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11)고령 무계리 말응덕산 봉수∼박곡리 외곡산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위천리에서 길을 잡아 나섭니다. 낙동강의 흐름이 크게 꺾이는 곳입니다. 강물이 고령군 무계리와 박곡리에 공격사면을 형성하며 이곳 위천 쪽에 너른 둔치를 만들어 강폭이 좁아져 나루가 자리하기 좋습니다. 이곳 나루는 무계진(茂溪津)이었는데, 대안에 있던 무계역(茂溪驛)을 잇는 나루라 붙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나루는 지금의 중부내륙고속국도보다 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아래 26번 국도 고령교로 강을 건넙니다.

◇말응덕산(末應德山) 봉수 = 강을 건너 낙동강 서쪽 기슭 강정리(江亭里)에 듭니다. 이름에서 강가에 정자가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는데, 임진왜란 전에 입향조인 성봉화(成鳳和) 공이 강변에 정자를 짓고 학문을 닦은 데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강정리 낙동강가에는 봉우리가 두 개인 낮은 구릉이 있습니다. 봉수대는 그 중 남쪽 봉우리(110m)에 있습니다. 이곳이 군사시설로 이용된 것은 먼 가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봉화산 정상에 남은 보루(堡壘)가 그것을 일러 줍니다. 예전에 이 구릉에서 와질토기(瓦質土器 : 기와처럼 무른 질그릇으로 가야 전기에 주로 사용됨)가 채집되었다고 하니, 그 토지 이용이 무척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곡리에서 외곡산을 넘어 용암에 이르는 산길.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봉수대는 너비 10m 정도 자취가 있습니다만, 무너진 채 방치돼 있어 형태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등의 옛 지지에는 성주(星州) 봉수에 "말응덕산 봉수는 가리현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화원현 성산(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현풍현 소산(所山)에 응한다"고 전합니다. 이 봉수는 바로 북쪽에 무계역이 있어 역과 조합을 이룬 예입니다. 통영로와 봉수의 진행 방향은 예서 분기하여 길은 성주로 향하고 봉수는 대구를 지향합니다.

◇무계진(茂溪津)과 무계역(茂溪驛) = 무계진은 경북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의 낙동강가에 있던 나루입니다.

바로 이곳에 있던 무계역으로 인해 이 나루를 통해 낙동강을 건너는 노정이 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동반 관계를 가지는데, 옛 지지도 그렇게 소개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주목 역원에 "무계역은 무계진 동쪽(서쪽의 오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지도서> 경상도 성주 역원은 보다 상세합니다. "무계역은 관아 남쪽 40리 무계진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대구 설화역까지 10리이며, 남쪽으로 현풍 상산역(쌍산역의 오기)에 이르기까지 15리이다. 서남쪽으로 고령 안림역까지 20리이고, 북쪽으로 성주 안언역까지 20리이며, 안언역에서 북쪽으로 성주 답계역까지 30리이다. 대마 2마리, 기마 2마리, 복마(卜馬 : 짐말) 16마리, 역리 90명, 역노 5명, 역비 3명이다"라고 전합니다.

