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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사랑 잃은 여인 쓸쓸한 사연을 노래로

[고향사람] 국내 최고령 가수 반야월 선생

우귀화, 임종금 기자 wookiza@idomin.com 입력 : 2011-11-28 16:42:28 월     노출 : 2011-11-28 16:42:28 월

지난달 25일 작사가 반야월(半夜月·95·본명 박창오·사진) 씨를 경기도 안성에서 만났다. 반야월 씨는 경기도 안성시민회관에서 열린 신인가수 선발대회인 제5회 전국안성가요제에 초청돼, 서울에서 안성까지 왔다. 지팡이를 짚고 시민회관에 도착한 반 씨 뒤에는 그의 셋째 딸 박희라(58) 씨가 있었다. 박희라 씨는 반야월 씨 곁에서 인터뷰를 도왔다. 한 때 아버지를 이어 가수로도 잠깐 활동한 박 씨는 6년 전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반야월 씨의 귀가 어두워진 탓에 취재진의 질문을 큰 소리로 전하며 통역 아닌 통역을 했다. 반야월 씨는 줄곧 호탕하게 웃으며 대화를 했지만, 힘겨웠던 시절도 빼놓지 않았다. 인터뷰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돌아오는 등의 행동으로 급한 성격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건이 많아. 가요계 73년이나 됐는데, 얼마나 사건이 많았겠어. 그러나 73년 동안 기쁨은 적고, 슬픔이 많아. 알겠어? 내 생애가 그래. 그래서 슬픈 노래가 많이 나온다고. 내가 그래. 내 슬픔을 극복하고, 오래 살고 있어. 내일 모레 100살이야.”

   
 
  국내 최고령 가수 반야월 선생(95)과 그의 딸 박희라 씨./김구연 기자  

반야월 씨는 현재 국내 최고령 가수이자 작곡가이다. 함께 활동했던 동년배는 세상을 떠난 지 한참이고, 후배들마저도 앞세웠다. 그런 그이기에 슬픔을 토로하는 얘기가 나왔다. 그는 “마음을 어질게 먹고, 베풀기 좋아하고 동정이 많고, 눈물이 많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그는 1917년 마산에서 태어나 이십대 초반인 1937년 충북 청주로 갔다. 부모님이 하시던 사업이 마산에서 실패를 하자, 생계를 책임지던 그가 청주 삼촌이 운영하던 양복점에 일하게 됐다. 청주 삼촌댁에서 1937년부터 1939년까지 2년 정도 일하다, 양복점 친구의 권유로 같이 전국가요음악 콩쿨대회에 나갔다 혼자 1등을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됐다.

그렇다면, 마산에서 유명한 <산장의 여인>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산장의 여인>은 마산 가포의 결핵병원 인근 산장병동의 한 여인의 사연을 듣고 즉석에서 지은 곡으로 알려져 있다. 반 씨는 당시를 회고했다.

   
 
  반야월 선생./김구연 기자  

“한국전쟁 직후 마산방송 문예부장으로 결핵병원에서 위문공연 할 때였어. 단원들이 노래를 부르고 하는데, 끄트머리에 있는 여자가 자꾸 울기만 하고 그래. 그래서 직원에게 물어보니까 여기 본동(병원)에 있는 여자가 아니고 건너편 산속 병동에 있는 여인이래요. 그래서 산장의 여인이 나온거야. 병 때문에 애인한테 실연을 당한거지. 참 안됐다 했어. 노래는 거짓말로 못 만들어. 자기 느낌대로 해야 해. 노래는 거짓말 하면 안 돼. 진실로 해야 해. 권혜경이에게 부르라고 했다. 산장에 있던 그 여자가 이후에 행복하게 살았는지, 어찌 살았는지는 몰라.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지. 산장에는 가보지 않았고, 병동 서너 동 있다고 들었어.”

그는 결핵병원에는 그 때 한번 가봤다고 했다. 결핵환자들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해서, 가포로 몰렸다고 했다. <산장의 여인>을 작곡한 이재호 씨도 폐결핵을 앓아서 산장에 보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반야월 씨는 “마산에 있던 후배가 이재호 씨를 산장에 보내려고 하는데, 안 들어가려고 했지. 그래서 서울 동대문 근처에 뱀을 삶아서 국물을 마시라고 했는데, 안 먹으려고 했어”라고 기억했다. 폐결핵을 앓는 이들에게 뱀탕이 민간요법으로 통하던 때였다. 일반 동네에서 살지 못하던 폐병 환자들이 산장에 많이 들어가자, 산장이 애잔해 보여 <산장의 여인> 뿐 아니라 <산장은 말이 없네>, <산장의 숙이> 등과 같은 곡도 썼다.

고향 마산에 대한 기억을 더 묻자, 서운한 감정도 털어놨다.

“마산은 내가 못 살아서 떠났어. 못 살아서 떠났는데 내가 고향을 좋아할 수가 있어요? 객지로 전전했는데…. 내 고향 마산이지만, 그렇게 탐탁하지 않아. 지금도 마산은 잘 안 가요. 갈 일도 잘 없고. 마산에 내가 언젠가 가요제 한번 했잖아. 근데 그 느낌이 안 좋았어. 기쁘게 안 받아주는 마산 무슨 필요가 있냐. 딱 한번 하고 말았어.”

