에 이르는 평양냉면과 달리, 진주냉면은 30% 이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머지는 전분, 밀가루 등으로 채우는데, 이러면 메밀 특유의 구수하고 그윽한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식감도 차지고 힘 있는 메밀면보다는 '쫄깃'한 밀면과 더 가깝다.

면만 놓고 보면, 오히려 평양냉면과 유사한 것은 강원도지역에서 유명한 막국수와 일본식 메밀국수(소바)다. 이들 국수는 평양냉면과 마찬가지로 메밀 함량이 최소 60%에서 최대 100%에 이를 정도로 매우 높아 메밀의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밀면이 진주 등 경상도지역에서 먹어온 '밀국수냉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6·25전쟁 때 부산·경남지역까지 내려온 북한 출신의 피란민들이 메밀을 구하기 어려워 평양냉면 대용으로 만든 게 밀면"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특정 음식이 지역 고유의 토대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그것도 단일 요인으로 탄생했을 것 같지는 않다.

진주냉면(진주).

부산 향토음식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상애 신라대 교수(식품영양학과)도 "밀면은 경상도지방에서 먹던 밀국수냉면에 이북의 냉면이 접목되어 바지락 육수가 사골이나 육류 육수로 바뀐 것 등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의 진주냉면이 밀면의 기원이라거나 더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에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 유명했다는 건 정설로 보이지만, 아쉽게도 평양냉면과 달리 진주냉면의 정확한 레시피는 전해지지 않는다. 디포리, 건홍합, 새우 등 해산물을 중심으로 육수를 내 소고기전을 고명으로 얹는 지금의 진주냉면은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수십년 전 '복원'된 형태인 것으로 알려진다.

진주시에 소재한 진주냉면을 대표하는 음식점의 원래 상호가 '부산냉면'이었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밀국수냉면, 진주냉면, 부산밀면 등은 서로서로 부단히 영향을 주고받아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부 밀면 전문점이 진주냉면과 비슷한 해물육수를 사용하고 있는 점도 연관성을 더욱 높여주는 대목이다.

밀면(부산).

앞서 6·25전쟁 때 피란민들 이야기도 충분한 근거와 설득력이 있다. 미군부대가 상주하면서 풍부해졌던 것 중 하나가 밀가루였기 때문이다. 머나먼 북쪽 땅에서 온 평양냉면과 함흥냉면도 어떤 식으로든 이들 냉면·밀면의 맛과 조리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냉면, 특히 평양냉면은 그 심심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만들기 매우 까다로운 음식이다. 소·돼지·닭의 뼈, 고기 등으로 우린 육수와 메밀면의 적절한 조화 자체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메밀이란 녀석이 몹시 예민한 특성을 갖고 있다. 주방의 온도, 메밀 분쇄 방법, 분쇄시 기계 온도, 분쇄 후 공기 노출 시간 등을 엄격히 관리해주지 않으면 메밀의 향과 질감은 급격히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한다.

반면 진주냉면·함흥냉면·밀면은 육수와 양념에 자극적인 요소를 더함으로써, 이런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각자 취향을 어찌할 수는 없겠으나, 맵고 짜고 단 것부터 좀 밍밍한 것까지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식생활이 더 바람직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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