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경남FC 재수생 최진한 감독

지난 2007년 12월.
 
박항서 감독의 갑작스런 사의 표명으로 공석이 된 사령탑을 선임하고자 경남FC 구단은 공개 감독 선발공고를 냈다. 서류심사를 거쳐 최종 면접에 오른 후보는 3명. 이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조광래(현 국가대표팀 감독) 감독이 경남FC 2대 감독에 취임했다. 당시 조광래 감독과 함께 최종 후보에 올랐던 최진한 감독은 "3명의 후보가 최종 면접을 봤는데, 조 감독님이 1위를 하고 내가 2위였던 것을 안다"면서 "고교 선배이자, 고향 선배인 조 감독께서 감독직을 맡아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 11월. 최 감독은 조광래 감독이 국가대표 사령탑 발탁으로 공석이 된 경남FC 감독에 또 한 번 원서를 냈고, 결국 재수를 통해 경남FC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의 마음으로 프로 감독 첫해를 보내고 있다"며 "고향 팀인 만큼 부담감도 크지만 고향 팀을 위해 헌신한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축구를 하고 싶어 3번이나 전학한 소년 최진한 = 최진한 감독은 어릴 적 축구광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축구를 접했다. 최 감독은 "당시 진주에는 '대지'라는 유명한 조기회가 있었는데 진주 출신 축구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대단한 조기축구회였다"면서 "대지조기회에서 활동하는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진주 중앙초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하던 최 감독은 소위 '뺑뺑이'를 돌려 동명중에 입학하게 된다. 몇 개월 동명중에다니다 축구부가 있는 진주중으로 전학을 가기로 하고 진양군에 있던 명석중에 잠시 다니다(당시에는 관내 전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진주중로 전학을 갔다. 그는 "아버님의 축구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2남 3녀 가운데 아들 둘을 모두 축구인으로 키워내셨다"고 했다. 프로축구 수원삼성의 최청일 스카우트가 그의 친동생이다.
 
진주고를 거쳐 연세대에 입학하기도 돼 있던 최 감독은 '용 꼬리보다는 뱀 머리가 돼라'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연세대 대신 명지대로 진학한다. 그리고는 대학 3학년에 첫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후 84년부터 88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축구 도시로 유명한 진주에서 그는 아직 유명인사다. 진주 출신으로 국가대표 계보를 살펴보면 1세대인 조광래(국가대표팀 감독)를 시작으로 최진한 - 조정현(진주고 감독) - 이병근(경남FC 코치) - 김진용(강원FC) - 윤일록(경남FC)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90년도 K리그 MVP를 차지했을 때만 하더라도 진주 출신의 축구선수로 조광래보다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지금 데리고 있는 일록이도 대표선수가 될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어 진주 출신 국가대표 계보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운동장에선 욕을 입에 달고 다닌 무서운 지도자 = 최진한 감독의 첫인상은 '이보다 더 순할순없다' 싶을 정도로 순해 보인다. 선한 얼굴에 구수한 진주 사투리까지 더해지지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한마디로 '호인(好)'이라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호되게 무서운 지도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경남FC U-15팀인 토월중 김기현 감독을 이렇게 그를 기억한다. 
 
김 감독은 "대구FC 창단 당시 선수와 수석코치로 처음 만났다. 당시 최 감독은 선수들에게 호된 질책도 많이 하고 훈련도 많이 시켜 호랑이로 불렸다"면서 "하지만, 잔정이 많아 어려움에 부닥친 선수가 있으면 불러 고민을 들어주기도 했다"고 했다.
 
92년 관동대 감독으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한 최 감독은 그라운드에서는 무서운 존재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했다. 그는 "당시 운동장에만 가면 욕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선수들에게 무섭게 대했다"면서 "열심히 운동시키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해야만 성적을 낸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해 청소년대표팀 코치직도 함께 맡았던 최 감독은 99년 허정무 감독과 함께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경험하기도 했다.
 
