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희망찾기] (11)김희경 김해가정폭력상담소 소장

"글쎄요, 희망이 있을까요? 전 희망이 안 보이는데. 지금 가는 이 길이 맞나 확인하고, 성찰하고…. 이런 성찰에 빠지게 되면 정작 앞으로 한걸음도 못 나갈 거 같은 느낌도 들어요."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 곧바로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몇시간 동안 그녀로부터 '안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미안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런 믿음도 생겼다.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해 뭔가 억지로 꾸미거나 거짓을 옮기진 않겠구나, 하는.

내친 김에 물었다. "희망이 안 보인다니, 시민운동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인가?" 오랫동안 여성운동에 몸담아온 김희경(50) 김해가정폭력상담소 소장은 "얼마 전 경남여성회가 25주년사를 편찬한다면서 전직 회장들에게 임기 중 기억에 대한 글을 부탁했는데, 결국 못 썼다"는 일화를 전하며 "쓰게 되면 여러 사람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 할 텐데, 좋은 이야기만, 또는 반대로 나쁜 이야기만 하기가 그렇지 않은가. 지금 내 삶의 전부를 이루고 있는 그 많은 시간과 관계를 하나의 성격으로 단순화해 규정하는 게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에 힘써온 김희경 김해가정폭력상담소장.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인천 출신인 김 소장이 경남·창원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6년이었다. 남편 직장을 따라 왔다가, 경남여성회에서 사무국장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해 시민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그 후 경남여성회 대표, 경남여성단체연합 성인지정책연구위원장, 성인지예산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 등을 맡아 주로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참여와 관련된 일에 힘을 쏟았다.

여성의 사회 참여, 특히 그 중에서도 국회·지방의회 등 정치권 진출은 놀랄 만큼 큰 진전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지난 2004년 총선 때부터 비례대표 50% 여성할당제가 정착된 덕이 컸다. 덕분에 국회의원 중 여성 비율은 2000년 5.9%에서 2008년 14.5%로 상승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세계 평균치(19.1%)에도 못 미치는 세계 80위 수준이어서 지역구 공천 50% 여성할당 등 여전히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희경 소장은 그러나 이런 문제보다는 '주체' 즉 여성 자신의 현실을 더 많이 언급했다. 이를테면 "공간은 열렸지만 여성운동 진영이 응집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다.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낼 만한 사람들을 키워내고 지원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여성이면 무조건 지지할 것인가, 어떤 여성을 지지하고 배제할 것인가, 박근혜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논란조차도 없이 (여성의 정치 진출이) 그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김해시만 봐도 지방의원 중 3분의 1이 여성인데 그 중 절반은 '준비된 여성 정치인'과 거리가 멀다. 여성운동이 이런 상황이 안 벌어지도록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올해 말 김해가정폭력상담소 소장 임기가 끝나면 그는 '성인지 예산제도'의 올바른 정착을 위한 활동에 많은 시간을 쏟을 예정이다. 지난 2008년 발족한 성인지예산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로서 최근 공무원 대상 강연 등을 하고 있는 김 소장은 이 운동이 일반에 대단히 낯선 현실을 인정했다.

"성인지(性認知) 예산이란 말 그대로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미리 고려해 예산의 편성, 심의, 집행, 결산 과정에서 남녀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북유럽 국가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2006년 국가재정법에 근거 규정이 마련되었고 내년부터는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예산안 작성에 반영해야 한다. 대다수 공무원이 내용을 잘 모르고, 상당히 전문적이고 포괄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잘 될지 걱정이 크다."

성인지예산으로 남녀평등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도 해결한 노르웨이의 예를 보면 이 제도의 중요성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노르웨이 정부에서 지급하는 농업발전기금의 수혜자를 성별로 나눠 분석하니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게 나타났다. 정부는 이에 여성에 대한 지원을 늘리며 여성이 농촌에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 결과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였던 여성의 농촌정착률 하락까지 개선돼, 5년여 만에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형식과 과정만 다를 뿐, 성인지예산 관련 활동 역시 김 소장이 천착해온 여성의 사회참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로등 예산만 감소해도 여성의 귀가가 빨라져 직업선택과 사회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며 "예산과 국가정책에 성 구분, 생물학적·사회문화적 차이에 대한 고려가 없으면 결국 성 역할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지난 3년여 동안 몸 담은 가정폭력 문제와 관련해서도 성인지예산의 관점에서 정부 정책에 비판을 쏟아냈다. "올해부터 바뀐 제도인데, 가정폭력 피해자가 보호시설에 들어갈 경우 재산 규모가 3000만~4000만 원 이상인 사람은 생활비를 지원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재산이 있어도 남편과 공동명의로 되어 있거나 집에 묶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폭력 때문에 집을 나오는데 통장 등을 꼼꼼히 챙겨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서 피해자 쉼터를 가보면 20명이 10명의 생활비로 살아야 하는 곳이 많다."

김희경 소장은 가정폭력처럼 '현장'에서 부딪혀야 하는 여성 문제뿐 아니라 정치활동, 성인지예산 등 정책적 역량이 필요한 영역에서도 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여성운동가였다. 그는 "아직 내 안에서 걸러지지 않은 것들을 말하는 게 참 힘들다"고 인터뷰 내내 토로했지만, 그런 '완벽'에 대한 갈구가 그를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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