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서후의 컬러풀 아프리카 2편

1990년 2월 11일. 케이프타운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늦여름이었다. 이날 오후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었다. 27년간의 긴 수용생활을 끝낸 뒤다. 만델라를 태운 차는 케이프타운 시내를 돌며 퍼레이드를 했다. 그리고 만델라는 시청 발코니에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I stand here before you not as a prophet but as a humble servant of you, the people. 나는 여기 여러분 앞에 선지자가 아니라 종으로 섰다.

이때 그의 나이 71살이었다. 그리고 그 발코니는 필수 관광코스가 됐다. 도시관광버스를 타고 케이프타운 시청을 지나면서 71살이 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시 생각한다. 발코니 아래 사람들이 그저 무심히 길을 걷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선 참이다. 오늘은 용감하게 근처 동네 구경을 가기로 한다. 백인이 주로 산다는 주택가는 진짜 예쁘다. 아기자기하다. 규모는 작아도 집집이 작은 정원과 풀장이 있다. 한 시간 정도를 걷다 보니 워터프론트다. 여기서 도시관광버스를 탄다. 햇볕이 따갑지만, 제대로 구경을 해보자는 생각에 뚜껑이 없는 2층에 앉았다.

시티투어버스는 빨간색 노선과 파란색 노선으로 나뉜다.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빨간 노선이 주로 도심을 중심으로 운행한다면 파란색은 교외를 돈다. 도시의 상징인 테이블마운틴에 가려면 빨간 노선을 타야 한다.

도심을 이리저리 돈 버스가 드디어 테이블마운틴 입구에 도착한다. 케이블카를 탄다. 걸어서 올라가는 이들도 제법 된다. 하지만, 이 더운 날에 그늘도 없는 1085m 높이의 산을 걷고 싶지는 않다. 케이블카가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올라가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어? 근데 이거 이상하다. 이런, 케이블카 바닥이 돈다. 참, 배려심도 깊다.

케이프타운 백인 거주 지역./이서후 기자

케이블카 안에 유독 섹시한 아가씨가 두 명 있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했나 보다, 누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수단, 이란다. 수단이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아무튼, 수단 아가씨들 관능적이다!

와, 정상은 진짜로 평평했다. 동서로 3km, 남북으로 10km나 되는 평지다. 도대체 이 경치는 무엇인가.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산’하고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런 것도 산이라 불리는구나. 뒤를 돌아 케이프타운 시내를 내려다본다. 마치 비행기에서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는 것처럼 넓고 환한 광경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웅 하고 지구가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처음에 왁자하던 관광객들도 거대한 경치 앞에서 점차 말을 잃고 있었다. 그때 문득, 놓아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움켜쥐려고 아등바등했던 모든 걸 여기다, 이 산 위다 버리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저녁은 마트에서 산 치킨 카레로 때운다. 오랜만에 밥 다운 밥을 먹으니 속이 편하다. 내친김에 바나나도 사 먹었다. 자려고 보니 옆 침대에 새로 온 녀석이 있다. 캠프 벨, 20대 초반의 남자애인데, 2년간 세계를 돌고 있단다. 이런 놈들이 진짜 배낭여행족이다.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는 것만큼이나 열심히 세상을 떠도는 일도 필요하다. 길 위에서 만나, 다시 길 위에서 헤어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나이는 한국에서나 중요하다. 여행지에서는 누가 더 많은 경험을 했느냐를 쳐준다. 스승은 여행지 어디에나 있다.

케이프타운 도심지 모습./이서후 기자

안녕, 펭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표적인 종족 줄루(Zulu). 그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별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지구도 없고/ 없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방은 어둠/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없음/ 비어 있음보다 더 고약한 없음/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영원한 없음

이는 기독교가 말하는 태초 이전, 불교가 말하는 무색계(無色界)다. 이 영원한 없음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 일어나니 그것이 생명이다. 이렇게 생명은 빛으로 시작했다. 빛은 태양이다. 도미토리 2층 침대에서 몸을 뒤척인다. 새벽 5시.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날이 밝는다. 드디어 영원한 없음이 색계(色界)가 되었다. 눈부시게 맑은 아침이다.

오전 8시 45분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어제 희망봉 일일 투어를 신청했다. 아, 버스가 아니라 승합차다. 뒤에 자전거를 실은 수레가 달렸다. 자신을 아이작이라고 소개한 젊은 흑인이 드라이버 겸 안내자다. 승합차는 시내 곳곳에 있는 숙소를 돌며 오늘 하루 여행객을 태웠다. 나와 함께 각각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핀란드에서 온 6명의 젊은이가 모였다. 도이치뱅크에서 일한다는 핀란드 청년만 심드렁할 뿐 나머지는 무척 기대하는 표정이다.