◇내 축구인생을 바꿔놓은 히딩크 감독 = 시드니올림픽의 몰락을 경험한 한국 축구는 2004년 그리스에서 열릴 아테네 올림픽 준비에 곧바로 들어갔다. 당시 올림픽 대표팀에는 이천수, 최성국, 최태욱 등 대어급 영건들이 대거 포진해 어느 때보다 기대가 높을 때였다. 당시는 올림픽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의 경계가 어느 때보다 적을 때여서 그는 국가대표팀을 관찰할 기회도 많았다. 당시 최 전 코치의 공식 직함은 2004 아테네 올림픽 상비군 코치. 2001년 911테러가 있기 몇 주 전 히딩크의 숙소인 서울 타워호텔로 찾아간 그는 '한 수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의 호기에 반했는지 히딩크 감독도 이를 흔쾌히 승낙했고 그는 2002한일월드컵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라는 공식 직함도 부여받았다. 그는 "히딩크라는 지도자 덕분에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공부하고 체계적인 훈련방법을 터득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며 "나 역시도 히딩크 리더십의 핵심인 선수단 관리, 심리술, 코칭스태프를 설득하는 능력 등 지도자로서 필요한 전술을 당시 모두 배웠다"고했다. 최 감독은 "히딩크 감독을 만난 2001년은 내 축구 인생을 바꿔놓은 변화점이었다"며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나서 선수들을 때리지 않고서도 경기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웃었다.
 
◇'최진한'을 세상에 알린 히딩크 비망록 = 평소 S 최 감독은 '최기자'라 불릴 정도로 메모가 습관화돼 있다. 이번 인터뷰에도 최 감독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런 메모습관은 축구인 '최진한'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히딩크 비망록의 초석이 됐다.
 
최 감독은 2001년부터 월드컵 3·4위 터키전이 끝날 때까지 10개월간 히딩크 감독이 비공개로 선수들 또는 코칭스태프와 가진 미팅 발언, 월드컵 본선 7경기 하프 타임 때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지시한 내용, 각종 전술 훈련 시 주문 사항 등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꼼꼼하게 메모했다. 전술적인 부분은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려놓는 노력도 마다치 않았다. 그가 기록한 수첩은 총 6권, 700여 페이지 분량에 달한다. 한 시도 수첩을 빼놓지 않는 최 감독을 두고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SPY'라 부르기도 했다. 최 감독은 "한때 히딩크 감독이 (나를) 축구협회가 보낸 스파이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면서 "나중에 지도자 생활을 할 때 참고하려고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자유롭게 적도록 허락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히딩크 감독은 일과가 끝나면 호텔 커피숍에 앉아 국내 코치진과 함께 카드게임을 즐겼는데 거의 자리는 항상 입구를 등지는 쪽이었다"며 "선수들의 출입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선수들을 관리하셨던 그런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고향팀에서 첫 프로감독 맡다 = 최진한 감독은 취임 인터뷰에서 "고향 팀에 온 만큼 부담감도 없진 않지만 고향을 위해 봉사한다는 각오로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프로 첫 감독으로서의 소회는 어떨까? 그는 "경기결과에 따라 팬들의 격려와 비난이 엇갈려 정신 못 차리고 1년을 보낸 것 같다"며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마다 처음 했던 인터뷰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그의 책상 한편에는 지도자생활을 하면서 명심해야 할 10가지 항목을 직접 써서 붙여놨다. '지도자는 전술전략을 가르치는 기술자가 아니다', '코칭스태프와 보조요원(주무, 기사, 식당요원)은 부하가 아닌 지원해주는 사람이므로 수평적 관계로 인식해야 한다', '문명의 이기, 기술 등 최신정보를 습득하자' 등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꼼꼼하게 메모해 놨다. 무난한 첫해를 보낸 최 감독의 머릿속엔 벌써 내년 시즌 구상이 한창이다. 본격적인 승강제 시스템이 도입되는 해인 만큼,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다.
 
그는 "포백 시스템을 소화해줄 수비수와 윤빛가람의 공백을 메워 줄 미드필더, 원샷원킬의 공격수 등 올해보다 팀을 강하게 키우려면 우수 선수 확보가 관건"이라며 "올해를 팀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면 내년은 경남의 팀 컬러를 내는 해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 하나, 최 감독이 꾸는 꿈은 K리그 도민(시민)구단 최초로 AFC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 것이다. 그는 "AFC챔스리그에 출전하면 경남FC의 위상은 물론 도내 축구팬이 팀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것"이라며 "내년은 그 꿈을 위해 한발 다가서는 해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요. 아마 우리 팀을 AFC챔스리그로 못 이끌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꿈을 꾼다는 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꿈을 위해 한발 한발 다가서려는 노력이 아름답지 않을까요. 꿈이 현실이 된다는 것. 행운보다는 차곡차곡 쌓인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요.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짧지 않았던 인터뷰 속에서도 그가 꾸는 꿈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선수를 배려하고 항상 분석하는 노력은 2002년 히딩크와 어느덧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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