나루와 역이 있던 무계에서 낮은 당고개를 넘으면 박곡리에 듭니다. 무계리와 말응덕산 봉수 사이에 있는 마을로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습니다. 마을 뒷산의 고분은 대가야의 국경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입니다. 작은 돌덧널무덤 400여 기와 봉분을 갖춘 구덩식 돌방무덤 수십 기입니다. 일제강점기 이래 도굴을 극심하게 당했고, 지금은 수풀만 무성해 자취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채집된 토기편을 통해 볼 때 무덤의 시기는 5~6세기 무렵으로 헤아려지며, 가까운 신라와 창녕 지역의 문물 교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외곡산을 넘다 = 박곡리에서 외곡산을 넘어 용암으로 이르는 산길은 호젓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떠나는 더할 나위 없는 낭만 여정이었습니다. 외곡산(305m)은 고령군 성산면과 성주군 용암면 사이에 있는데 그 몸통은 공룡이 살던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길가 곳곳에 나이가 까마득한 퇴적암이 드러나 있어 잘하면 그 자취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외곡산으로 들어가는 박곡리는 좁고 긴 골짜기입니다. 길은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내를 따라 곧게 열려 있는데, 중간 즈음 박곡지 둑에서 둘러보는 주변 풍광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옛길은 저수지에 잠겼을 테니 그 서쪽으로 새로 닦은 길을 따릅니다. 기분 좋게 골바람을 맞으며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걸으니 힐링워킹(치유를 위한 걷기) 코스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길의 경제성에 충실한 옛길 선형은 대체로 내와 가까운 곡벽(谷壁)을 따릅니다. 지금은 송전탑을 세울 때 자재 운반 도로로 사용하면서 길을 넓혀 운치는 덜하지만, 걷기에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구릉의 8분 능선쯤에 이르렀을 때 갈림길을 만나 잠시 숨을 고릅니다. 서쪽으로 난 큰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고, 곧바로 정상을 향하는 좁은 길이 옛길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그 위 무덤까지만 갈 수 있을 정도여서 부득이 발길을 돌려 임도를 따릅니다. 산을 넘으면 용암면 용계리입니다. 내를 따라 길을 조금 내려가면, 용계지가 나오고 길은 그 동쪽으로 열렸습니다. 예서 머잖아 905번 지방도와 접속하여 신송리를 지나 용암면 소재지에 이릅니다. <대동여지도> 17-2에는 무계역에서 옛 가리현(加里縣)을 지나 고개를 넘는 노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용암에서 성주로 이르는 길은 <대동여지도> 17-3에 이부로산(伊夫老山) 봉수의 동쪽에 있는 별티(성현 : 星峴)를 넘도록 그렸습니다.

당고개와 선비 전설

 

경북 고령군 성산면 박곡리의 당고개 관련 전설은 조선 중엽으로 올라갑니다.

진두나루를 중심으로 낙동강 동쪽과 서쪽에 50여 호나 되는 제법 큰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둔치에 큰 장이 서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자 마을은 풍부해졌지만 장마철 홍수 때문에 걱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마철마다 강물이 넘쳐 삶터를 위협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둔덕(돈대 : 墩臺)을 쌓아 항상 수해에 대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장마철에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낯선 선비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홍수에 대비하려고 또 둔덕을 쌓았는데 마침 그 선비가 강 동쪽(논공읍 위천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지친 선비는 밤늦게 둔덕 위에 잠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곤하게 자던 선비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예끼, 이놈! 여기서 자면 안 된다. 당장 일어나 나루를 건너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선비는 놀라 잠을 깼는데, 꿈이 생생하고 기이하여 밤중인데도 나루로 가서 뱃사공을 깨워 강을 건넜습니다. 건너면서 자기가 누워 있던 자리를 보니 갑자기 불어난 물에 건너편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잠겨 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강을 건넌 선비는 목숨을 구해 준 백발노인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조그만 사당을 지었습니다. 이 사당 때문에 진두나루에 언젠가부터 '당고개'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선비는 뒷날 과거에 급제하자 매년 여기에 와 사당에서 백발노인을 기리며 제사를 지냈답니다.

선비가 잠을 잤던 마을을 지금은 '몰인대(沒人臺)'라 하는데, 몰인대는 '사람들이 몰살했다'는 뜻이며, 반대편 마을은 사람이 살았다 하여 '활인대(活人臺)'라 하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사당도 없어지고, 진두나루도 일제강점기 다리를 놓고 도로를 닦아 폐허가 되었지만 당고개 이름만은 남아 선비의 전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진두나루는 옛 무계진이고, 수해 피난처로 쌓았다는 둔덕은 돈대를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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