속사정은 이렇다. 지난 2006년 반야월 씨의 허락을 받아 마산MBC가 반야월가요제를 열었다. 그 이전에 한국연예협회 마산지부가 1994년부터 2002년까지 9년간 반야월가요제를 진행했다. 이 때문에 새로 열린 가요제의 주최권 공방이 오가다, 결국 이듬해부터는 가요제가 열리지 않았던 것. 박희라 씨는 “과거 연예협회 측에서 우리 허락을 받았다고 했는데, 우리는 몰랐다. 허락을 맡았더라도 본인이 살아있으면 그 가요제에 반야월이라는 사람을 초빙해야 하는데, 9회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충북 제천시와 마산시를 비교했다. 박 씨는 “아버지가 못 살아서 떠났어도 고향에 내려가서 가요제를 하려고 했는데, 고향 시민들이 나타나서 못하게 하니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 제천시는 ‘울고 넘는 박달재’ 하나로 아버지를 환대한다”고 했다. 반야월 씨는 인터뷰 자리에서 “내가 자란 고향보다도 제천이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지은 곡이 5000여개에 이르기에 그만큼 소재도 다양하다. 전국 곳곳이 가사에 녹아들었다. 그가 지은 <울고 넘는 박달재>, <삼천포 아가씨>, <만리포 사랑> 등으로 전국 14곳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렇게 많은 곡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는 뭘까.

“아, 그걸 알아서 뭐해. <단장의 미아리 고개>도 있고, <산장의 여인>도 있고, <울고 넘는 박달재>도 있고. 많이 있지.”

그는 잠시 후 자신이 지은 <비 내리는 삼랑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배추밭에 복실이도 오양간에 송아지도/잘 있거라 하직하고 복돌이는 떠나는데/어머님은 무명수건 눈물을 적시면서/아들 따라 오십리 길 한사코 오시었오. (중략)”

반야월 씨는 한 곡 부른 후 유쾌하게 “이런 사람 봤어?”라며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가수 생활을 했으니까 노래를 잘 불러. (1939년) 노래 콩쿨대회 1등해서 태평레코드 전속 가수가 된 거야. 가수 하면서 태평레코드에서 내 작품도 발표하고 그런 거지”라고 덧붙였다.

가수 생활을 하면서 ‘진방남’(진나라의 꽃다운 사나이)이라는 예명을 쓰게 됐다. 1942년 <넋두리 이십년>, <꽃마차> 등으로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밤에 뜬 반달’이라는 뜻의 대구 지명 ‘반야월’이라는 이름을 지금까지 쓰게 됐다. 지난 9월 25일 방영한 KBS1 TV <TV 자서전>에서 그는 “반달은 크게 되니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반야월’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진방남’, ‘반야월’ 이외에 ‘추미림’, ‘남궁표’, ‘허구’ 등의 예명도 썼다. 박희라 씨는 “아버지에 대한 시기가 많아서 이름을 바꿔서 곡을 지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반야월꺼다’ 하면 잘 팔리니까 다시 반야월 이름으로 곡이 나왔다고 한다”고 했다.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물었다. 반야월 씨는 지난해 6월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 초청간담회에서 <결전 태평양>, <일억 총 진군>과 같은 군국가요 작사에 참여한 부분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행적 탓에 지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에 포함됐다.

여기에 대해서는 박희라 씨가 대답했다.

박 씨는 “1절부터 노래를 일본 말로 부르라고 하던 시절이다. 그렇지만 싸워서 3절부터 일본말로 불렀다. 노래 녹음을 일본에서 하던 때였다. 일본에 녹음을 하러 갔는데 태평양 전쟁이 터졌다. 그 때 사장이 아버지가 (군국가요) 작사를 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못 돌아가니까 가사를 적게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박 씨는 “시대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굴복을 한 건데, 거기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이다. 어쨌든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핑계다.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이 인정을 해야 하니까”라고 말했다.

   
 
  반야월 선생과 그의 딸 박희라씨. 종종 반야월 선생이 힘들어 하면 딸이 나서서 답변을 하기도 한다. /김구연 기자  

반야월 씨의 요즘 일과가 궁금했다. 한국전통가요사랑뿌리회 회장인 그는 서울 인현동 사무실에 매일 출근한다. 한국인이 최초로 작사·작곡을 한 1932년 발표된 대중가요 <황성옛터>부터 잊힌 작사가, 작곡가, 가수를 찾는 모임이다. 지금 62인을 찾아서 종로 5가에 있는 대각사 절에서 추모제를 지낸다고 했다. 매달 월요일에 모여서 옛날 노래도 부르고, 요즘 유행하는 노래도 부른단다.

백수(白壽)가 코앞이지만, 여전히 정정한 반야월 씨. 그의 남다른 건강 비결도 궁금했다. 안성가요제 관계자들이 사온 팥이든 ‘비비빅’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건강 비결의 해답은 역시 모범 답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채식위주 소식과 매일 걷기, 호탕하게 웃기, 긍정적 대화, 노래하기 등이었다.

   
 
  반야월 선생은 호탕하게 자주 웃는다. 그게 장수의 비결이라고 한다. /김구연 기자  

그의 딸 박희라 씨는 아버지가 요즘은 성격이 급해져 ‘속전속결’을 외치는 일이 잦아졌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한 숟가락 뜨면, 벌써 밥값을 내고 오기도 한다고. 지금까지 단체도 많이 만들고, 단원들도 이끌고 하면서 ‘빨리 빨리’가 몸에 밴 듯했다. 반야월 씨는 인터뷰가 길어지자 도중에 자리를 잠시 뜨기도 했다. 주변에 있던 지인들은 오래 참은 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커피 값 하나하나 일일이 수첩에 적는 철저한 습관의 소유자. 평생 노래를 부르고 지으며 살아온 반야월 씨는 안성에서 노래를 부르고, 만드는 일을 하는 동종업계 사람들을 만나자, 먼저 기념촬영을 요청하며 반가이 맞았다. “한 시절 다 갔다. 세월은 흘렀다. 너그 세상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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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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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사회부 기자입니다. 경남지방경찰청, 법원, 검찰, 진해경찰서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