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근대건축을 찾아서] (5) 마산합포구 월남동 헌병 분견대

지난달 22일 빨간 벽돌 담장이 허물어져 공사가 한창인 마산 헌병 분견대를 찾았다. 마산 헌병 분견대는 1926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창원시 문화예술과 담당자는 "민간인 차가 급발진으로 담벼락을 들이받아 보수 공사 중"이라고 했다. 공사로 어수선한 현장을 박영주 지역사 연구가, 신삼호 건축사, 유장근 경남대 교수, 허정도 창원대 초빙교수와 함께 찾았다.

◇지하 취조실은 사라지고 = 월남동 대로 인근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인근에 살면서도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건물이 일본 강점기에는 헌병 분견대 건물로 사용됐지만, 이후에는 보안사, 충호회 경남지부 사무실 등으로 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건물 입구에 "일제강점기 당시 잔악한 일본의 대명사였던 헌병대가 민중을 억압하고 독립투사에게 가혹 행위를 자행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헌병대가 일제 통치 기구였다는 설명이 빠져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문 출입구를 가운데 두고 양측에 창이 3개씩 달려있는데, 정면에 조형물이 부착됐다 떨어진 흔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군과 관련한 표장이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했다. 허정도 교수는 지하 환기구로 추정되는 아래쪽 마름모꼴 벽돌은 벽돌이 밑으로 쓰러지지 않게 한 것이라고 했다.

건물 외관은 대부분 원형을 유지했지만, 지하 구조는 변경된 상태였다. 박영주 지역사 연구가는 "지금은 지상 1층 형태로 돼 있는데, 예전에는 반지하식 감옥이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마산합포구 월남동 헌병 분견대 건물 안 모습. /김구연 기자
마산합포구 월남동 헌병 분견대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김구연 기자 

지난 2000년 석사 논문 <마산의 근대 건축에 관한 연구>를 쓴 경남대 건축학과 한상술 씨는 헌병 분견대를 조사할 당시 지하층을 조사하고자 합판으로 가려진 부분을 떼서 보려고 했는데, 건물을 이용하던 충호회에서 "인골이 있는가 보려고 그러느냐. 그런 것 없다"며 반발해 지하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건물 정면으로 봤을 때 오른편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벽돌로 막고 구조를 바꾸었다.

   
 

◇과거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 = 동행 취재 후 박영주 지역사 연구가는 '유용원의 군사세계'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과거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사진은 '바이칼 호수'라는 작성자가 지난 2006년에 "1960년대 마산 방첩대 8050 부대사진"이라는 설명과 함께 한 군인의 사진을 올려놨다.

군인 뒤편에 지금의 헌병 분견대로 추정되는 곳이 보인다. 사진 뒷면에 '마산 방첩대에서 11월 26일'이라고 적혀 있다. 1949년께 만들어진 방첩대는 대북 첩보·정보수집 등 반공·방첩·정보업무와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탄압 등을 담당한 군사기구였다.

이렇듯 시대에 따라 모습을 바꿔온 헌병 분견대 건물은 지금은 텅 빈 채로 남아있다. 2009년 8월 국방부에서 문화재청으로 소유가 이전됐다. 지난해에는 창원MBC가 3·15의거를 소재로 한 역사드라마 <누나의 3월>을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시 담당자는 "현재 건물은 시에서 보수공사를 한 후에 문화재청의 계획에 따라 보훈기관에 사무실 임대를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빨치산 연루 누명으로 고문 당해"

   
 

18일 청강 이형규(87·사진) 학교법인 문화교육원 학원장을 마산대학 청강기념관 12층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마산대학 설립자로, 과거 헌병 분견대와 악연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돼서, 해방 후에는 빨치산과 연루됐다는 누명으로 그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 헌병 분견대에 언제 가보게 됐나.

"일제강점기 때 학도병 권유에 한창 금광 등 산속으로 숨어다녔다. 그러다 19살에 '부모님을 더는 괴롭히지 말라'는 지역 유지의 강권에 못 이겨 헌병 분견대에 가서 학도병 지원 신청을 하게 됐다. 또, 해방 이후 50, 60년대 제일여고 교장으로 있을 때, 빨치산과 연루됐다는 누명으로 그곳에서 취조를 당했다. 헌병 분견대에 끌려가기 전 1차로 남성동 파출소에서 수갑을 찬 채로 매질을 혹독하게 당했다. 당시 지역의 유명 인사들이 대부분 고초를 겪었다. 그때 춤으로 유명했던 김해랑 선생도 폭행을 당했는데, 매질을 피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 여기서 무용하느냐고 조롱 당하기도 했다. 헌병대장이 말채찍을 들고 들어와서 나를 취조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 헌병 분견대 외관이 지금 모습과 다르나.

"달랐다. 예전에는 헌병 분견대 본 건물 옆에 작은 유치장이 따로 있었다. 본 건물은 취조실로, 옆 건물은 유치장으로 따로 쓰였다. 지금은 유치장 건물이 철거됐더라."

- 당시 건물의 위용이 대단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일제강점기 때 붉은 벽돌로 된 헌병 분견대 건물을 보면, 건물 자체만으로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총 든 헌병이 보초를 섰다. 다른 나무 건물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헌병 분견대에 끌려갔다가 몸을 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마산헌병분견대는 어떤 건물?

일제는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자 헌병경찰제를 시행했다. 1914년 당시 헌병이 1만 1159명이고, 경찰이 5756명이었다. 당시 헌병경찰의 권한은 막강했다. 경찰서장을 겸임하던 헌병분대장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벌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행정법규 위반까지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1920년 헌병경찰제에서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경찰이 치안을 맡게 했다. 경찰의 숫자와 업무는 대폭 늘었고, 1921년 현재 마산 중부경찰서 자리에 있던 헌병 분견대 건물을 증축해 마산경찰서를 지었다.

경찰의 업무가 늘어나자 헌병은 경찰서를 비워주고, 1926년에 마산 헌병 분견대 건물을 짓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헌병의 사무실로 쓰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 건물은 육군헌병대, 방첩대 사무실 등으로 활용됐다.

이후 이 건물은 보안사 마산 파견대 요원(해양공사)이 상주했다. 1990년 보안사의 민간인 불법 사찰이 드러나자, 보안사는 기무사로 바뀌게 됐고, 외부에 나가 있던 보안사 요원을 모두 군부대로 철수시키면서 이 건물은 비게 됐다. 2005년 문화재로 등록이 됐고, 보안사 요원 출신이 만든 친목단체 '충호회 경남지부'의 사무실로 쓰이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건물을 비웠다. 현재 창원시 문화예술과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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