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희망찾기] 시민운동가 (8) 문숙현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대표

눈에 띄게 가녀린 한 아이가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느낀 엄마는 생후 3개월도 안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장애가 있습니다." 날벼락이었다. 뼈가 채 여물지도 않은 갓난아이는 그 후 1년 넘게 깁스로 꽁꽁 묶였다. 하지만 손상된 척추, 왼쪽다리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인생은 이미 그때 '결정'난 것과 다름없었다.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높은 계단, 불편한 변기, 경사진 길 곳곳에 장벽이었다. 바깥에 편히 나갈 수도, 일을 할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었다.

3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초, 성인이 된 아이는 우연히 여성장애인들이 단체를 준비하는 모임에 가게 된다. 거기서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을 만났다. 그녀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문숙현 대표. /박일호 기자

문숙현(44·사진)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대표가 보기에 여성장애인은 장애인사회 그 속에서도 한번 더 소외당하는 존재였다. "장애인운동 역시 남성장애인이 주도하고 있더라. 여성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비록 느리고 작겠지만 세상을 바꿔보자 생각했다." 2002년, 경남여성장애인인권연대의 출범이었다. 그 후 그는 단체 공동대표를 맡아 전국 최초로 여성장애인 출산지원금을 제도화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10여 년 전과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처음 단체가 생겼을 땐 경남도청 등 관공서에서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안했다. 뭔가 해주면 해주는 대로 동정과 시혜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한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여성장애인 운전면허 취득 지원, 저상버스 도입, 휠체어택시 등 눈에 보이는 변화도 많았다."

1살 때 삶의 모든 것이 유실된 듯했던 한 아이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난 2월 경남여성장애인연대 대표직을 내려놓은 그는 최근 경남장애인인권포럼이라는 단체의 대표를 새로 맡았다. 사단법인 한국장애인인권포럼의 경남지역 대표라는, 언뜻 거창한 직함 같지만 지난해 11월 창립해 아직 기본 운영비와 상근자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 중인 단체의 수장일 뿐이다.

"사실 좀 쉬고 싶었는데, 포럼 쪽에서 급하게 제안이 들어왔다. 신생조직이 기반을 잡는 데 힘이 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여성장애인 운동만 해온 문숙현 대표에겐 여러모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여성장애인뿐 아니라 전체 장애인의 이해를 살펴야 하고, 지방의회 모니터링부터 정책·법률 대안 제시까지 한층 더 심화된 전문성이 요구됐다.

단체의 대표 활동인 의회·법률 모니터링은 각 자치단체 조례 등에 나타난 장애인 차별 조항을 찾아내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경남의 한 공공시설 운영조례에는 '동물을 동반하고 입장하는 자'의 출입을 금지하도록 되어 있는데, 안내견과 함께 다니는 시각장애인 처지에선 차별이 명확하다.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자'란 문구 역시 마찬가지다. 뚜렷하고 세세한 구분이 없으면 장애인들까지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조항이다.

단체는 이러한 모니터링을 바탕으로 장애인 차별 해소에 힘쓴 지방의원에 대한 평가도 한다. 마침 8일 경남장애인인권포럼은 '2011 경남지역 장애인정책 우수의원 시상식'을 경남도의회 회의실에서 열어 도의원 6명, 기초의원 15명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문숙현 대표의 취임 첫 '작품'으로서, 많은 언론이 주목하는 등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는 평가다.

문 대표는 그러나 이런 일 자체보다, 장애인 단체들 간의 '치열한 경쟁구조'에 더욱 힘들어하는 듯했다. "솔직히 여러 여건상 장애인 단체는 실적을 많이 내서 자치단체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운영이 가능하다. 그런데 유독 경남지역엔 장애인 관련 단체가 많다. 신생 단체로서 잘 해낼 수 있을지 고민이 크다."

전국적으로 250만 명, 경남지역에만 18만 명. 경남은 장애인 인구 규모에서 서울·경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문 대표는 "경남은 그 규모에 비해 지원 제도나 편의시설 등이 부족한 편"이라며 "장애인들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오직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여전한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저상버스만 해도 노인, 환자, 임산부 등 모든 교통약자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아닌가. 장애인 문제에 대한 도민들의 관심이 더 나은 경남의 '삶의 질'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눈에 띄게 가녀린 한 아이가 있었다. 겨우 1살 때 '1급 장애인 판정'이라는 천형을 받은 이 아이는, 그러나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26살 때 초등학교(검정고시)를 마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대학 졸업장까지 받았다. 이 아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비장애인도 쉽사리 뛰어들지 못하는 일을, 10년이 넘은 시간 동안 초지일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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