방향은 남쪽이다. 도심을 벗어난 차는 해변을 따라 달렸다. 바다는 대서양이다. 풍경이 시원하다. 바다와 산비탈이 만나는 지점에 관광객을 위한 하얀 숙박시설이 늘어섰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호우트 베이(Hout Bay)다. 호우트는 네덜란드어로 나무를 말하는 데 항구 건설로 숲을 없애기 전에 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작고 아름다운 항구다. 이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가까운 물개섬을 둘러보는 상품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햇살을 즐기고 싶어 항구에 머물기로 했다. 가게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선착장을 따라 걸었다. 아프리카 공예품을 파는 노점이 쭉 널렸다. 그 바로 앞바다에 물개 서너 마리가 놀고 있다. 관광객이 먹이를 던져주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선착장 한편에는 어부가 갓 잡은 다랑어를 손질하고 있다. 1m는 됨직한 다랑어는 덩이로 잘려 바로 팔려나간다. 이 모든 광경이 너무나 환하게 빛났다. 눈부시게 맑은 햇빛 때문이다.

채프먼의 언덕./이서후 기자

차가 다시 출발했다. 급경사를 오르던 차가 고갯길에서 갑자기 멈춘다. 채프먼의 언덕(Chapman's Peak)이라 불리는 곳이다. 말발굽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호우트베이와 그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는 하늘을 닮아 눈부신 코발트블루. 온몸이 시원해지는 광경이다.

남쪽으로 15분 정도를 더 달려 도착한 곳은 아담하고 예쁜 해안 마을 시몬스타운(Simon's Town)이다. 1743년부터 백인들이 이주를 시작해 영국 해군기지, 남아공 해군기지로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이 유명한 까닭은 바로 아프리카 펭귄을 볼 수 있어서다. 이 마을 앞 볼더스 비치(Boulders Beach)에는 남아프리카 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자카스펭귄(Jackass Penguin)이 살고 있다.

입장권을 사서 관광객용 데크를 따라 걷다 보면 작고 귀여운 펭귄들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괜히 물려서 손가락 잘리지 않게 조심하라는데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가만히 서서 자는 게 일인 듯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게 중 한두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해변을 뒤뚱뒤뚱 어슬렁거린다. 그 걸음걸이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이 펭귄 무리는 100년 전 펭귄고기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해변에서 사라졌었다고 한다. 그러다 1983년 펭귄 한 쌍을 데려오고 나서부터 다시 수가 늘기 시작해 지금은 관광객을 무지하게 끌어들이는 명물이 됐다.

펭귄들을 뒤로하고 이젠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탄다. 해안을 따라 펼쳐진 낮은 관목지대, 그 한가운데를 힘차게 가로지른 직선 도로, 구름 한 점 없이 찬란한 하늘, 거칠 것 없이 시원한 이 풍경 앞에 나는 차라리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시각적 오르가슴이었다!

한참을 가다 원숭이 떼를 만났다. 바분(Baboon)이라 불리는 개코원숭이다. 새끼를 포함한 대식구다. 덩치도 크고 성질도 사나워서 조심하라고 안내책자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길가에 앉아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그리 무서워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동물원과는 다른 어떤 생생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페달을 밟기를 잠시 이번엔 타조가 한 마리 나타났다. 엥? 바닷가에 타조라니! 생뚱맞다. 깃털이 온통 검은 수컷이다. 앗, 한 마리만 있는 줄 알았더니 4~5마리 더 있다. 우리를 보고 놀랐는지 갑자기 타조들이 달린다. 속도가 상당하다. 순식간에 우리 앞으로 혼자 자전거 속도를 내고 있던 핀란드 친구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으악! 깜짝 놀란 그가 움찔하며 급히 멈춰 섰다. 그 모습에 우리 일행은 한참을 웃었다.

희망봉에 도착했다. 정확하게는 희망 곶(cape)이라 부르는 게 맞겠다. 이곳에 봉우리는 없다. 단단한 바위로 된 양수리(兩水里),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두물머리다. 꼭대기에 오르니 바닷바람이 거세다. 파도도 거칠다. 과연 1488년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이곳을 발견하고 폭풍의 곶(Cape of Storms)이라 불렀음 직하다. 암석으로 된 언덕 위에 서니 날려갈 것 같다. 나중에 포르투갈 왕이 희망(Good Hope)으로 이름을 바꿨다. 식민주의자들에는 희망의 상징이었고 아프리카인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희망봉에서 능선을 따라 등대가 있는 케이프포인트(Cape Point)로 오른다. 등대는 잦은 안개로 쓸모가 없어졌다 한다. 그래서 지금은 전망대로 활용하고 있단다. 왼쪽은 인도양, 오른쪽은 대서양이다. 이름을 붙인 건 인간의 생각일 뿐, 바다는 그저 한결같았다.

희망봉에서 바라본 대서양과 인도양./이서후 기자

와인에 취한 노을

다음 날 오전 일찌감치 일어나 1층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시간 로비 주방에는 항상 마음이 푸근하게 생긴 흑인 아주머니가 계시다. 케이프타운에 온 후로 매일 아침 이곳에서 이분이 구워주는 토스트를 먹었다.

