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24)황산언과 증산나루

오늘은 지난 여정에서 다 못한 황산역에 딸린 황산언(黃山堰)을 마저 살피고 걷겠습니다. 지금은 4대강 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지만, 제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2009년 가을에는 이 둔치에서 문화재 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때 이곳 낙동강 동쪽 둔치에서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에 전하던 황산언이 발굴되어 대서특필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황산언(黃山堰)

황산언은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의 동쪽 둔치에 쌓은 둑입니다. 조사 결과 강의 길이 방향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쌓았는데, 아래쪽은 돌로 바탕을 다지고 그 위에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사자는 둑을 처음 쌓은 때를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에 근거하여 12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황산언은 황산역이 설치된 지 한 세기가 더 지나서야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려 현종(顯宗) 9년(1018)에 황산역을 비롯한 전국의 525역을 22역도체제로 정비했기에 그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증산왜성. /최헌섭 원장

이곳에 둑을 쌓아 낙동강의 범람을 막고자 했던 까닭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영남읍지> 권4에 실린 황산역 그림을 참고할 만합니다. 바로 증산(甑山) 북쪽 둑 안에 그려둔 마위답(馬位畓)과 같은 경작지와 건물 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에는 증산을 남쪽 경계로 삼고 낙동강 동쪽 둔치와 양산천(당시는 대천(大川)이라 했음) 서쪽 둔치에 둑을 쌓고 대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둑의 이름은 동대제(東大堤) 서대제(西大堤)라 했는데, 발굴된 둑은 서쪽의 것입니다.

증산나루와 증산왜성(倭城)

황산언이 있던 자리를 지나며 동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구릉이 증산입니다. 예전에 낙동강의 하구가 물금에서 형성되었을 때에는 섬이었던 곳인데, 그때의 기억은 이곳 남부리에 있는 조개더미가 간직하고 있습니다.

증산은 시루뫼라고도 하며, 그 형상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지명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시루는 으뜸을 뜻하는 '수리'인데, 그것이 시루(甑)로 변이되어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그 크기는 산이라기보다 구릉의 수준인데도 넓은 들에 홀로 솟아 있어 그리 불렀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산천의 다음 기사는 수리로 헤아리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 책 산천에 '증산은 고을 서남쪽 12리 되는 큰 들 가운데에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더 구체화한 기록은 조선시대 말엽에 쓴 <양산군읍지>에 나옵니다. 이 책에는 '증산은 군 서남쪽 12리 큰 들판 가운데 있는데, 곧 황산의 여러 산에서 비롯한 맥이 없다'고 했으니 들 가운데 솟은 고립 구릉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물금 낙동강 둔치에서 발굴된 황산언.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이곳 증산 정상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이 있습니다. 성을 쌓은 때는 장동정가(長東正家) 등이 연서로 1597년 12월에 흑전장정(黑田長政)에게 보낸 서장에 근거하여 그 즈음으로 헤아립니다. 뒤에 모리휘원(毛利輝元) 등이 고쳤고, 흑전장정 부자가 지키다가 1598년 3월 13일에 가덕도성으로 옮길 때까지 짧게 사용했습니다. 성을 쌓을 때 사용한 돌감 가운데 많은 것은 황산역을 헐어서 썼다고 전해집니다. 이곳 증산에 왜성을 쌓은 까닭은 서쪽 강가에 나루가 있어 배를 대기 좋은 점과 낙동강 하구를 점거할 수 있는 입지적 특성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증산 나루는 <해동지도>에 증산 남쪽 낙동강가에 표시해 두었습니다. 또한 <양산지도>(규10512)에는 김해의 월당나루(김해 황산진)와 오가는 경로를 그려 두었으니 그리로 오가는 나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포진(狐浦津)

증산나루가 있던 곳을 지나 둔치를 따라가노라면, 예전에 호포라 불린 양산천의 하구를 만나게 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산천에 '호포는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두 곳이니 하나는 원적산에서 나왔고, 하나는 취서산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합쳐져 황산강(黃山江 : 당시의 낙동강 하구를 이름)으로 들어갔으며, 건너는 배가 있다'고 했습니다. <해동지도>에 양산천이 낙동강에 드는 호포 동쪽에 나루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나루 동쪽 기슭에는 호포원(狐浦院)이 있어 길손들의 쉼터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뒤 복구되지 못했다고 <양산군읍지>에 전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역원에 '호포원이 호포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으니 그 전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곳은 낙동강을 사이로 김해와 왕래하고 양산천 유역의 양산구조곡을 따라 언양, 경주로 이르는 교통로의 길목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없어진 호포원은 예서 경주로 이르는 내륙 교통망의 들머리가 되는 수륙 교통망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까지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는데, 당시의 길은 양산천의 동쪽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이 길을 따라 낙동강 동쪽의 양산을 일찍이 복속시키고, 강 서쪽의 가락국(금관가야)을 치러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가 개성에 수도를 두고 전국의 교통망이 그곳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쓰임이 덜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는 옛 원터로 헤아려지는 자리에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성으로 고쳐 쌓은 성터는 당집과 당목이 보존되면서 그 자리에 겨우 흔적만 남기고 있는데, 도로를 내면서 헐었고, 그나마 남은 곳은 호포역이 들어서면서 없애 버렸습니다. 나루가 있던 마을은 아직도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고 지금은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섰습니다. 시절 따라 모습은 변하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쓰임은 여전합니다. 강과 그 곁의 둔치에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 길손의 걸음은 부산 땅에 들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