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 거니는 그 시절 추억과 낭만이 오롯이

지난 21일 자 본보에 이상용 마산극단 대표는 '예술인의 아지트, 그 시절 추억의 다방'이란 글을 썼다. 그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지역 예술인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컨티넨탈 다방, 동원다방 등을 이야기했다. 이제 현존하는 예술인의 아지트, 다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흑백 = "1956년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이 일어났단다. 소련군의 철수와 자유를 갈구하는 시민들의 함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오늘도 진해 해군사관학교 강의를 마치고 이곳에 와 차 한 잔을 한다. '소련군의 총에 맞아 열세 살 헝가리 소녀가…' 라디오 뉴스를 들으니 소련제 탱크에 짓밟힌 헝가리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펜을 들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김춘수 시인은 진해 흑백다방에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를 썼다.

흑백다방은 1955년 처음 문을 열었다. 유택렬(1924~1999) 화백은 '카르멘'이라는 음악다방을 인수, '흑백'으로 상호를 바꿨다. 유 화백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으며 진해 해군 교재창(인쇄창)의 군무원으로 일했다. 그때부터 진해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샤머니즘적 조형세계를 모티브로 작업을 했으며 지난 2005년 경남도립미술관서 지역작가 첫 조명전으로 그의 작품 173점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민간신앙에서 주술시 되는 형상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성석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팀장은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던 유택렬은 부적의 개념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용됐음을 알았다. 예를 들어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제2막의 내용 중에 신변에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흰 장미 부적을 건네는 대목이 그것이다"고 말했다.

1955년 처음 문을 연 '흑백'과 1982년 문을 연 '다원'.

이성석 학예연구팀장의 말처럼 유 화백은 클래식 광이었다. 유 화백의 딸 유경아 씨는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직접 배워 연주하실 만큼 음악에 미쳐있었다. 문을 연 이후부터 매달 첫 번째 토요일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빠짐없이 해 온 이유도 그러하다"고 전했다. 지금 흑백다방의 주인은 유경아 씨다. 그는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유 화백이 세상을 떠난 1999년 이후부터 흑백다방을 운영해왔다.

흑백다방은 이중섭, 윤이상, 조두남, 유치환, 서정주, 김춘수, 전혁림 등 예술인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술전시회와 음악연주회, 시낭송회, 연극공연 등이 꾸준히 열렸고 지난 8월에는 영화 <화차>가 촬영되기도 했다.

유경아 씨는 "몇 년 전 다방 폐업신고를 했다. 지난 17일 '시(詩)가 있는 하우스콘서트'가 열렸을 때 간판을 새로 달고 시민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매주 셋째 주 토요일에는 피아노 연주가 있고, 시낭송회, 문학모임, 전시회, 음악연주회 등의 공간이 필요한 분이 있다면 언제든 무료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흑백이 그랬듯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흑백도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남길 기대했다. 흑백에 관한 소식은 유경아블로그(blog.naver.com/bechstein)와 흑백 페이스북(www.facebook.com/yoobechstein)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다원 = 진주시 동성동 9-10번지에 발을 멈췄다. <백제고시원> 연극 포스터와 <호두까기인형> 공연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다원(茶園)'이다. 차를 파는 곳은 분명하지만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원은 1982년 문을 열었다. 지하에 자리 잡은 이곳은 시낭송회, 무용공연, 사물놀이, 음악연주회, 전시회 등이 비정기적으로 열린다.

배길효 사장은 1996년 다원의 아홉 번째 주인이 됐다. 극단 현장에 몸을 담았으며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은 '골목길 아트페스티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골목길 아트페스티벌은 진주시청 이전으로 도심 공동화 현상이 심화한 중안동·동성동 일대를 문화예술이 넘치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고자 지난 2008년 시작됐다.

다원에 눈에 띄는 그림이 있다. 다원의 첫 번째 주인과 단골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다. 배 사장은 "지금은 영남대 미술학과 교수인데, 그가 예전에 이곳을 자주 들락날락했었다고 들었다. 첫 번째 사장님과 친분이 있어 그림을 그려줬고, 약 30년 가까이 똑같은 공간에 걸려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사장부터 배 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다원을 가득 채운 LP판과 책, 피아노 무대까지. 그들의 손때가 고스란히 담겼다. 배 사장은 어떻게 다원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배 사장은 "경상대학교 재학시절부터 다원을 자주 찾았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아했다. 음악이 있고, 미술이 있고, 예술인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다원뿐만 아니라 진주에도 예술인의 사랑방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원만 남았다. 배 사장은 "진주에는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 다원에서는 누구나 쉽게 와 예술을 즐길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전시, 공연 등도 누구나 열 수 있다"며 "열 번째 주인은 내가 꼭 면접을 보고 뽑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표했다. 055-741-2776.

1958년 유택렬이 그린 '자화상', 현 영남대 교수가 그린 당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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