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희망찾기] (10) 최기용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정책위원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면 보통 사정이 좀 나아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게 있다. 산업재해가 바로 그렇다. 최첨단·하이테크 운운하는 시대지만 지난 2010년 한해 동안 산재 피해자수는 9만8620명으로 10여년 전(2000년 6만8976명)에 비해 3만 명 가까이 늘었다. 노동자가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율을 뜻하는 산재 불승인율 역시 2008년 55.3%에서 2010년 64.5%로 매해 상승 추세다. 지난해 산재 사망자수는 2089명으로 하루 5~6명꼴로 사람이 죽어 나갔다.

20년 넘게 산재 문제와 싸워온 최기용(58)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이하 산추련) 정책위원은 "은폐되거나 퇴사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병을 얻는 사례 등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다"며 "두말할 나위 없이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자본과 더 많은 이윤을 챙겨주려는 권력의 이해 때문에 우리나라가 '산재 왕국' 오명을 듣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987년부터 마창지역 산재추방운동과 함께 하고 있는 최기용 씨. /고동우 기자

최 위원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결성된 당시 현대정공(현 현대로템) 노조 산안부장으로 첫발을 내디뎌 마창지역 산재추방운동 역사와 함께 해온 산증인이다. 그 후 산추련의 전신인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모임' 창립을 주도하고 통합단체인 '노동과 건강을 위한 연대회의' 대표를 지내는 등 한 순간도 이 문제에서 떠나지 않았다. 산추련은 올해로 꼭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겉모습만 보면 작업 환경이 뭔가 깨끗하고 나아진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투자는 오직 생산을 위한 투자이지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인력은 줄었고 노동강도는 그대로거나 더 악화됐다. 수십년 전 요구인 8시간 노동제가 정착됐다지만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잔업·특근에 내몰리고 있다. 기업주는 심지어 비용 때문에 기계에 부착된 안전장치를 떼어내고 구입하기도 한다. 산재를 당하면 또 어떤가. 안 다쳐야 '가족'이지, 뭐 하나라도 잘못되면 '산업쓰레기' 취급하기 일쑤다."

과거와 비교해 또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비정규직·이주노동자의 급증이 그것이다. 이들 중에는 노동조합은커녕, 산재보험조차 가입할 수 없는 노동자가 부지기수다. 정규직이 마다하는 힘들고 위험스러운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통계에 따르면, 일용직·파견직의 재해발생 비율(2009년)은 상용직보다 4~6배 이상 높으며 이주노동자의 재해율(2010년 5.7%→2011년 상반기 8.9%)도 해마다 상승하고 있다.

산추련이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총연맹부터 단위노조까지 노조 차원에서 산재 문제를 다루는 게 일반화된 시대지만, 이렇게 '노조 사각지대', '안전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가 늘어나는 한 누군가 그들의 이해와 함께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기용 위원은 "수년째 백혈병 산재 승인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처럼 무노조 사업장은 산재 사고가 터져도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하청노동자들은 산재를 당해도 원청 측이 책임을 회피해 보상을 잘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는 다쳐도 잘릴까 봐 치료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형편이다"라고 처참한 실태를 전했다.

중소영세 업체가 많은 창원지역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4월 산추련이 소속된 '경남지역 노동자 건강권 대책위'가 정부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0년 11월까지 전국 산재 증가율은 1.4%(사망자 0.6%) 수준이었으나 창원은 12.2%(1.7%)로 10배 가까이 됐다. 대책위는 이에 대해 "창원 공단 노동현장은 각종 위험한 기계와 발암물질 그리고 근골격계 질환으로 골병이 들고 있다"며 "창원을 위험한 도시로 방조하고 만드는 것은 고용노동부의 관리 감독 부실에 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산추련 20주년 기념 사업도 많은 부분 이들 노동자의 인권에 맞춰졌음은 물론이다. 산추련은 지난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중소 영세업체와 비정규직이 다수 밀집해 있는 창원시 웅남단지·차룡단지 등에서 '노동건강권 사회의제화를 위한 선전전'을 펼쳤다.

또 23일에는 영어·중국어·스리랑카어·베트남어 등 8개국 언어로 펴낸 <이주노동자 건강권을 위한 소책자> 출판기념회를 민주노총 경남도본부대강당에서 열기도 했다. 본 행사인 20주년 기념식은 같은 장소에서 오는 24일 오후 6시에 개최된다.

산추련이 이렇게 정규직이나 노조원보다 '더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이주노동자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배경에는 '독립적 재정원칙'이 있다고 최기용 위원은 설명했다.

산추련은 창립 이후 정부나 지자체 등으로부터 단 한번도 재정 지원을 받지 않고 오직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 재정사업으로 단체를 운영해왔다. 현재 회원 수는 250여 명, 상근자 수는 2명. 결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최 위원은 "노동자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지키는 문제에 절대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어려움이 많다. 자기희생이 없으면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번 돈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운동의 원칙, 철학은 희석되고 점차 영리사업화, 복지 서비스화될 수밖에 없다. 누가 노조도 없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

그는 끝으로 현재 산재추방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노동자, 의사, 작업환경측정 분석사 등 각계 전문가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독자적인 '산재의료 전문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비용과 시간 부담 등이 있는 노동자들이 언제든 방문해 진단·치료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업장의 산재 원인도 찾아 근본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최 위원은 여러 여건상 '먼 미래'의 이야기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또 아는가. 1300만 노동자 전체가 한푼 두푼 뜻을 모은다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보다 더 약자인 비정규직·이주노동자 문제에 앞장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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