이날도 아침을 먹는데 웬 덩치 큰 백인 남성이 옆에 앉아 자꾸 말을 건다.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끝에 나온 말은, Are you happy? 엥? 행복하냐고? 그걸 왜 묻지? 알고 보니 이 남자, 오늘 하루 투어를 책임질 드라이버 겸 안내자다. 그니까 나와 다른 어떤 남자랑 둘이만 가게 됐다, 보통은 열 명 이상 우르르 다니는데 둘 만 가니 충분히 구경할 수 있다. 그래서 좋으냐고 물어본 거였다.

남아공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게 가든루트(Garden Route)와 와인루트(Wine Route)다. 가든루트는 말 그대로 정원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따라 돌아보는 여행길이다. 와인루트는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도시 세 곳을 아우르는 여행길이다. 경치는 앞으로 한 달간 남부 아프리카를 돌며 충분히 볼 예정이다. 그래서 남아공 와인을 마셔보기로 했다.

케이프타운 교외 휴양지역./이서후 기자

케이프타운 근교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건조하고 긴 여름, 눅눅하고 비교적 온화한 겨울은 와인용 포도를 재배하기 좋다. 여기에다 케이프닥터(Cape Doctor)라 불리는 바람은 포도의 숙성도를 높인다. 1659년부터 케이프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는 미국 캘리포니아나 호주, 뉴질랜드보다 앞선다. 자료를 보니 나폴레옹이 케이프 산 와인을 즐겼다. 찰스 디킨스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도 케이프 와인의 맛을 높게 평가하는 내용이 나온다 한다.

오늘 돌아볼 곳은 팔(Paarl), 스텔렌보쉬(Stellenbosch), 프란쉬후크(Franschhoek)란 도시다. 이들을 케이프타운 서쪽 지역에 서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 삼각형을 중심으로 수백의 크고 작은 와이너리(Winey: 포도농장 겸 와인 제조장)가 있다.

팔 지역의 와이너리 Fairview 포도 농장./이서후 기자

도시별로 와이너리 한 곳을 둘러보는데 6종류의 와인을 골라 테이스팅(tasting) 할 수 있다. 처음으로 간 곳은 팔 지역의 Fairview라는 와이너리다. 이곳은 남아공에서도 제법 와인을 잘 만드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만드는 치즈도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염소가 보인다. 염소 집이 특이한데 2층 높이의 탑을 만들고 탑 주위에 나선으로 촘촘하게 계단을 만들었다. 그 계단으로 염소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테이스팅룸에 들어가니 소믈리에가 와인리스트를 준다. 종류만 수십 가지다. 와인 초보라고 하니 먼저 달콤한 디저트 와인을 마시라 했다.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하얀 종이를 받치고 색깔도 보고 냄새도 맡는다. 잔을 몇 번 돌리고서는 입안에 조금 머금은 채 이리저리 굴려도 본다.

그리고 소믈리에는 탄닌(Tannins)을 비교하라며 레드 와인 몇 종을 권한다. 탄닌이 많을수록 떫은맛이 난다. 그리고는 떼누아르(Terroir)를 설명하는 데, 이는 포도가 자란 토양의 특성이 와인의 향이나 맛으로 묻어나는 것을 말한다.

와인을 한 잔 마시고 나면 바로 옆 치즈 판매장에서 맘껏 치즈를 먹을 수 있었다. 치즈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었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갔다 어느새 여섯 잔을 마셨다.

다음에 간 곳은 프란쉬후크의 ‘Vrede en Lust(이건 발음이 너무 어려워)’다. 테이스팅룸에 달린 큰 창으로 아담한 포도밭이 보이는 근사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미모의 백인 아가씨들이 서빙을 한다.

한적한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와인루트의 핵심인 스텔렌보쉬로 향했다. 이곳은 전형적인 대학도시로 스텔렌보쉬 대학을 중심으로 주거와 상가가 형성돼 있다. 이 대학 와인관련 학과가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도시는 말쑥했다. 건물과 도로가 아기자기하고 거리도 깨끗하고 산뜻했다.

시내를 구경하고 우리가 간 곳은 Villiera Wine Farm. 이곳에서는 와인 생산 공정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탱크와 컨베이어 벨트 등 현대화 시설에서 만들어진 와인이 수많은 오크통에 담겨 창고로 옮겨졌다.

공장을 나와 테이스팅 룸에서 마지막 와인을 마시고 나니 어느덧 노을이 지려 하고 있었다. 노을이 참 곱다고 느끼기엔 취기가 제법 얼큰하다. 와이너리 세 곳에서 각 6잔씩 모두 18잔을 마셨다. 몽롱한 정신에 주위는 온통 황금빛 노을. 지금, 나는, 꿈을 꾸는 걸까.

이제 케이프타운을 떠날 때가 됐다. 저녁을 먹고 바에 앉았다. 케이프타운에서 마지막 밤. 오늘은 술을 좀 마시기로 한다. CASTLE, HUNTERS, TATEL. 낯선 이름의 맥주에 서서히 취기가 오른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모르겠다. 그저 길을 걷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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