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10) 우포(누포)∼대구시 현풍 무계진

보름 사이에 가을이 깊어졌습니다. 벌써 가을걷이를 마친 곳이 많고 바지런한 농군들은 벌써 그 논에 내년 늦봄에 거둘 양파를 심었습니다.

웃개나루를 건넌 통영로는 우포를 지나는 구간에서 군사 도로로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 기사에서 걸은 길은 <해동지도>, <대동여지도> 등에 묘사된 조선 후기의 역로를 따른 것이니, 우포를 지나던 원래 길을 개관하고 경북에 이르는 여정에 서겠습니다.

우포를 지나는 길

웃개나루를 지나 우포로 이르는 통영로는 곧바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상대포(上大浦 : 웃한개)에서 계성천을 만납니다. 이곳에는 아랫한개, 당포, 기민개 등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어 예전에는 물이 성한 곳임을 헤아리게 해 줍니다. 예서 계성천의 서쪽 기슭을 따라 오르다가 황새목에서 1021번 지방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황새목에서 남지읍을 지나 장마면의 대봉리 가람고개에 이르는 길은 교통량이 적어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외길입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의 쌍산역 서쪽 박진나루에서 본 통영로 모습. /최헌섭

가람고개에서 길은 다시 1008번 지방도를 만나 북쪽으로 이르다가 동정리 외양골에서 영산에서 들어오는 국도 79호선과 한 데 묶어 유어면으로 향합니다. 유어면 광산리에서 턱고개를 넘어 국도를 버리고 곧장 북쪽을 바라며 선소리 선소(船所) 마을에 듭니다. 이름으로 보아하니 먼 옛적 이곳에는 배를 만들거나 고치던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소가 운영되었으니 그 시절에는 낙동강 물길이 이곳까지 깊숙이 열렸을 테지요. 유어면과 대지면의 경계를 따라 난 길에서는 이제 우포가 눈에 듭니다. 토평천을 지나서 우포와 사지포를 가르는 제방을 따라 두 늪을 양쪽으로 살피며 걸으니 이런 눈 호강이 없습니다. 늪에서 빠져나와 주매리 신당리 퇴산리 평지리 등지리를 지나 대합면 소재지에서 지난 여정에서 살핀 옛길에 듭니다.

대구에 들다

<대동여지도>에는 조선시대에 누포라 불린 우포를 지나면, 물슬천(勿瑟川) 가에는 사창(社倉)이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물슬천은 낙동강이라는 큰물의 동쪽에 있는 내를 그리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슬천을 지난 길은 성산면과 대합면 경계에 있던 태백산(太白山) 봉수의 동쪽 길을 잡아 북쪽으로 들면, 경북과 경남 경계의 달창저수지 남쪽이 대견원(大見院) 또는 다견원(茶見院)이라 불린 원집이 있던 대견리입니다. 이 마을을 지나면 사창이 있던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 사창마을에 듭니다. 경상도의 남북 경계에 있는 마을이며, 지금도 도롯가에 1923년(대정 12)에 세운 경계 표석이 서 있습니다. 표석은 돌을 깎아 만든 방주형인데,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양식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다리품을 쉴 겸 들머리 가게에서 깡통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마침 이곳에 나와 계신 할머니들이 뭐하는 사람이냐 물으십니다. 통영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가는 중이라 했더니 차를 타면 쉽게 가는데 왜 그런 고생이냐고 타박이십니다. 그래서 차비가 없어 걸어간다고 농을 쳤더니 맥주 마실 돈으로 차 타고 가라십니다. 아무래도 어른들 눈에는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나 봅니다.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서둘러 머잖아 내를 건넙니다. 바로 이 내는 예전에 살천(薩川)이라 불렀던 차천(車川)입니다. 이 내를 건너 북쪽으로 곧게 난 길을 따라 현풍 들머리의 대치(大峙)로 향합니다.

<대동여지도> 17-2에 제시된 노선을 보면, 대치를 넘는 길은 낙동강으로 이르는 직로로 나옵니다. 이에 따르면 대치는 유가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내린 곳에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상은 이름처럼 큰 고개는 아닙니다. 대치에서 낙동강으로 이르는 이 길은 지금의 국도 5호선이 대체로 덮어 쓰고 있어 차량 통행이 부쩍 늘었습니다. 지금 이곳 유가면 일대에는 LH(한국토지공사)에서 시공하는 대구테크노폴리스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어 더욱 부산스럽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길을 정비할 때 도로의 이름을 '대구-통영선'이라 불렀으니 통영로의 명맥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후기지방도 -현풍현->에는 오늘 여정의 차천과 구천에도 장이 섰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구천지나 현풍 들머리 냇가에 서 있는 장터가 바로 앞서 본 전통을 잇고 있고, 이곳을 지나 길가에 오래된 정자나무를 만납니다. 옛 길손들은 예서 다리품을 쉬어 갔겠지요.

무계진 가는 길

   
 

현풍은 신라의 추량화현(推良火縣)이던 것을 경덕왕 16년(757)에 현효(玄驍)라 하여 양주(良州) 소관의 화왕군(火王郡 : 지금의 창녕)의 영현으로 삼았습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현풍(玄風 또는 玄豊)으로 바꾸고 현종 9년(1018)에는 밀성군(密城郡 : 지금의 밀양)의 임내로 하여 죽 이어지다가 조선 고종 23년(1895)에 대구부 소관의 현풍군이 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지난 조선시대까지는 창녕 또는 밀양에 딸린 땅이었지요.

지금은 현풍 하면 모두 곰탕을 떠올릴 정도로 명성은 대단합니다. 이곳 곰탕은 황해도의 해주곰탕, 전라도의 나주곰탕과 함께 그 유명세를 견줄 정도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입니다.

곰탕 냄새를 뒤로하고 읍내를 살짝 벗어나는 서쪽 구릉에는 돌로 쌓은 수문산성(水門山城)이 있고, 거기서 북쪽으로 몇 리를 더 가면 현풍면 상리 구쌍산에 있던 전통시대의 쌍산역(雙山驛)에 듭니다. 쌍산역은 청도의 성현도(省峴道)에 딸린 역으로 남북으로 창녕의 내야역(內也驛)과 대구의 유산역(幽山驛)을 잇습니다. <대동여지도> 17-2에 쌍산역은 소이산(所伊山) 봉수 동쪽 고개 아래에 짝지어 그려 두었습니다. 달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산(所山) 봉수라고도 했습니다.

쌍산역을 나온 길은 무계진(茂溪津)까지 낙동강 동쪽 기슭을 따라 열렸는데, 달성군 논공읍 남리를 지나 북쪽으로 상리를 거쳐 위천리에서 낙동강을 건너 무계진에 듭니다. 이곳 강가에는 무계역(茂溪驛)이 있어 무계진은 이 역 왕래를 돕기 위해 운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무계역의 북동쪽 낙동강가에는 말응덕(末應德) 봉수가 있어 이곳이 교통 통신의 요충임을 일러 줍니다. 바로 대안에 있는 현풍의 소이산 봉수와 쌍산역과 같은 조합입니다.

<대동지지> 성주에 무계역(茂溪驛)은 예전에 무기(茂淇)라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무계진 서쪽에 있다 했으니 나룻가에 입지한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역은 고려 때 설치된 이래 조선 때까지 유지되었는데, 이처럼 나루 가까이에 있는 역이 역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자리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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