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의 영국에서 본 한국] (9) 신뢰도 1위의 직업 '의사' 그리고 NHS

영국으로 떠나기 전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다양한 직업에 대한 그 나라 사람들의 인식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의료보험 제도였다.

먼저 첫 번째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건 그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가치관을 엿볼 수 있을 뿐더러 해당 시기 영국이란 나라를 해석하는데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조사된 직업 신뢰도와 비교해 보는 일 또한 비록 전문적인 연구자의 입장은 아니지만 대단히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영국의 한 병원, 모든 의사들과 직원들은 모두 세금으로 운영되는 NHS 소속이며 영국민은 물론 영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까지 무료로 진료받고 치료받을 수 있다.

그러던 중 25년째 계속되고 있다는 한 여론조사 기관(IPSOS MORI)의 직업 신뢰도 조사를 처음 접했다. 누구나 그렇듯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건 맨 꼭대기가 아니라 바닥이었다. 놀랍게도(?)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아닌 기자들이었다.

BBC나 가디언처럼 많은 이들이 믿고 따르는 언론사가 있는 반면 타블로이드로 상징되는 온갖 옐로우 페이퍼들의 전횡이 오랫동안 지속된 결과였다. 비록 2009년 터진 국회의원들의 '비용 청구 스캔들'로 순위를 맞바꾸긴 했지만 올해 루퍼트 머독의 도청 파문이 불거졌으니 내년 순위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가장 믿음직한 직업으로 선정된 건 무엇이었을까. 흥미롭게도 1983년 처음 조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뢰도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은 직업은 의사였다. 이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환자들이 의사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신뢰도를 요구해 왔다는 점도 작용을 했지만 2차 대전 직후 설립된 NHS(National Health Service, 100%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의료 제도)의 공공성 확립 덕분이었다.

영국의 의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자 가장 오래 된 전국민단일 건강보험 제도(Single payer system)인 NHS 소속이다. 그들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공부한 사람들이며 졸업 후 대부분 개인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병·의원이 아닌 공공의료의 영역에서 일해 왔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서두에서 언급한 두 번째 궁금증, 즉 영국의 의료복지 시스템으로 연결이 되었는데 그 계기를 제공한 건 다름 아닌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각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비교하며 비인간적인 미국의 의료보장 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작품)였다. 대단히 유치한 발상이었지만 과연 정말 그 영화에서처럼 돈 한 푼 내지 않아도 누구나 진료 받고 수술 받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집에 갈 때 교통비까지 주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알다시피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의 기치아래 자본주의 국가로는 최초로 본격적인 복지국가 구현에 나섰던 나라다. 그 신호탄이 바로 NHS의 출범이었다. 그런데 그 출발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비록 승전국 가운데 하나였지만 전쟁 전부터 지속된 경제공황으로 국가 재정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삼시 세끼 밥 먹기 위해 자원입대한 청년들이 수두룩했단 말까지 있었을까.

참전했던 젊은이들에겐 아무런 미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 거의 대부분이 국가를 패망의 위기에서 건진 전쟁 영웅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 대신 완전고용과 전면적 복지국가 건설을 공약으로 내건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을 선택한 것이다. 말 그대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압도적 승리였다. 하지만 힘든 시기일수록 국가가 더 많은 부분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였고 영국 의회 역사에 노동당이 과반을 넘기며 단독으로 여당이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많은 복지 정책들이 폐기되거나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정 보완됐는데 그 중 거의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의 원칙을 고수하며 건재한 게 바로 NHS 시스템이다.

물론 초기엔 국가에 고용된 동네병원 의사(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그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 병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없애 주겠다는 게 총선의 최대 공약 중 하나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직접 확인한 NHS 는 영화 '식코'에서 봤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딸아이가 척추측만증 소견이 있어 찾아 간 병원에서 받은 서비스는 지금껏 받아 본 그 어떤 병원의 그것보다 친절했고 따뜻했을 뿐만 아니라 세심했다. 몇 차례나 문진하고 사진 찍고 MRI(자기공명영상)와 CT(단층촬영)까지 하고 난 뒤 조심스레 수술 권유를 받았는데 그럴 경우 아이가 회복할 때까지 병실은 물론 바로 옆에 부모의 방을 따로 제공하며 필요할 경우 통역까지 병원에서 자체 고용해 방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모든 비용은 식비까지 포함해 완전 무료라 했으니 비록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수술을 받고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야말로 실감나지 않는 완벽한 서비스였다.

어려운 때일수록 없는 이들을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그토록 훌륭한 제도를 과감히 시행케 했듯 2009년 경제위기가 닥치자마자 정부(당시는 노동당 정부였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연 소득 15만 파운드(우리 돈 약 2억 8000만 원) 이상인 부자들에게 50%의 소득세를 물리는 일이었다.

   
 

귀국하고 8개월, 부자 중의 부자만 산다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아이들 무상급식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투표에 자그마치 60%가 참여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부자 아이들에게 밥을 공짜로 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취지로 발의된 주민투표였거늘 그 부자들은 엉뚱하게도 세금이 오를까 걱정이라며 투표소에 줄을 섰단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땅불리스 돈불리제'로 변질됐다는 유머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은 게 오직 필자뿐일까.

/김갑수(방송인·영국 셰필드대 정치학 석사)

<김갑수의 영국에서 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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