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희망찾기-시민운동가] (12) 설미정 '꽃들에게 희망을' 희망지기

이상적인 조직 혹은 (시민)단체를 한번 상상해보자. 첫 번째 조건은 뭐니 뭐니 해도 구성원들의 자발성일 것이다. 몇몇 소수가 아닌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로 움직이는 조직. 사실 이런 조직은 소통구조, 위계관계가 수평적이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다 함께 하는 일이 공공의 이해에 맞으며, 서로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조직 분위기까지 자리 잡고 있다면 더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창원시 사파동에 소재한 '꽃들에게 희망을'(이하 꽃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바로 그런 '이상'에 가까운 사회봉사 단체다. 정부나 자치단체로부터 한 푼의 지원도 없이 오직 회원·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고 있으며,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명망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구성원의 직함(?)은 그저 '희망지기'일 뿐이다.

어떻게 이런 단체가 운영이 가능할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지난 2000년 결성 이후 10년 넘게 상근 활동비조차 받지 않고 꽃들에 헌신해온 설미정(42) 희망지기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꽃들 '대표'로도 알려져 있으나 설 씨는 "언론 등 외부에서 붙여준 직함이지 우리한테 대표 같은 건 없다. 난 그저 사무실을 지키는 또 한 명의 희망지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창원시 사파동에 있는 '꽃들에게 희망을' 설미정 희망지기. /박일호 기자 

사실 운영 방식은 간단하다. 회원을 비롯한 시민들이 돈, 밑반찬, 쌀, 간식거리, 차량, 노동력 등을 기부하면 이를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층 가정에 지원하는 것이다. 정기·부정기적으로 이렇게 참여를 하는 희망지기 규모는 총 400여 명으로, 이들의 한톨 한톨 정성에 의해 매달 110가구가 쌀을, 매주 28가구가 밑반찬을 지원받고 있다. 꽃들은 이외에 국경일 김치, 저소득층 아이들 학습 지원 활동도 펼친다.

물론 하루아침의 성과는 아니다. 결성 초기 설미정 씨를 비롯한 '언니들' 15명이 중심이 되어 '질기게, 악착같이, 끝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한 결과다. 처음엔 사무실도 없어 다른 시민단체에서 더부살이까지 했다. 길바닥에 나앉을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돈 있는 사람은 돈을, 정육점 주인은 고기를, 방앗간 주인은 떡을, 트럭 운전사는 운송을,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몸'을 지원하게 했다. 무료급식소 같은 데 설거지 봉사를 나가면 그 덕에 김장김치를 얻어올 수도 있었다.

설 씨는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요긴한 물품으로 만들어, 어려운 가정을 찾아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일종의 '허브' 역할을 했다. 그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는 게 있으면 이를 나누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걸 좀 더 짜임새 있게, 재미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면서 "각자 스스로 '주체'로 느끼게끔 운영하고 챙기고 소통한 것도 꽃들이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안 될 때는 막 덤비고 협박하고 그러기도 한다(웃음)"고 말했다.

꽃들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주변의 시선은 예의 따가웠다. "좋은 일이지만 얼마나 갈까?"란 회의부터 "봉사 활동이 사회변혁에 무슨 도움이 되냐?"는 냉소까지 다양했다. 부산 출신이자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한 설 씨는 "창원은 부산·마산처럼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했다. 하지만, 좀 더 깊숙이 다가가 보니 사람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사파동 한 작은 동네에서 소리 소문 없이 내디딘 발걸음은, 지금은 마산·창원·진해 전체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는 "사회변혁 운운했던 선배도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며 "사실 세상이 변하려면 사람이 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세상은 못 믿어도 사람은 믿게 됐다. 10년 넘게 변함없이 꽃들을 지원하는 분이 많다. 측은지심, 즉 남의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만큼 중요한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꽃들은 이처럼 어떤 급진적 변혁을 추구하는 조직도 아닌데다 또 대다수 봉사단체가 다양한 경로로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 현실이기에, 마음만 있다면 좀 더 풍족하게 단체를 운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꽃들은 처음부터 이를 배제했다. 왜였을까?

"꽃들은 우리가 직접 어려운 사람을 찾아내 지원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부나 지자체 등의 지원을 받으면 수급 대상자를 어떤 기준에 따라 고를 수밖에 없다. 자발성과 공동체성이 훼손되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사회복지 예산이 갈수록 축소되는 상황 아닌가. 우린 그 안 그래도 줄어드는 파이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을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수준에 맞게 하면 된다고 봤다. 조금이라도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 운영이 방만해지고, 결속도 떨어지는 걸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꽃들은 단순한 봉사단체가 아니다. 주민공동체 운동의 지향이 분명히 있는, 어쩌면 변혁보다 '더 거대한 혁명'까지 꿈꾸는 그런 무시무시한(?) 조직이다. 설 씨는 "자기 노동, 자기 시간, 자기 재산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열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꽃들에는 진보·보수 다양한 성향의 주민이 참여하고 있는데, 서로에 대한 믿음, 일관된 모습 같은 것들이 각자의 시각도 점점 변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전했다.

꽃들이 또 하나 중시하는 가치는 바로 '재미'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할까, 사고 칠까, 함께 즐겁게 놀까 많은 사람이 열심히 궁리한다. 꽃들은 현재 '닭다리조', '돼지주물럭조', '피자조' 등을 만들어 운영 시스템을 바꿔볼까 계획 중이다. 희망지기마다 지원하는 품목을 좀 더 구체화해, 기동성을 더하고 물가 인상에도 대비한다는 구상이다. 참여는 모두 다 함께, 봉사는 신나고 즐겁게, 닭다리조의 맹활약에 꽃들이 또 어떤 도약을 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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