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살린다] (12) 경북 성주군 안언역∼별티∼성주

◇안언역(安彦驛)과 안언역 전투 = 오늘은 용암면 소재지(용암)에서 안언역~별티~성주에 이르는 길을 걷습니다. 용암을 지나면 지척에 안언역이 있던 안상언 마을에 닿습니다. 안언역은 고려시대 22개 역도의 하나인 경산부도(京山府道: 고려 초기 경산부의 중심은 지금의 성주군 성주면에 해당)의 중심 역으로 당시는 안언역(安堰驛)으로 표기했으며, 25개 속역이 있던 큰 역이었습니다. 경산부도는 북쪽으로 김천~추풍령~영동~옥천, 동북쪽으로 상주, 서쪽으로 보은에 이어지는 역로에 걸쳐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김천도(金泉道)에 딸린 역이 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개설된 통영로는 옛 경산부도의 상주로 이르는 길을 따릅니다.

안언역 일원은 임진왜란 초기 1592년 7월 9~10일에 정인홍(鄭仁弘) 의병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곳입니다. 정인홍 부대 중위장이던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은 사원동에 매복했다가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별티까지 추격해 400명 이상 죽이고 많은 물자를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고 전합니다.

옛날에 주막이 있었던 경북 성주군 선남면 장학리에서 본 성주읍의 들머리에 위치한 별티 모습.

안상언(案上彦) 마을은 책상 안(案)에 선비 언(彦)이 있어 과거(科擧) 관련 지명으로 풀이하나 차자표기 방식을 고려한다면 안(內) 언(堰)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안상언을 지나 두리티재로 이르는 길가에는 숙종~정조 연간에 목사를 지낸 오도일(吳道一), 구응(具膺)의 애민선정비와 현감을 지낸 한덕필(韓德弼)의 영세불망비가 서서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줍니다. 몇 걸음 더 가니 길가에 여말삼은대제학문충공도은이숭인선생묘소(麗末三隱大提學文忠公陶隱李崇仁先生墓所) 입구 1.8㎞ 빗돌이 있습니다. 무덤은 용암면 본리 용골소류지 위쪽 구릉에 있는데, 내려보는 풍광이 시원합니다. 도은은 조선 전기 왕권파 이방원과 신권파 정도전의 다툼 때 정도전의 미움을 사 유배지에서 매맞아 죽었습니다. 고려 말 혼란기에 그가 읊었다는 '행로난(行路難)' 칠언절구는 한미FTA 강행 처리 등 지금의 복잡한 시국과 묘하게 겹칩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 말하나 봅니다.

行路難 行路難(행로난 행로난) 길 가기 어렵구나 길 가기 어렵구나/ 我今一鳴 君一顧(아금일명 군일고) 내 이제 한 번 울면 그대 한 번 돌아보소/ 平時坦道 盡荊棘(평시탄도 진형극) 평시에 탄탄한 길도 다 가시덤불/ 白日大都 見豹虎(백일대도 견표호) 대낮 큰 도시에도 늑대 범들 욱실득실(이하 생략).

◇성현(星峴) = 길은 신천을 건넌 뒤 중부내륙고속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성주에 이릅니다. 남성주휴게소 동쪽으로 바짝 붙은 옛길을 따라 작은 재를 넘으면 머잖은 북쪽 선남면 경계에서 두리티재를 넘습니다. 이 고개서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성주 들머리 별티에 이르는데, 중간 즈음 장학리는 옛적에 주막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나무가 있고, 주막 삼거리에서 동북쪽으로는 선남에 이르고 곧장 북쪽으로 가면 별티입니다. 별티(星峴)는 성산(星山) 남쪽 기슭 고개라 그리 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성산가야의 옛 땅인데, 역사적 자취가 이런 지명으로 전해졌다고 여겨집니다. <삼국유사> 기이 오가야에는 성산가야(星山伽耶)를 "지금(고려 초)의 경산(京山)으로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경북 성주군 성주읍 일대입니다.

별티를 내려서면, 성산 기슭에 5~6세기 성산가야 지배층 무덤인 성산고분군(사적 제86호)이 있습니다. 마루금과 비탈에 원형 봉토분이 빼곡하게 있는데, 지금 70여 기가 관리되고 있으나 원래는 수백기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덤들에서 나온 굽다리접시가 경주 지역과 유사하며, 58호 무덤 유물은 전형적인 신라 제품이어서 양 지역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인홍의 별티전투는 앞선 여정에서 살핀 무계전투와 안언전투와 더불어 왜의 진격을 저지한 것으로 임진왜란 의병사에 매우 중요합니다. 전투에서 비롯한 지명이 곳곳에 남았는데, 별티 아래 성산리 시비실(승왜곡: 勝倭谷 왜에게 이긴 골짜기) 등입니다. 길의 동쪽(별티의 동북쪽) 성산 정상에는 봉수와 산성이 있어 별티를 통한 교통이 오래 전 비롯했음을 일러 줍니다.

예서 성주까지는 10리인데 고개를 내려선 성산리 살망태 마을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무덤 3기는 성주의 선사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곳을 지나 이천(伊川)을 건너면 옛 성주읍성에 듭니다. 이천 둔치에는 버드나무 단일 수종의 풍치 좋은 비보림이 있습니다.

정선의 그림 쌍도정. /<산수간에 집을 짓고> 85쪽

◇성주읍성(星州邑城) = 고지도를 보면, 옛길은 남문을 통해 성주읍성으로 듭니다. <여지도서> 성주목 성지에는 원래 토성이던 성을 중종 15년(1520) 석성으로 고쳐 쌓고, 선조 24년(1591)에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 500개를 고쳐 쌓고 해자를 두었다고 전합니다.

성안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동헌인 백화헌(百花軒) 앞에 있던 쌍도정(雙島亭)을 그린 겸재 정선의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그림에는 백화헌 앞에 인공 연지 안에 모나게 쌓아 올린 섬이 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초정(草亭)이 있고, 연못 바깥과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두었습니다.

◇성밖숲 = 읍성 밖에 있다고 성밖숲이라 불리는 이 숲 조성 배경은 <경산지(京山志)>와 <성산지(星山誌)> 등에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성밖 마을의 아이들이 까닭 없이 죽는 등 흉사가 끊이지 않자 마을 주변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라 여기고 재앙을 막기 위해 두 바위 가운데인 이곳에 밤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마을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고 왕버들을 심어 오늘에 이릅니다. 탕건바위와 족두리바위가 마주보고 있어서 재앙이 일어났다고 한 점이나 이를 막기 위해 심은 밤나무가 임진왜란 이후 마을 기강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농밀한 이야기가 있을 법합니다만 더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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