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7) 어현을 넘어 칠원으로

오늘은 '답사계절' 백혜숙 회원의 차량 봉사로 출발지인 함안까지 수월하게 이동했습니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함안군의 치성이 있던 자취를 살펴봅니다만, 겨우 민가의 담장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은 구릉에 의탁한 서쪽 성벽인데, 일정상 함성중학교 안에 옮겨져 있는 자료들만 살피고 출발합니다.

◇함안읍성 = 함안면 소재지에 있는 비봉산(飛鳳山: 101.5m) 자락과 그 아래의 들판에 걸쳐 쌓은 평산성식 읍성입니다. 1510년에 처음 쌓았고, 1555년에 고쳐 쌓을 때 북쪽을 넓혔습니다. 처음 쌓은 평면은 방형이고, 북쪽을 늘려 장방형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 자취를 살필 수 있습니다. 성은 거의 다 허물어지고, 동성벽과 남성벽이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면서 남아 있고, 서성벽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함주지> 성곽에 전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군에는 처음에 성지가 없었다. 1510년의 삼포왜변 때 웅천 등의 성이 함락되니 나라에서 군으로써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은 석성을 쌓도록 하여 둘레 5160자, 높이 13자, 옹성(甕城) 3, 곡성(曲城) 10을 갖추었다. 뒤에 1555년에 또 왜변 때문에 다시 군성을 고치니 둘레가 7003자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 책에는 관련 시설로 504개의 치(雉)와 동·남·북의 문이 있는데, 문밖에는 현교(懸橋)가 있어 유사시에는 다리를 들어 적의 침입에 방비했습니다. 성 안에는 75개나 되는 우물이 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위에서 치라고 한 것은 그 수로 보아 타(朶)라고도 하는 여장(女墻)을 이르는 것일 테고, 기실 치는 위에 곡성이라 한 10개를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옹성이 세 개인 것은 동·남·북의 문에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록에는 없지만 드는 다리인 현교가 있다 했으므로 성 밖에 해자를 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칠원으로 가는 길은 성산성 아래의 무진정까지는 지금의 국도 79호선과 비슷한 선형입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해동지도 -함안->와 <조선후기지방도 -함안군->에 그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함안읍성의 북문을 나선 길은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이르는데, 얼마지 않아서 괴산리 붕북개 마을에 듭니다. 마을 이름은 북문밖을 그리 이르는 듯한데, 이곳에는 먼 과거에 세운 것으로 헤아려지는 선돌 두 기가 길 양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짝을 이룬 것이니 남녀를 형상한 것이려니 여겨지지만 마을쪽 선돌이 차에 치여 지금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선돌을 지나면 길가 논둑에 규모가 큰 고인돌 한 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돌과 고인돌은 이곳으로 오래된 길이 지나고 있음을 일러주는 잣대 구실을 해줍니다.

◇이수정과 무진정(無盡亭) = 고인돌을 지나 성산성(사적 제67호) 아래에 닿으면 호수라기엔 작은 연못가 비탈에 잘 지은 무진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있습니다. 이수정이라 불리는 이 작은 습지는 함안천이 이곳 지협에서 흐름이 막히게 되어 생긴 것인데, 이를 경관요소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 이수정 가에는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와 부자쌍절각(父子雙節閣) 등 많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교통의 요충지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함안천의 흐름이 막혀 생겨난 작은 습지 이수정, 위쪽에 위치한 무진정은 조삼 선생의 덕을 기리고자 후손이 지은 정자다.

무진정(無盡亭: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은 조삼(趙參) 선생의 덕을 기려 명종 22년(1567)에 후손들이 선생께서 기거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삼았고, 무진정이라 쓴 편액과 기문은 주세붕 선생께서 쓰고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한 것이지만,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중요합니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이수정을 지나는 길은 대체로 지금의 함안천과 나란한 선형으로 열려 있고, 가야와 검암 사이의 벌판은 들이 넓어 대평(大坪)이라 적었습니다. 함안천이 몸을 불리는 산인면 송정리에는 이현을 넘어 온 길과 통영로가 만나 사거리를 형성하는데, 옛 지도에는 사거리점(四巨里店)이라 적어 두었습니다. 아마도 목마른 길손들이 이곳에 들러 갈증을 삭였겠지요. 이 점을 지나 함안천에 놓인 냉천교(冷泉橋)를 통해 내를 건넜습니다. 이름을 보아하니 가까이에 찬샘(새미)이 있었던 듯한데, 요즘 철에 우리 같은 걸음이들에게 한 바가지의 물은 그야말로 감로수입니다.

