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생태 역사기행] (1) 고모산성·토끼비리와 문경새재

경남도민일보와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공동으로 '2011 생태·역사 기행'을 9월 들어 시작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갱상도 문화학교 추진단'이 주관하는 이번 기행은 지역 생태와 역사에 대한 도민 여러분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9월 2일 경북 문경 새재를 다녀왔으며 10월 7일에는 우포늪(소벌)~동판저수지~화포천, 11월 4일에는 창포만~사천만~하동 갯벌, 12월 2일에는 창녕 문화 유적으로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과 기행의 보람을 공유하기 위해 다달이 지면으로 소개합니다.

9월 2일 오전 9시 30분 2011 생태·역사기행이 첫 걸음을 내디뎠다. 경남도민일보를 출발한 전세 버스는 37명을 태우고 달렸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버스 안에서 문경 새재에 대해 들려줬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왼쪽)이 문경새제 1관문 앞에서 옛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간선도로 통영로가 넘는 고개입니다. 통영로는 열흘을 걸어 점촌 유곡역에서 동래로랑 합해집니다. 동래로는 영남대로로 알려졌는데 사실 영남대로는 쓰인 적이 없고 1970년대 한 대학교수가 대중적인 이름으로 찾아 붙였을 따름입니다. 백두대간에는 고개가 신라 때 열린 계립령을 비롯해 새재, 죽령, 추풍령 등이 있는데 서울로 이어지는 최단거리가 새재였습니다."

대동여지도를 탄생시킨 고산자 김정호는 1864년 <대동지지(大東地志)>도 만들었다. 거기 '정리고(程里考)'에는 조선 시대 간선 도로 10개가 나온다. 기점(起點)은 모두 임금이 있는 서울이다. 의주로, 경흥로, 평해로, 동래로, 봉화로, 강화로, 수원별로(別路), 해남로, 충청수영로, 통영(별)로. 이 가운데 통영로와 동래로만 새재를 넘었고, 경남에 종점이 있는 것은 통영로가 유일하다.

"새재는 많이 알려져 언제나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기 어려운 토끼비리랑 고모산성을 소개합니다. 고모산성 진남관에서 남(南)은 남쪽의 왜적을 뜻합니다. 관(關)은 자물쇠, 빗장입니다. 그러니까 왜구의 침략을 진압하는 자물쇠가 됩니다. 임진왜란 등 왜적에게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가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문경으로 드는 좁은 골짜기에 자리잡았습니다. 적은 병력으로 효과 있게 차단할 수 있다는, 군사 목적 입지입니다."

"진남관 옆에 토끼비리라는 옛길이 그대로 있습니다. '비리'는 '벼랑'을 이르는 경상도 말인데, 그러면 '토끼'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후백제 군대에 쫓긴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구 팔공산에서 여기까지 도망쳐 왔을 때 길이 없어졌다, 그런데 앞에 토끼가 나타나 뛰어갔는데 그 길을 뒤따라 왕건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토끼비리가 됐다'고 풉니다. 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경상도 말 '토낀다'에서 비롯된, '토끼는 벼랑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버스는 서마산 나들목에서 창녕을 거쳐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경남도민일보에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를 연재하고 있는 최헌섭 원장은 다시 "통영로는 지금 달리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비슷합니다. 역사적으로는 가야를 병탄하고 한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신라의 영토 확장 경로와도 닮았습니다"라 덧붙인다.

두 시간 남짓 걸려 진남관 아래에 닿아 토끼비리로 올라갔다. 토끼비리는 영강의 비탈 기슭을 따라 오른쪽으로 나 있다. 참나무 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강가 풍경이 그럴 듯하다. 한여름이면 탁족을 즐겨도 좋겠다 싶다.

생태·역사기행에 함께한 사람들이 문경 토끼비리를 따라 걷고 있다. /유은상 기자

지금 토끼비리에는 나무 난간이 있지만 옛날에는 매우 위험했겠다. 바닥은 온통 바위가 깔렸는데, 옛적 사람들이 많이 다닌 때문인지 반들반들 윤이 나는 데도 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지금과 달리 타박타박 걸어야 했던 옛날 사람들 고달픔이 그대로 남았다.

고모산성으로 갔다. 석현성(石峴城)이라고도 하는데 1500년 남짓 이전인 삼국 시대에 쌓은 것이란다. 물론 지금은 조선시대 가장 발달된 성곽 모습으로 남아 있다. 바깥에는 여기 산성과 나이가 비슷한 고분이 여럿 있어 오래 전부터 사람의 자취가 스몄음을 알 수 있다. 여기 들어서면 문경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안쪽에는 복원한 옛 주막과 그대로 남은 성황당이 있다. 산성이면 군사 지역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군부대 안에 술집까지 있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산성이 군사 기능을 잃은 뒤 주막이 들어선 것이다.

최 원장을 따르면 옛날 성황당은 마구 들어서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기초자치단체마다 하나씩만 만들어졌다. 문묘와 여단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를 비롯한 세상을 떠난 명현을 모시는 데가 문묘고 천지신명을 모시는 데가 성황당이며 저승에 못 가고 이승을 떠도는 영혼을 위하는 데가 여단이다. 귀신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점심을 먹고 문경새재로 향했다. 오후 2시. 들머리에 옛길박물관이 있다. 세계에 하나뿐인 옛길 전문 박물관이라는데, 시간이 모자라 30분만 둘러봤다. 제대로 설명을 들으며 돈다면 두 시간도 모자라겠다.

새재 제1관문 주흘관을 거쳐 제2관문 조곡관까지 3km 남짓을 걸었다. 제3관문 조령관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오를 때는 신발을 신었고 내려올 때는 신발을 벗었다. 발바닥이 기분좋게 화끈거렸다. 벚나무 그늘이 제법 그럴 듯해 덥지도 않았다. 길 따라 흐르는 개울도 시원한 기운을 뿜어줬다. 신길원 현감 충렬비와 선정비 무리, 조림원터, 교귀정과 용추샘 같은 명소와 떨어지는 물길 시원한 몇몇 폭포에도 들렀다.

조선 시대 영남 선비들은 과거 보러 한양 갈 때 새재 말고 다른 고개는 넘지 않았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이란다. 여기에 '문경(聞慶, 옛 이름 聞喜)' 지명이 주는 매력이 더해졌다.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인데, 과거 보는 선비한테 기쁜 소식이란 '급제'말고 없었던 것이다.

숲과 물이 함께하는, 가파르지 않은 길을 일행과 함께 걸으니 몸도 마음도 가뿐해진다. 어쨌거나 이번에 걸은 문경새재는 이미 옛길이 아니다. 예전에는 길이 이다지 넓지 않았고 선형이 바뀐 데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문경새재 값어치를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길은 고정돼 있지 않고 언제나 시대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어 왔다. 옛 사람은 옛길을 걸었을 따름이고 요즘 사람은 요즘 길을 걸을 따름이다. 저녁 6시 버스를 타고 다시 경남도민일보 앞에 이르니 8시가 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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