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생태·역사기행] (4) 올해 마지막 나들이…창녕 문화재 탐방

어느덧 연말이다. 세상이 어수선한 탓인지 연말 기분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만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세월에 얹혀 함께 흘러가면서 갱상도 생태·역사 기행 마지막 발걸음을 지난 2일 창녕으로 내디뎠다.

아침 9시 30분 살짝 지나 일행 40명을 태운 버스가 경남도민일보 앞을 출발했다. 신라시대 처음 지어졌다는 관룡사와 용선대, 고려말 신돈의 자취가 어린 옥천사 터, 창녕 읍내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하병수 가옥, 조선 말기 여러 양식의 혼합을 보여주는 성씨 옛집을 둘러보는 나들이다.

10시 30분 조금 못 미쳐 옥천 골짜기 매표소를 지나 두 번째 주차장에 버스가 섰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예스러운 정취가 느껴지는 오솔길로 이어지는 곳이다. 들머리에는 돌장승 부부가 나란히 서 있다. 왼쪽 키가 큰 장승은 영감이고 오른쪽 작은 이는 할멈이다. 할멈은 쪽을 쪘고 영감은 상투를 틀었다. 영감은 입술 밖으로 나온 이가 아래로 향하고 할멈은 위로 솟아 있다. 웃는 듯도 화난 듯도 한 표정이 투박스럽다.

시원한 경치를 자랑하는 용선대 석가여래좌불. /유은상 기자

사람들은 오솔길을 오르면서 짧고 길게 탄성을 내뱉는다. 관룡사 뒤편 오른쪽 병풍바위가 멋지기 때문이다. 곧바로 나타나는 관룡사 돌계단과 돌문도 다른 데서 보기 어려운 물건이어서 연거푸 감탄이다. 절간 마당은 그다지 너르지 않다. 대웅전과 원음각, 요사채와 약사전으로 둘러싸여 조그맣지만, 아늑한 맛은 있다.

사람들은 마당을 한 바퀴 두르고 전각을 기웃거린 다음 대웅전 왼편으로 난 자드락 산길로 접어든다. 500m 정도 10~30분 걸려 오르면 남쪽으로 삐죽 나온 용선대에서 석가여래좌불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조금 둔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람하고 잘 생겼다는 평을 받는 통일신라 말기 작품이다. 부처 눈길은 동쪽 해 뜨는 쪽으로 뻗어 있다. 그 눈길 아래에는 관룡사가 자그마하게 놓여 있다.

사방으로 모두 눈맛이 좋다. 부처 눈길을 따라 앞산을 더듬다가 왼쪽으로 돌리면 병풍바위가 시원스레 들어온다. 그러다 고개를 왼쪽으로 한 번 더 꺾으면 뒤편에는 너른 들판을 품은 화왕산성이 나타난다.

눈길을 남으로 돌린다. 산 아래 사람들 사는 마을과 논과 밭 들판과 옥천 저수지가 펼쳐져 있다. 가까이서 느끼면 악다구니 쓰는 소리도 나겠지만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니 사람 사는 속세조차 고즈넉하게 다가온다.

폐사지가 된 옥천사 유적들.

내려와 옥천사터에 들어간다. 관룡사 오르는 길과 화왕산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어름 왼쪽 수풀 속에 있다. 옥천사는 고려말 개혁 세상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려다 실패한 스님 신돈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그이는 공민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권문세족의 권한과 재물을 줄이려고 애썼다.

당시 귀족들은 양민의 논밭을 빼앗고도 모자라 양민 자체를 자기네 노비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전(田)과 민(民)을 귀족들이 독차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흉흉해졌다. 나라 전체의 생산은 늘지 않았고 조정의 곳간은 조세를 걷지 못해 텅텅 비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과 신돈은 배짱이 맞아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문세족의 저항은 아주 거세었다.

결국 신돈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빼앗겼다. 신돈을 미워한 권문세족은 신돈의 근거지라 할 옥천사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다른 폐사지와 달리 옥천사 터에는 사람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어 망가뜨린 자취가 뚜렷하다. 석탑이든 석등이든 제 자리에 온전하게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징으로 내리쳤거나 쐐기를 박았던 자취가 지금도 선명하다. 산산조각난 옥천사터에 서면 당시 권문세족의 원한과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들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바로 먹을거리. '토속 고향 보리밥'(055-521-2516)에 들러 두부랑 보리밥이랑 푸짐한 반찬에 더해 동동주까지 한 잔 걸쳤다. 원래 책정된 예산보다 7만원가량 더 나왔는데 이는 나중에 십시일반으로 걷어 메웠다. 다음에 또 오겠노라면서 명함을 받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일행은 버스를 타고 창녕읍내 술정리 동삼층석탑으로 향했다. 현장에서는 이날 가이드를 맡은 김량한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씨는 동탑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못지 않으며 몸돌 갯수는 석가탑의 33개보다 오히려 적은 24개라 했다. 또 경남에서는 가장 큰 석탑이라고도 덧붙였다.

창녕읍 술정리 동삼층석탑.

하병수씨 가옥은 동탑 바로 옆에 있었다. 억새로 지붕을 이은 이 초가는 원래 쇠못을 전혀 쓰지 않았고 지붕에 흙을 올리지(仰土) 않았으며 그리고 대패질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쇠못도 썼고 대패질도 했다. 다만 앙토는 지금도 하지 않았다. 일행들은 이런 설명에도 귀를 기울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뒤뜰과 꽃밭에도 눈길을 쏟았다. 안주인이 맨드라미 따위 갖은 화초를 잘 가꿔 놓은 가지런함이 좋았던 것이다.

창녕읍 하병수 가옥 모습.

마지막 일정은 대지면 석동 성씨 옛집. 3시 조금 넘어 닿은 성씨 옛집은 그야말로 저택이었다. 3대가 한 울타리 안에 서로 영역을 나눠 살았다. 또 일대 너른 평야를 소유했던 집안이다 보니 나름대로 갖춰놓고 사는 것이 많았다. 전통 양식과는 달리 화장실이 집안에 들어가 있는 점도 색달랐다.

성씨 옛집을 둘러보는 참가자들.

이런저런 설명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별당 앞 연못과 자연스레 펼쳐진 후원에 많이 끌렸다. 연못 둘레에서 사람들 노닥거렸을 풍경을 떠올렸고 참나무와 대나무가 그저 그렇게 자라나 있는 후원의 청신함이 좋았던 모양이다. 곳곳에 놓여 있는 손씻기용 돌확에도 사람들 손길이 많이 머물렀다. 둥글거나 복숭아 모양이었는데 복숭아는 다산(多産)을 뜻한다고 했다.

오후 4시 30분 살짝 넘은 시점에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길이 막히지 않아 1시간도 안 걸려 경남도민일보 앞에 도달했다. 멋진 길을 걷고 맛난 음식을 먹고 보기 드문 문화재를 눈에 담은 2011년 마지막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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