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의 바딘광장! 좌측에는 호찌민영묘, 우측에는 베트남 국회의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치 중국 톈안먼광장의 모택동 주석 기념당과 인민대회당사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처럼 베트남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 호지명(胡志明)이라고 우리가 불렀던 베트남의 국민영웅 호찌민이 잠들어 있다. '호 아저씨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가 적힌 바딘은 1945년 호찌민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자리다.

박호! 베트남 사람들은 누구나 호찌민을 그렇게 부른다. '박'은 아저씨나 큰아버지에 해당하는 베트남어다. 호 아저씨. 사치와 탐욕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가 남겨 놓은 것은 혼자 살았던 열 평 남짓한 목조주택뿐이었다. 1945년 독립한 베트남의 주석이 되어 1969년 운명할 때까지 24년 동안을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1식3찬의 식사, 독신의 청렴한 삶을 살다간 그는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라고 유언장에 남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레닌과 마오쩌둥,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의 김일성과 더불어 '엠바밍(embalming)'이라는 기술로 방부 처리됐다. 레닌의 시신 영구 보존 작업을 수행한 러시아 '생물구조연구센터'에서는 영구보존 처리 과정이 끝난 다음에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해서 2~3년에 이들을 한꺼번에 모아 발삼향액 수조에 한 달가량 담가놓는 모양이다. 물론 그때는 영묘를 찾는 수많은 인민들은 발길을 돌려야한다.

구엔 신 쿵, 구엔 타트 탄, 구엔 아이 쿠옥(阮愛國) 등의 여러 이름을 가지고 방부처리된 유리관 안의 호찌민은 하얀 얼굴로 여전히 검소하게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우상화를 원치 않았던 '호 아저씨'의 마지막 희망을 왜 베트남인들은 지켜주지 못했던 것일까?

1924년 사후 레닌은 방부 처리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묘에 안장됐다. 어머니 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그는 영구보존용 미라가 된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마오쩌둥도 화장 후 산골(散骨)을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던 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베이징 시내 톈안먼 광장의 기념관에 안치됐다. 미라로 바뀌어 '영생 중'인 공산 혁명가는 레닌 이후 스탈린 호치민 등을 거쳐 김일성까지 모두 9명이나 되었다.

   
 

기리는 법과 기념하는 법이 어떤 것인지 한편에서는 2005년 발매된 한대수의 '고민'이라는 앨범에 수록된 호찌민이란 노래가 있었다. 중간 중간에 여자목소리의 추임새가 있었던 노래 '호치민'을 비가 질척거리는 바딘광장의 회색빛 묘지에다 들려주고 싶었다.

/황무현(마산대학 아동미술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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