산인 송정리에서 칠원으로 이르는 길은 지금의 1021번 지방도가 덮어쓰고 있습니다. 송정리를 지나 부봉고개 들머리에서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두 기의 빗돌과 마주합니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역시 길을 일러 주는 잣대가 됩니다. 이 중 효자 다물의 빗돌은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세운 것입니다. 부봉고개 서쪽 무덤 가에는 2기의 고인돌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도롯가의 것은 공사 때 옆으로 밀쳐진 듯 상석이 떠 있습니다. 이 고갯마루에도 세운 지 오래지 않은 두 기의 빗돌이 있어 가히 함안은 비석의 고장인 듯합니다.

◇어현(於峴) = 부봉리를 지나 운곡리에서 함안 산인면과 칠서면의 경계에 있는 지금은 도덕고개라 부르는 어현에 오릅니다. 이 고개는 달리 어령(於嶺) 또는 도적치(盜賊峙)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도둑이란 말을 꺼려서 비슷한 음가의 도덕고개라 부릅니다. 함안 칠원과 산인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인데, 조선시대에는 함안군과 칠원현의 경계를 이루는 자연지리구에 있던 고개였습니다. 지금의 도로는 싸리재쪽으로 가까이 나 있지만, 옛길은 운곡리에서 곧장 어령마을로 이르는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이 고개는 <경상도지리지> 함안군 사방계역에 "동북쪽으로 칠원현 경계인 어이현(於伊峴)과 21리 300보 떨어져 있다"고 하여 어이현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지금의 이름인 도둑고개는 조선시대 말엽에 그린 <조선후기지방지도 -칠원지도->에 도적치(盜賊峙)라 한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어현을 넘는 고갯길이 가진 중요성은 이 골짜기 양쪽에 축조된 안곡산성(安谷山城)과 칠원산성(漆原山城)을 통해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성의 목적은 이 고개로 이르는 교통로를 이용한 침투로의 차단에 두어졌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회산리 신산마을에 드는데, 회산천 가에는 고인돌이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신산마을 배후 구릉에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 넓은 범위에 걸쳐 있고, 정상부에는 산성과 봉수대가 있어 이 길을 통한 교통의 역사가 매우 오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 고개가 끝나는 안곡산 자락에는 고려시대부터 운용된 창인역이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창인역(昌仁驛)=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신산마을은 전통시대의 역원취락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김해의 금주도에 딸린 역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창원의 자여도에 배속되었습니다. 역이 있던 신산마을의 옛 이름은 옛 창인리인데, 창인역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역이 자리했던 이곳은 낙동강에서 어현(於峴)을 넘어 가야읍에 이를 수 있는 교통의 요충입니다. 이러한 교통 요충지로서의 입지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역이 있는 회산리 신산마을을 에워싸듯 칠원산성, 안곡산성, 무릉산성이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역은 <동국여지승람> 칠원현 역원에 "현 서쪽 7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무릉지> 역원에는 "현 서쪽 7리에 있다. 남쪽으로 창원 근주역과 30리, 서쪽으로 함안 파수역과 30리, 북쪽으로 영포역과 20리이다. 대마 1필, 기마 2필, 복마 10필, 역리 42명이다"고 전합니다. <자여도역지>에는 "창인역은 자여역 서쪽 60리 지점의 칠원 땅에 있으며, 상등마 1필, 중등마 2필, 하등마 7필, 위전답은 22결 73부 3속이다"고 했습니다.

창인역이 있던 신산마을에는 최근 소규모 제조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원래의 역터를 헤아릴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옛 역터를 지나 광려천을 건너 칠원에 듭니다. 칠원의 서쪽에는 용산이라 불리는 구릉이 있는데, 그 구릉의 북쪽 기슭은 쇠만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지금은 이곳도 공장들이 들어서 있습니다만, 구석기시대의 몸돌이 채집되기도 하였고, 청동기시대의 조갯날 도끼가 수습된 적도 있습니다. 또한 바로 앞 경작지에는 이와 시기가 같은 고인돌이 분포해 있어 오래전부터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칠원현성에서 일정을 마무리합니다.

/글 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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